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먼저 말에서 내린 건 양 볼이 오목하다고 느껴질 만큼 마른 사내였다.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장총을 고쳐매더니 라비엘리에게 다가왔다.
“말에서 떨어졌다고요?”
“네.”
“어딜 다쳤습니까?”
“다리요…….”
라비엘리는 다리를 제 쪽으로 오므리며 대답했다.
낯선 사내에게 다친 다리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무척 송구하고, 또 미안한 말이었으나 그저 저를 태우고 루시안 마이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만을 바랐다.
라비엘리가 그들에게 원하는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사내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이름이 뭐죠?”
순간 머뭇거린 라비엘리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몰리 이아신스예요.”
라비엘리는 스스로 거짓말을 전혀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벌써 두 번이나 제 이름을 속이고 있었다.
루시안 마이어에게 다신 이아신스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놓고, 하루도 못 가 제가 이 이름을 쓰게 된 것이 몹시 얄궂게 느껴진다.
“아, 몰리.”
사내는 마치 아는 이름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가볍게 웃으며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 진득하게 느껴진다.
“그쪽은요?”
라비엘리는 부러 사내들의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물었다. 잠시 나쁜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눈을 마주치고 서로 이름을 아는 사이라면 다소 가책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녀가 질문하자 먼저 나선 사내가 돌아보더니 제 동료를 한번 힐긋거리더니 대답했다.
“오칸. 오칸 그리핀.”
오칸이 대답하자 뒤에서 말을 붙들고 있던 사내도 입을 열었다.
“어네스트 키온.”
“네…… 어쨌든 두 분을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몰리.”
몰리 이아신스는 그녀가 저택에서 마르고 닳도록 읽은 소설 ‘몰리’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사촌에게 길러진 몰리는 불우한 유년을 보냈다.
삶은 몰리의 편이 아니었고 몹시 고단한 일들이 이어진다. 사랑에 실패했고 결국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채 끝나지만 라비엘리는 이 소설이 좋았다.
몰리의 고난을 읽을 때마다 괴로웠으나 그녀의 아픔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게 좋았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살아내면 살아지는 걸 지켜보는 게 좋았다.
완전히 외워버릴 만큼 여러 번 읽은 덕분인지, 라비엘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어디 봅시다.”
라비엘리가 천천히 진정하고 있는 사이 오칸이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와 땅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건 맞았지만, 낯선 사내가 아닌가. 다소 부담스러운 목소리와 몸짓에 라비엘리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아녜요, 괜찮습니다.”
“왜, 어디 다쳤는지 보자니까요.”
“아뇨, 심하진 않아요. 부러진 건 아니고 조금 삔 것 같은데 걷기가 어려워서요.”
완곡한 목소리를 내며 로브를 오므리자 오칸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혼자 가도 되겠네.”
“네……?”
사내의 냉소적인 반응에 라비엘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살피던 오칸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호의를 보이려는 사람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것도 그렇고…… 옷차림도 그렇고.”
“…….”
“우리더러 지금 신분도 알 수 없는 사람을 도우라는 겁니까?”
신분이라는 말에 라비엘리는 덜컥 겁이 났다.
물론 이름만 대면 누구인지 단번에 알 만한 사람이 그녀의 후견인이었으나, 지금은 몰리 이아신스가 아닌가.
이제 와 제 후견인이 테아노 후작이라는 걸 말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 말한대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안 돼, 아무리 그래도 후작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어. 그랬다가 후작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힐스의 의원이었다는 루시안 마이어의 이름을 말할 수도 없었다.
라비엘리가 곤란함을 숨기지 못하고 잔뜩 위축되어 있을 때였다.
인중과 턱 아래가 전부 수염으로 뒤덮인 사내 어네스트가 말에서 내리더니 한마디를 보탰다.
“아, 창부인가?”
라비엘리는 창부라는 단어가 한 번에 박히지 않아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라고요?”
“사냥하러 온 무리들이 데리고 놀다 귀찮아졌거나 쓸모가 없어서 여기 버리고 간 창부 아니냐고.”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아닙니다…… 아녜요.”
심장이 불쾌하게 쿵쿵 뛴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다리를 끌어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을 만큼.
불행히도 그녀가 만난 자들는 신사적인 사내가 아니었다.
“도와줄게. 겁먹지 말라고.”
“왜 이러세요.”
