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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22)화 (22/136)

22화

라비엘리와 루시안이 늦은 저녁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로제는 몹시 놀랐다.

그러나 라비엘리가 말에서 떨어진 데다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종종거렸다.

로제는 그들이 어제 묵었던 방보다 곱절은 넓은 방을 내어주었다.

높으신 분들이 사냥하러 올 때 머무는 방이라고 했는데, 침대 크기나 시트 상태가 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하고 라비엘리에게 새 옷도 가져다주었다.

물론 라비엘리가 늘 입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싸구려 슈미즈였지만, 피투성이가 된 드레스를 입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래도 내가 한 일이 바보 같은 짓이었나요?”

루시안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누운 라비엘리가 말했다.

“농담하는 걸 보니 살만한가 보군요. 잠깐 누워 있어요.”

아침에 라비엘리가 건넨 20크랜 때문이 아니다. 라비엘리가 다른 하녀들의 부축을 받고 몸을 씻으러 간 사이, 루시안이 로제에게 100크랜을 건넨 것이다.

물론 라비엘리에겐 말하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죠?”

“귀여워서요.”

루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엘던의 주인인 에몬 질은 로튼에서 약초와 향신료를 취급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가 약재상은 아니었으나 혹시 남겨둔 약초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1층으로 내려가자 로제가 물을 끓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차를 올리려는 모양이었다.

“로제.”

“아, 부인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 덕분에요.”

“다행이에요.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루시안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인 뒤 용건을 꺼냈다.

“혹시 여기서 약초를 취급하진 않습니까?”

“아, 사장님 창고에 몇 가지 있기는 해요. 하지만 짐승을 유인할 때 쓰는 것 정도밖에는 없을 거예요.”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루시안의 말에 로제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에몬의 창고를 내보이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로제, 사실 난 의사예요. 약초만 좀 쓸 수 있으면 이아신스 부인이 오늘 밤 조금 더 편하게 잘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통증이 꽤 심한 상태라.”

루시안의 말에도 로제는 입술을 꼭 붙였다 떼며 난처해 했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사장님께서 모르시게 조금만 쓰셔야 해요.”

“물론이죠. 혹시 모르니 당신에게 미리 돈을 지불할게요.”

“그래요.”

“고마워요, 로제.”

상냥한 하녀 덕분에 루시안은 에몬 질의 창고에서 잘 말린 약초를 조금 가져올 수 있었다.

통증을 가라앉히고 감염을 방지하는 잎과 따뜻한 물, 수건 등을 챙긴 루시안이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라비엘리는 그사이 잠들어 있었다.

“…….”

잠든 라비엘리를 빤히 바라보던 루시안이 들고 온 약초를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나무 의자를 끌어와 그 위에 무거운 몸을 내려놓았다.

그는 가져온 약초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마취에 쓰이는 벨라도나는 마약 성분이 있어 적절히 쓰면 통증을 줄이는 데 아주 요긴한 풀이었다.

‘솜씨가 나쁘지 않군.’

에몬의 창고에는 제법 값나가는 약초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가져와 쓰고 싶었지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들키고 말 것이다.

루시안은 괜한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바짝 마른 벨라도나를 뜨거운 물에 담그자 은은한 풀냄새와 함께 약초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루시안은 로제에게서 받아온 재료들로 상처에 바를 연고를 만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준비를 모두 마쳤으나 라비엘리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똑똑.

그때, 로제가 저녁 식사를 들고 올라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라비엘리가 천천히 눈을 뜬다. 죽은 듯 누워 있는 라비엘리를 힐긋 쳐다본 로제가 나무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조용히 나갔다.

“라비엘리.”

“…….”

라비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도저히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마치 그녀가 잠든 사이 누군가 밧줄로 온몸을 꽁꽁 묶어둔 것처럼 팔다리가 무거웠다.

“움직이지 말아요.”

루시안이 부드럽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확인해보았는데, 다행히 열은 없었다.

“당신을 좋아하는 아가씨가 가져다 주었어요. 약을 바르고 며칠 쉰다면 금방 나을 겁니다.”

