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오늘 당신에게 꽤 힘든 날이었잖아요.”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말에 하마터면 헛웃음을 내뱉을 뻔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
사람이 죽는 걸 코앞에서 지켜보는 건 사실 몹시 괴롭고 끔찍한 일이긴 했으나, 제가 무서운 일을 겪은 것만큼 힘든 건 아니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랬다.
“힘들지 않았던 날을 찾는 게 더 빠를지도요.”
혐오가 짙게 밴 목소리에 루시안이 찬찬히 돌아선다.
“사는 건 원래 그렇죠. 온전하고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보다 많을지도요.”
“물론 그렇겠지. 삶은 원래 가진 자들을 위한 겁니다.”
집안이 몰락하기 전 라비엘리의 삶은 평화로웠다.
머리를 써야 할 만큼 고민할 일도, 고단할 만큼 노력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저 티타임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고, 언제 새로운 장신구를 사러 갈 것인지를 생각하며 백작저의 아름다운 정원이나 거닐면 되는 삶이었으니까.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성은 누구에게 넘어갔으며, 다시 그곳에 가볼 수는 있을까.
그러다 문득 다섯 살 무렵 잃었던 동생의 잔상이 스치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시절의 기억은 꽤 생생하게 남아 있었는데 어린 라비엘리에게도 아기의 실종은 꽤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게 있었군요.”
루시안은 순간 미묘하게 변한 라비엘리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일이에요.”
“지나온 과거가 전부 우리를 만드는데, 의미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나?”
루시안의 가벼운 말에 라비엘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을 마주한 순간 루시안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날 무슨 철학자 보듯 하고 있군.”
“당신은 정말 이상해요.”
“?”
“정말이지.”
“제대로 봤네요.”
루시안은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라비엘리에게 다시 물었다.
“웬만한 일은 궁금해하지 않는데, 그 입술 안에 뭐가 담겼는지는 몹시 궁금하네.”
“…….”
“뭘까. 그러고 보니 나 당신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
“로튼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요. 롭에서 온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뿐.”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잠시 고개를 아래로 숙이더니 주저하는 듯 입술에 힘을 주었다.
길지 않은 시간 그녀를 지켜보았으나, 루시안은 그것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라비엘리가 하는 습관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원할 때 말해줘요. 지금은…….”
“평화가 뭔지 잘 몰랐어요.”
라비엘리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깨끗한 시트 위에 닿았다.
이야기가 금방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한 루시안이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행복이 무엇인지 평화는 어떤 것인지 안녕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지 못했어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르죠.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았어요.”
라비엘리는 담담한 목소리로 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백작가의 고명딸, 끔찍한 사기와 반역에 연루된 일, 결백을 밝혀냈으나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 부모님과 허공에 뜬 작위,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재산을 믿었던 자들에게 갈기갈기 찢기고 남은 건 몸뚱이뿐이었던 과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낯선 사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죽으려고 했는데 그럴 용기가 없었어요. 행복이 뭔지 평화가 뭔지조차 모르는 너무 나약한 아가씨라서. 그래서 죽지 못해 팔리듯 로튼으로 왔어요. 어렴풋이 이름만 들어봤던 친척이 주선한 자리였어요. 후작이 제 후견인이 되어주신다는 걸 전하고 친척도 며칠 뒤 죽었어요. 제게는 선택권이 없었어요.”
“저런.”
“후작께선 나이는 많았지만, 대단한 석학인 데다 로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셨으니까. 그분께서 저를 잘 돌봐주실 거라 믿었어요.”
“그랬군요.”
“어리석었죠.”
라비엘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제, 그녀 몸 곳곳에 남아 있는 상처를 보듬는 건 루시안이 해야 할 일이었다.
“라비엘리, 나약하지 않아서 살아있는 겁니다.”
“…….”
“약했다만 이미 죽었겠지.”
루시안 마이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살아남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에요.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았으니, 당신은 누구보다 강한 여자라고요.”
“그런 게 아니에요.”
라비엘리는 맥없이 고개를 저었으나 어쩐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다리는 게 있었어요.”
“기다리다니?”
