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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9)화 (19/136)

19화

손목이 뻐근할 만큼 고삐를 세게 쥐었던 손에 차츰 힘이 풀린다.

얼마나 멀리, 또 오래 달린 것일까. 라비엘리는 알레가 땅을 차기 시작한 이후가 선명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그만큼 흥분한 탓이리라.

얼마간 말을 몰고 나자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민가 하나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을 바라보며 라비엘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

고삐를 천천히 당기고 말을 어르며 속도를 늦추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말갈기를 찬찬히 어루만지자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도 지치지 않는다는 명마도 그녀와 함께 호흡을 골랐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자유인가.

“여기가 어디쯤일까.”

라비엘리는 휘날리는 머리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단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완전한 미지의 땅. 그런데도 두려움보다는 해방감이 먼저 들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 무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까지는 가볼 생각이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천천히 곱씹고 있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하긴, 사내의 평소 언행을 생각한다면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농담과 진담이 마구 뒤엉겨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자가 아닌가.

그러나 한없이 가벼워 상대하고 싶지 않다가도 이따금 던지는 묵직한 토로를 들을 때면, 그 역시 저와 같이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요, 라비엘리.’

하지만 이번만큼은 웃음도, 장난스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말을 멈춰 세운 라비엘리가 제 어깨를 덮은 두툼한 사내의 로브를 슬쩍 당겼다.

별말 없이 둘러주었으나 말을 타고 달릴 때 행여 추울까 배려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을 타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잠시 멈춘 지금에서야 양어깨에 그가 남긴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 자꾸만 가슴 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정말…… 아주 멀리 가버릴까?’

고삐를 쥔 손에 힘이 실린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제 품에 있는 돈이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하던 라비엘리는 가벼운 탄성을 내뱉었다.

급히 나오느라 고작 테이블 위에 널려 있던 크랜을 주워 담은 것이 전부라 애석하다.

게다가 엘던에 있는 하녀에게 내민 20크랜이 몹시 아쉽게 느껴졌다.

실없이 한 행동이 하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 말고도 이런 후회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돈이 있었다고 해도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테아노 후작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라비엘리를 찾아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넘치는 것이 돈이니 로튼과 뮬 전체에 사람을 풀어서라도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라비엘리는 다시 고삐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저 잠깐 꿈을 꾸어본 것으로 만족해.’

짧은 꿈을 꾸었다는 생각을 되뇌며, 결국 지평선을 넘어서지 못했다.

아쉬움이 진득하게 남아 라비엘리를 붙든다.

어쩌면 루시안은 그녀에게 이런 가능성을, 자유를 향한 갈망을 심어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라비엘리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알레, 다시 돌아가자.”

라비엘리가 다리로 툭툭 건드리자 말이 천천히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알레는 왔던 길을 정확히 기억하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자 멀리 루시안과 앉아 쉬었던 거대한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바위가 점처럼 작게 보일만큼의 거리라 그의 모습 역시 보이지는 않았다.

라비엘리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루시안 마이어는 참으로 기묘한 사내였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불편한 데다 멀어지고 싶은데, 떨어져 있으면 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의식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하게 변화한 제 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거대한 바위를 향해 내달리던 순간이었다.

“!”

막힘없이 달리던 말이 갑자기 고개를 한쪽으로 틀었다.

“알레?”

라비엘리는 이럴 때 고삐를 느슨히 풀어야 한다는 걸 잊고 그만 세게 당겼다. 그러자 머리가 돌아간 알레가 앞다리를 들고 일어서며 울부짖었다.

“아아!”

고삐를 놓친 라비엘리는 그대로 낙마하고 말았다. 다행히 두툼한 로브에 포개진 라비엘리가 공처럼 말려 데굴데굴 굴렀다.

라비엘리가 추락하자 알레 역시 놀랐는지 잔뜩 흥분한 상태로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알레!”

하지만 알레는 야속한 울음만을 남기곤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라비엘리는 그대로 일어서려 했으나 곧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아앗!”

