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다, 당신 뭐야.”
눈 깜짝할 새 친구를 잃은 어네스트는 장총을 쥔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러나 그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전문 사냥꾼이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파트너를 잃은 게 당혹스럽기는 해도 무너질 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루시안 마이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그는 느릿하게 앞으로 걸어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빙글 돌렸다.
그러고는 싱그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궁금할 거 없으니 그냥 꺼져.”
“이 새끼가…….”
루시안의 반응에 어네스트는 잔뜩 약이 올랐다.
그러나 상대가 든 건 권총이다. 어네스트는 어깨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장총을 슬쩍 손에 쥐었다.
“워, 워. 총을 들면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몰라.”
루시안이 총구를 위로 향하더니 다시 한번 장전했다.
어네스트는 제 장총에서 손을 떼며 루시안을 노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총을 든 사내와 상대하는 건 무리다. 어깨에 든 것을 내리고 장전하는 사이 머리에 구멍이 뚫릴 게 뻔하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결투의 기본도 모르나?”
어네스트가 어금니를 깨물자 루시안은 비실비실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 결투는 신사들끼리 하는 거지.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을 상대할 때 하는 게 아니라.”
“뭐?”
“그나저나 잘 생각해 봐. 내가 총을 쐈을 것 같아?”
루시안이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턱을 슬쩍 들었다.
어네스트는 그때까지만 해도 소년처럼 곱상하게 생긴 사내 따위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 말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쏘았는지도 모르게 총알이 날아왔는데 오칸의 이마를 명중시키지 않았던가. 그런데 녀석은 제대로 검조차 쥐지 못하게 생겼다.
총을 쏜 것이 이자가 아니라면?
녀석 말고 다른 일행이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네스트가 총을 드는 순간 그의 이마에도 구멍이 날지 모른다.
죽은 오칸에게는 안된 말이지만, 어네스트는 우선 살아 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 알았으니 좋게 말로 하지.”
어네스트가 슬그머니 총을 어깨에서 완전히 내리며 한쪽 입술을 씰룩거렸다.
총을 내려놓음으로써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표현한 것이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아무래도 여자 때문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 여자, 자네 여잔가?”
어네스트가 한쪽 구석에서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라비엘리를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냥…… 그러니까 여자가 혼자 길바닥에 있으니 창부인 줄 알고 말이야. 누가 데리고 놀다 두고 갔으려니 생각했다고.”
어네스트의 말에 루시안의 얼굴에 스며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오해가 있었어. 그냥, 오해일 뿐이라고.”
“알았으니 꺼져.”
루시안은 몹시 건조한 목소리로 권총을 두어 번 흔들어 보였다.
그 말에 어네스트가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고개를 틀었다 바로 세운 루시안이 손에 든 권총을 다시 겨누며 말했다.
“아, 미안해. 마음이 바뀌었어.”
“뭐?”
“우환은 없애는 게 나을 것 같네.”
탕.
단 한 발의 총성.
뜨거운 총알은 멍청히 서 있던 사내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어네스트는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그때까지도 라비엘리는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얼먹은 얼굴이었다.
“라비엘리?”
핏기가 완전히 가신 입술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루시안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
“이런, 괜찮습니까?”
루시안은 그런 제 감정을 최대한 다스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알레만 돌아왔길래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곤 예상했지만 내가 너무 늦었군요.”
“아니, 아녜요.”
루시안은 곧바로 라비엘리를 부축해 살풍경한 상황 밖으로 끌어냈다.
그녀의 치맛자락은 흙과 피로 엉망이었고 상의 역시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미안해요, 늦어서.”
루시안은 바닥에 널브러진 로브를 주워들어 라비엘리를 감싸주었다.
“고마워요.”
라비엘리는 울음에 섞여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루시안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라비엘리는 정말 혀를 깨물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 밀려드는 한기를 참아내기 어려웠다.
“말에서 떨어진 겁니까?”
루시안의 질문에 라비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찔했던 상황이 떠오르며 온몸 여기저기에 남았던 통증이 다시 시작되는 듯했다.
“발목을…… 다친 것 같아요.”
그 말에 루시안이 곧바로 라비엘리의 다리를 덮은 치맛자락을 들치었다.