루시안의 목소리는 어딘가 조급하게 들렸다. 그 역시 제가 실수했다고 느꼈는지 슬쩍 몸을 뒤로 빼더니 다시 느긋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다행히 제 생각을 정리 중인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섯 살에 동생을 잃어버렸어요. 그 아이가 사라졌을 때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해요. 감히 무겁다고도 표현할 수 없는 집안의 공기, 어머니의 울음, 아버지의 분노…….”
다만 모든 것이 명확한 것과는 별개로 어린 동생과 그녀를 돌보던 유모의 얼굴은 흐릿하였다.
라비엘리의 동생은 그렇게 유모와 함께 하루아침 사라져버렸다.
“슬픈 기억이었겠군요.”
“어쩐지 그 아이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어요. 난…… 그 아이가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라비엘리는 좀처럼 단호한 어조를 내지 않는 여인이다. 가시처럼 앙상하게 마른 몸매만큼, 늘 슬픔과 원망 그 어디쯤 눌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잃어버린 동생을 떠올린 순간만큼은 달랐다.
“잘했어요. 죽지 않고 버틴 건 잘한 일이에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시트를 세게 말아 쥐었다.
이 낯선 남자에게 과거를 털어놓게 될 줄도 몰랐는데 심지어 그에게 위로를 받고 있지 않은가.
라비엘리는 루시안이 이런 말을 꺼냈다는 사실보다 그의 위로에 제 마음이 진정되고 있다는 점에 놀라고 있었다.
“오늘은 피곤할 텐데 쉬는 게 어때요?”
루시안은 라비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냈다.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머리를 찬찬히 어루만지는 손길이 농염하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잖아요.”
라비엘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왔는데 하루라도 거를 수는 없지요. 이렇게 해야 산과 병증이 낫는다고 했잖아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다.
루시안은 마치 라비엘리가 은근히 올가미를 던져 저를 묶어낸 것처럼 그녀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겠군요.”
루시안이 못 이기는 척 느슨하게 몸을 돌린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갈색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쉬게 하고 싶지만, 당신이 원한다니 별수 없군.”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 올렸다. 깨끗하게 세탁한 뒤 잘 말린 이불을 들치자 향긋한 냄새가 순간 밀려든다.
그러자 곧바로 낡은 슈미즈 위로 길고 앙상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이 안에 놓인 희고 마른 다리를 생각하자 평정심을 찾기 어려웠다.
“시작하죠.”
루시안의 말이 끝나자 종아리에 서늘한 기운이 스미더니 이내 치마가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졌다.
이번에도 라비엘리는 그저 시트만 움켜쥐곤 어금니를 살짝 물었다.
전신에 힘을 빼고 누운 채 그의 움직임만을 기다리고 있다.
루시안은 조심스레 여인의 허벅지를 쥐고 천천히 벌렸다.
그러자 시작된 아슬아슬한 호흡…….
“천천히 할게요.”
사내의 손가락이 보들보들한 살점을 젖히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읏…….”
“……다섯.”
다섯까지 숫자를 센 루시안이 천천히 손가락을 뺀다.
숨을 참고 있던 라비엘리는 그제야 뜨거운 공기 한 줄기를 뱉어냈다.
“아픈가요?”
루시안이 묻자 라비엘리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의식과 같은 행위라고 다시 한번 되뇌지만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다시 할게요.”
나른한 힘이 곧바로 라비엘리의 무릎에 전해진다.
다리는 속절없이 벌어졌고, 또다시 사내 앞에 무방비한 자세를 하고 말았다. 루시안은 무릎을 양손으로 잡고 라비엘리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똑같이 할 겁니다. 아프면 말해줘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곤란해진다.
그러나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감정은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 마치 테아노가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하는 양 그의 말을 철저히 지키려는 듯 보인다.
약을 바르는 것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침대 위의 루시안은 생각보다 점잖았고 행여 무방비 상태가 된 라비엘리를 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속절없이 빠르게 끝나고 말았다.
“오늘은 아프지 않았습니까?”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속옷을 정돈해주고 치마를 내리며 다정히 물었다.
“네.”
짤막하게 대답한 라비엘리가 이불을 코 바로 아래까지 덮는다.
행위가 이어질 땐 느끼지 못하였는데, 막상 끝나면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제 쉬어요, 라비엘리. 오늘 고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