라비엘리는 다치지 않은 한쪽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있는 힘껏 뒤로 물러섰다.
값비싸고 고운 치마가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왜 이러냐니. 원하는 곳에 내려줄 테니 너도 적당히 보상하란 소리지.”
오칸이 웃자, 뒤에 서 있던 어네스트도 등에 메고 있던 장총을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비싼 척하지 말고. 왜, 아랫도리가 너무 헐거워질까 봐 그래?”
비쩍 마른 사내가 비실비실 웃으며 털조끼를 벗기 시작했다.
“이봐, 저 구석으로 끌고 들어가.”
오칸이 바지춤을 내리는 걸 지켜보던 어네스트가 슬그머니 한마디 던졌다.
그는 지켜보는 것만으로 구미가 당기는지 연신 입맛은 다시고 있었다.
“여길 누가 지나다닌다고 그래.”
“혹시 모르잖아.”
“됐어, 흥 깨지 말고 기다려.”
“미친 새끼. 적당히 해.”
“오늘 웬 횡재인지 모르겠네…… 사냥 운도 딱 이만큼만 좋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사, 살려주세요!”
라비엘리는 부들부들 떨며 자꾸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오칸은 달아나려는 라비엘리를 즐거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살려달라니 죽인다는 말도 없었는데.”
오칸은 몹시 억울하다는 듯 능청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자자, 겁먹지 말고 이리 와. 춥고 굶주렸을 텐데 내 걸로 채워주지.”
그러곤 우악스럽게 라비엘리의 발목을 낚아채더니 제 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앗!”
사정없이 끌려간 라비엘리가 그를 밀어내며 마구 고함을 질렀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큰 소리를 내본 적이 있던가.
그녀를 도울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비참한 결말만이 제 앞에 남았다는 걸 알면서도 라비엘리는 비명을 지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년이!”
오칸은 커다란 손을 들더니 그녀의 뺨을 갈겼다.
투박한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에 붉은 자국이 찍히자 라비엘리의 크고 아름다운 눈에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신음은 좋아하는데 말이야 비명은 싫거든. 살아 돌아가고 싶으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흐윽…… 흑!”
그는 거침없이 라비엘리의 옷자락을 찢기 시작했다.
사내에게 맞은 뺨은 부풀어 올랐고 팔과 다리, 가슴 어느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더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이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죽을걸. 차라리…… 그때 죽어버릴걸.’
라비엘리에게 삶은 언제나 가혹한 것이었다.
가문이 무너진 뒤 삶은 그녀를 늘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길 반복하였다.
마치 그녀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처럼,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고 그녀의 반응을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투박한 손이 라비엘리를 헤집어 놓았으나 더는 저항할 의지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 죽었으면.
죽어버린다면 모든 게 끝날 텐데.
라비엘리는 그 순간 혀를 깨물어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절반은 체념이었고 절반은 절망에 몸을 맡긴 라비엘리가 끝없이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탕.
무거운 공기를 찢고 총소리가 그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놀란 라비엘리가 고개를 돌린 순간,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그녀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조금 전까지 음탕한 말을 내뱉던 사내였다. 그는 이마에 새빨간 구멍이 뚫린 채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뭐, 뭐야!”
뒤에 서 있던 털복숭이는 순식간에 총에 맞아 죽은 동료를 황망히 바라보다 재빠르게 바닥에 있는 장총을 집어 들었다.
“제, 제기랄!”
그러나 어느 방향에서 총알이 날아온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사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산에서 오발탄이 날아온 것일까. 멀지 않은 곳에 사냥터가 있으니 완전히 불가능한 가설도 아니다.
물론 몹시 희박했지만.
잔뜩 긴장한 사내가 주춤거리다 쓰러진 동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젠장, 이봐 오칸!”
조심스레 쓰러진 사내를 돌려세워 보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달리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머리에 구멍이 나 즉사한 것이다.
“제기랄.”
라비엘리는 피로 물든 바닥에서 멀어지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온몸을 사로잡았던 통증은 공포에 눌려버린 지 오래다. 저를 겁탈하려던 사내가 눈앞에서 죽어버렸는데 오히려 더 큰 두려움이 그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차마 숨조차 내쉴 수 없어 양손으로 입을 가린 라비엘리가 질식당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말발굽과 마른 땅이 부딪히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온다.
“아, 내 실력 녹슬지 않았네.”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권총을 들고 서 있는 루시안 마이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