희고 마른 발목은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그녀가 억지로 꽁꽁 묶어둔 흔적이 루시안을 아프게 했다.
루시안은 오른손으로 그녀의 발을 들더니 찬찬히 살폈다.
붓기를 확인하고 혹시 발목이 돌아갔는지를 관찰하는 눈매가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의사라고 했지.’
그렇게 생각하자 이곳이 진료실도 아닌 데다 치료할만한 것도, 소독약도 붕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 의사를 마주해 천만다행이라고.
그게 루시안 마이어라 다행이라고.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군요. 그래도 통증이 심할 테니 여기서 가볍게 처치하는 게 좋겠어요.”
“네.”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안이 다시 물었다.
“다른 곳은요. 다친 데 없습니까?”
라비엘리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에게 어리광을 부릴 마음도 제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를 이야기할 마음도 없었다.
그저 이 끔찍한 장면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바로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저를 겁탈하려던 자가 죽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옷이 찢기는 순간 차라리 죽어버릴 걸 하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가 아닌 상대가 정말 죽어버릴 줄은 몰랐다.
짐승을 사냥하는 줄로만 알았던 총이 이토록 강한 줄 미처 알지 못했다.
게다가 루시안 마이어에게 권총이 있으리라곤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갈라테이아까지 가는데 총 한 자루 없이 떠났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사이 루시안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더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다친 것에 집중하느라 이곳이 치료를 이어가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자리를 옮기죠.”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뚫린 구멍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미 흙길을 잔뜩 적시고 있다.
라비엘리는 인간의 몸속에, 그것도 머리에서 저렇게 많은 피가 샐 수 있다는 것에 다소 놀라고 있었다.
루시안은 라비엘리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라비엘리 역시 조심스레 루시안의 목을 끌어안는다.
평지를 찾아 얼마간 걷자 진동하던 피비린내가 가시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 연고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루시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잠깐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왜요?”
불쑥 치민 두려움에 루시안을 붙들었다.
평소 모습에선 상상할 수 없는 다소 격한 목소리였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비엘리의 반응을 이해한 루시안이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약초를 좀 뜯어올게요. 오는 길에 보니 훌레 나무 군집이 보이더군요. 필요한 녀석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하지만.”
“멀리 가지 않아요. 이 근방에서…….”
“싫어요, 무서워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루시안을 붙들었다.
그가 다시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두렵다.
“같이 가요. 두고 가지 말아요.”
“하지만 당신…….”
루시안의 셔츠 자락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루시안은 그녀의 불안을 충분히 이해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가벼운 처치를 하고 가는 건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그럼…… 조금 참을 수 있겠습니까?”
“네, 물론이에요. 괜찮아요.”
“여관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하죠.”
여관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라비엘리는 저를 떨어뜨리고 유유히 사라진 말이 떠올랐다.
후작이 어렵게 들여와 언제쯤 탈 수 있을지 전전긍긍했던 녀석이다.
말을 길들이겠다는 명목으로 저택을 벗어났는데 그 녀석을 잃는다면 정말 큰일이 아닌가.
“알레는요?”
“총소리에 놀랄 것 같아 묶어놨어요.”
루시안은 얼핏 태평한 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 같다가도, 어느 틈에는 몹시 냉철하고 잔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다정하게 라비엘리를 안아 들고선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레 그녀를 태운 루시안이 말 위에 올라탄다.
여전히 발목은 욱신거렸으나 라비엘리는 그제야 가슴 한구석에 있던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은 루시안의 리드에 따라 적당한 빠르기로 움직였다. 말이 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몸이 들썩거렸으나, 숲 한복판에 홀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얼마간 달려 다시 드넓은 평지가 나왔을 때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라비엘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당신, 여관에서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군요.”
“무슨?”
“로제를 죽이겠다고 한 거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봐요, 라비엘리. 다시 말하지만 그건 분명히 농담이었어요.”
“본인은 의사라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인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살리는 게 전공이라면서요.”
“평소엔 물론 그렇죠.”
“…….”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켜야 할 것.
내가 그런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라비엘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루시안은 오히려 안심이었다.
“꽉 잡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