24화
그날 밤 라비엘리는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흐릿한 잔상이 그녀를 흔든 탓이다.
불 꺼진 방 안에 홀로 남자 길었던 하루가 마치 조각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라비엘리는 조용히 누워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냥꾼과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남자를 생각했다.
죽음의 순간을 처음 목격한 건 아니었다.
라비엘리의 세상이 뒤집어진 그날, 조금 전까지 살아 숨 쉬고 움직이던 자들이 낙엽처럼 스러지던 걸 수없이 목격하였다.
전부 잊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가슴 깊은 곳에 묻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한 순간, 과거는 마치 오늘 당장 일어난 것처럼 되살아났다.
마치 연기처럼 피어난 오래전 기억은 라비엘리의 평화를 부정하고 그녀의 밤을 방해하였다.
자꾸 밀려드는 스산한 기억에 라비엘리가 몸을 잔뜩 웅크린다.
‘차라리 그라도 있었다면.’
그러나 루시안을 떠올리자 조금 전의 총성이 다시 귓전에 울렸다.
‘탕.’
루시안 마이어는 단 한발의 총알로 사냥꾼을 살해했다.
사내는 바로 코앞에서 라비엘리를 겁탈하려 했고,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간 그녀도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주저하지 않고 총을 쏘았다.
대범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큼 제 실력을 확신해서일까.
‘잘은 몰라도 분명 총을 한두 번 쏴본 솜씨는 아니야.’
저를 치료한 솜씨를 보면 의사가 맞는 것 같은데, 사냥에도 본래 흥미가 있었던 걸까.
반듯하게 천장을 향했다가, 또 옆으로 돌아눕기를 수차례.
결국 지루하고 긴 한숨과 함께 라비엘리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요, 라비엘리.’
오랜만에 혼자 달릴 수 있다는 기쁨에, 공기가 제법 부드러웠던 탓에 긴장을 놓고 아무 말이나 흘린 것은 오히려 자신이 아니던가.
그래놓고 상대가 장난스레 던진 말에 맞아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잊히지 않았다.
도망가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 수준이 아니라 곁에서 내내 속삭이는 것처럼.
‘미쳤어.’
라비엘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뒤집어썼다.
그러자 이번엔 제가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적갈색 눈동자의 사내를 마주하고 말았다.
‘맙소사.’
루시안 마이어.
눈을 감아도 다시 떠도. 이불을 뒤집어써도 벗어나도 사내가 남긴 시선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를 저택에서 마주했던 첫날 저녁, 제게 은근히 흘린 목소리가 떠올랐다.
‘도망갈래요?’
도망간다면요?
날 데리고 어디로 갈 건가요?
라비엘리는 대답할 수 없는 루시안을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라비엘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찬찬히 방 안을 살핀다.
어제 묵었던 방보다 넓은 데다 제법 잘 꾸며져 있었지만, 어쩐지 어제의 단출한 방이 그립다. 넓은 탓에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발목을 다쳐서 산책을 할 수도 없고.”
라비엘리는 처음으로 안전한 마이어가의 정원을 그리워하였다. 부질없는 생각을 끝낸 그녀가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든다.
따뜻한 기운이 밀려오며 조금 전보다 나아진 심장 박동에 잠을 청하려 했을 때였다.
복도 너머에서 은근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눈을 감는다. 그러자 문 너머 낯선 공기가 훅 밀려 들어오더니 누군가 걸어 들어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뭐지?’
고개를 돌려 문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발소리는 진해지고 있었다.
‘로제인가?’
어쩌면 잠 못 들고 계속 뒤척이는 사이 이른 새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초를 갈고 새 물을 떠다놓으려 들어왔을지도 몰랐다.
계속 자는 척을 해야 할지, 아니면 눈을 떠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라비엘리가 머뭇거렸다.
그러나 하녀의 발소리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주의하였다.
낯선 발걸음 소리는 이내 라비엘리의 침대 앞에서 뚝 멈추었다.
“…….”
라비엘리는 몸을 움직이려 하였으나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겁은 먹은 탓인지 아니면 말에서 떨어지며 다친 몸의 타박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라비엘리가 마치 돌처럼 굳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라비엘리를 건드렸다.
“라비엘리.”
루시안였다.
일어날 타이밍을 놓쳐 머뭇거리는데 루시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아직 안 자고 있었네요.”
“아뇨, 이제 막 자려고 했어요.”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루시안이 그녀에게 무언가 내밀었다.
“복도에 떨어져 있는 걸 찾았어요. 이거 당신 거 맞죠?”
“네, 맞아요.”
루시안이 건넨 것은 메이지가 만들어 준 향낭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 떨어졌나 봐요.”
“고마워요.”
뻗은 손이 떨렸지만, 부디 어둠 속에 가려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라비엘리의 손 위에 향낭을 내려놓은 루시안이 나른히 소곤거렸다.
“잠이 안 오면 도와줄까요?”
“네?”
“불면증에 좋은 방법을 알고 있거든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라비엘리는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내린 밤,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루시안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진 탓이다.
“아뇨, 괜찮아요.”
“체온. 사람의 체온이 가장 좋아요.”
제 피부에 닿은 루시안의 시선이 몹시 뜨겁게 느껴진다.
“괜찮아요. 그러니 이만 나가줘요.”
“당신이 늘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루시안, 제발.”
“그런데 이런 종류의 외로움이었으면 말하지 그랬어요.”
“…….”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는데.”
자늑자늑한 목소리를 내며 루시안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돌아서 있던 라비엘리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만, 거기까지 하라고 외치며 그를 밀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더 이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돌아앉은 라비엘리를 따라 루시안도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라비엘리.”
“…….”
루시안의 크고 부드러운 손이 라비엘리의 어깨에 닿았다. 라비엘리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싫지 않은 듯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여위었어요.”
“…….”
“어깨가 한 손에 전부 잡힐 만큼 너무 작고 연약하군요.”
그 순간, 루시안이 고개를 숙이더니 라비엘리의 어깨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쪽.
부들부들한 입술이 어깨에 닿는 순간, 라비엘리는 지금 숨이 멎는 건 아닐까 생각하였다.
숨소리는 조금씩 짙어지고 있다.
가슴과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느껴질 만큼.
어깨를 감싸 안았던 손에 처음보다 힘이 들어갔다. 루시안은 아름답게 드리워진 그녀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밀며, 희고 마른 목덜미에 다시 한번 키스했다.
“예뻐요, 라비엘리.”
촉촉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라비엘리는 이쯤에서 그의 손길을 거부하면,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라비엘리는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안 돼요, 루시안.”
“뭐가요?”
“지금…… 당신.”
“내가 뭘요?”
루시안은 특유의 나른한 음성으로 대꾸하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면서, 도저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듯 능글맞은 표정으로.
“당신이 하려는 거.”
라비엘리는 두려웠다.
그를 밀어내고 있지만, 더는 밀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제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리고 향해야 하는지 그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게 뭔데요?”
그가 떨어뜨린 미소가 라비엘리의 어깨를 타고 또르르 굴러간다.
“그만…… 그만 해요.”
“그러니까, 그게 뭔지 말해봐요.”
루시안은 집요하게 굴었다.
물론 집요한 건 그의 목소리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