극심한 통증에 몸을 웅크리고 만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알레는 방향을 잃은 듯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지만, 사방은 무성한 덤불뿐 민가도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두려운 마음이 온몸을 감싼 탓일까. 아픔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위치라도 가늠해보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라비엘리는 억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만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맙소사.”

조심스레 치마를 들치자 라비엘리는 그제야 제 발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희고 마른 발목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고 점점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아…….”

말은 사라졌고 그녀는 걸을 수 없다.

게다가 사람이 사는 곳도 아닌 험준한 산으로 가는 길목. 기적이 일어나 갈라테이아에 가려는 사냥꾼들 눈에라도 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이대로 있을 순 없어.”

그러나 마음을 먹은 것도 잠시, 발목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더하여 말에서 떨어지며 다친 것은 발목뿐이 아닌듯했다. 홀로 남겨졌다는 걸 인지한 순간부터 온몸이 욱신거려왔다.

게다가 품 안에는 고작 25크랜이 전부였고 불을 피울만한 도구도 무엇도 없었다.

물론 돈이 많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평지에서 돈은 종이 쪼가리나 다름없었으니까.

라비엘리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대책 없이 말에 올랐다는 걸 깨달았다.

“어떡하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해가 지고 밤을 맞아야 한다면.

어둠이 내려앉은 숲은 위험하다.

다리를 다친 인간은 들짐승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았다.

“이대로 있어선 안 돼.”

라비엘리는 치맛자락을 길게 뜯어냈다. 그러곤 팽팽하게 펼친 천을 발목에 단단히 감기 시작했다.

“으윽.”

몹시 고통스러웠으나 산속에 홀로 버려지는 것보단 나았다.

있는 힘껏 발목을 동여맨 라비엘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짚고 일어설 만한 것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건 자잘한 나뭇가지뿐, 그녀를 지지해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부어오른 발목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방법이 없네.”

두려움에 허둥대던 것도 잠시, 여기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자 라비엘리는 모든 것을 체념하였다.

녹록지 않은 삶이었으나 이런 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니, 어쩌면 이렇게 끝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서서히 몰려오는 한기에 로브를 바짝 당겼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방법도 없으니 이대로 주저앉아 제 운명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무거운 공포가 분노가 되었다가 점점 체념으로 뒤바뀌려는 순간이었다.

멀리 땅이 울리는 듯하더니 이내 말발굽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루시안?”

이 순간 생각나는 이름은 루시안 마이어뿐이다.

방향을 잃고 내달리던 녀석이 제대로 길을 찾아 루시안에게 간 것일까?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도 구할 수 없는 명마 중에 명마라더니 다친 자신을 구하러 루시안을 데려온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워, 워.”

둔탁한 말발굽 소리, 그보다 더 낮은 음성과 말을 어르는 목소리.

라비엘리 앞에 나타난 것은 장총을 멘 사내들이었다.

낯선 자들을 마주치는 게 과연 다행인 일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가시처럼 날카로운 불안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여인을 발견한 사내들 역시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행색으로 보아 사냥을 나온듯했는데 한 명은 몹시 마른 데다 날카로운 인상이었고, 다른 한 명은 건장한 체격에 인중과 턱에 빳빳한 털이 수북했다.

하지만 고립된 산에 남겨지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라비엘리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도와주세요.”

두 사내는 산길에서 갑자기 여인을 마주하자 당황한 듯 멀뚱거리며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

드러난 발목을 조심스레 감추며 다부진 목소리를 낸다.

“말을 타고 한 바퀴 돌다가 그만 떨어졌어요. 송구하지만 저 바위가 보이는 곳까지 저를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라비엘리의 말에 사내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털이 수북한 사내가 뭐라 입을 열려던 순간, 눈매가 날렵하고 마른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가려는 방향은 그쪽이 아닙니다만.”

“죄송해요. 하지만 말이 달아난 데다 여기선 꼼짝하기 어려워서…… 도와주신다면 신세는 꼭 갚겠습니다.”

그러자 사내가 곧 말 위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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