“……며칠이요?”

“이대로 움직이는 건 무리예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조금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불안감을 이해한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라비엘리, 후작께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을 겁니다. 태후 전하의 병증은 가벼운 것이 아니고 병상에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는 아마 오스트린에 있을 거예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아무 말도,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며칠을 더 묵어야 한다니. 잊고 있었던 불안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라비엘리.”

“…….”

“당신 생각을 말해줘요.”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사실 모르겠어요.”

라비엘리는 후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더니 물끄러미 한마디를 떨어뜨렸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그녀의 질문에 루시안이 손을 들어 라비엘리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잘 빗고 정돈했다면 빛이 날 만큼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며칠 새 푸석하게 갈라져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는 질문은 루시안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완전히 표현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네 의견을 따르고 싶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

“오늘은 우선 아무 생각하지 말아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신의 건강이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시안이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다리를 전부 덮은 드레스를 걷어내자 퉁퉁 부은 발목이 드러났다. 루시안은 따뜻한 물을 수건으로 적시고 그녀의 다리를 조심스레 닦아냈다.

“아픈가요?”

“……조금.”

“따뜻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좋을 때가 있죠.”

“…….”

“조금 솔직해지는 건 어때요. 이건 조금 아픈 상처가 아닌걸.”

미리 만든 연고를 바르고, 루시안은 희고 뻣뻣한 붕대로 라비엘리의 다리를 천천히 감았다.

붕대를 감는 솜씨가 제법 능숙해 보여 라비엘리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의사라는 건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놀랍게도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고 나자, 영원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발목에 미약하게나마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실력이 좋군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더니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모든 방면에서 그렇죠.”

“그렇게 잘난 척하는 것 빼고요.”

“잘난 척이 아니라 정말 잘나서 말하는 겁니다만.”

루시안은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한 뒤에 다시 라비엘리의 드레스를 내려주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오늘 밤은 이제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도록 해요.”

루시안은 가볍게 대꾸하곤 처치한 것들을 대충 나무 쟁반에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비엘리가 불쑥 루시안을 불렀다.

“루시안.”

그사이 정리를 마친 루시안이 막 침대에서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괜찮다면…… 저녁 여기서 같이 먹어요.”

* * *

저녁으로 올라온 음식은 사실 단출했으나 곳곳에 로제의 성의가 느껴졌다.

사냥꾼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여관이라면 따로 요리사를 두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갓 구운 듯 보이는 빵은 먹을만했고, 알맞게 절인 생선에 잘 익힌 채소까지 이만하면 훌륭했다. 내륙 한가운데에서 생선은 귀한 식재료였으니까.

“다리는 좀 어떤가요?”

“괜찮아요.”

“내가 영 엉터리는 아니거든요.”

많은 대화가 오간 것은 아니었으나 꽤 부드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여전히 루시안 마이어를 믿을만한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하였다.

이 사내가 라비엘리 르휜을 웃게 할 수 있다는 것.

“조금 전 있었던 일이 아주 오래전에 벌어진 일 같아요.”

“그런가요?”

“우리…… 괜찮은 건가요?”

라비엘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조금도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여유롭게 대꾸한다.

“어차피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 데다 우릴 본 사람도 없을 테니 별일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 말아요.”

“…….”

“설마 그들을 동정하는 건 아니겠지.”

“아녜요, 그건 아니지만.”

동정까지는 아니었으나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뜨거운 차로 끔찍했던 하루의 잔상마저 털어내고 난 뒤였다. 라비엘리가 침대에 눕는 것을 도와준 루시안이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당겨 주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

“쉬어요.”

그의 목소리에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 사람을 둘이나 죽여놓고는 너무도 온화했고,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람치곤 몹시 평화로웠다.

라비엘리는 그의 갈색 머리를 조용히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불쑥 이렇게 내뱉고 말았다.

“루시안…… 약은요?”

문까지 걸어간 루시안이 걸음을 뚝 멈춘다.

그녀가 말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다.

그는 천천히 돌아서며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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