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테아노는 사내가 건넨 약초를 꼼꼼히 점검했다.
엄지와 검지를 비벼 풀이 잘 말랐는지를 살피고 냄새를 맡아 상태를 확인했다.
맞은편에 앉아 초조한 눈으로 그를 살피던 에몬 질이 입가를 매만지며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가져온 모이니풀과 벨라도나는 최상품 중에서도 최고의 것을 추려 가져왔습니다, 각하.”
“당연히 그래야지. 태후 전하의 병증을 치료하는 것인데.”
테아노는 약초가 든 나무 상자를 소리 나게 덮으며 물었다.
“지난번 말한 희눌타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찾고 있습니다만, 각하께서 말씀하시는 모양을 구하는 게 영 쉽지 않습니다. 사방에 약초꾼들을 풀었으니 조만간.”
“시간이 없네. 당장 찾아와.”
테아노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사내를 뚫어지게 보자, 에몬이 슬쩍 뒤로 몸을 빼며 얼굴을 긁적거렸다.
“하지만 재촉하신다고 빨리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뭐…… 더 많은 약초꾼들을 산에 풀면 모를까.”
장사꾼이 원하는 건 단순하고도 뻔한 것이었다.
에몬의 말에 테아노는 콧수염을 씰룩였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태후의 병증을 치료하려면 희눌타리 꽃잎이 필요했고 그녀가 병상에서 일어나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리라 생각했던 태후의 병은 예상보다 심각하였다.
노환인 데다 본래 허약체질이라 가벼운 증상에도 쉬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알고 싶은데.’
오스트린에 와 있는 동안에도 테아노는 온통 라비엘리를 생각했다.
그녀의 불감증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산파에게 건넨 돈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산파가 당부한 지침을 시작할 겨를도 없이 오스트린으로 오게 된 탓에 효력이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서신을 보낼 수도 없고 난처하군.’
테아노는 속이 무척 새카만 사람이었으나 그런 제 속이 겉으로 드러날까 봐 늘 두려워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갑자기 제 아들이라며 찾아온 녀석을 완전히 믿기도 전에, 이런 중대한 일을 맡긴 것 역시 테아노를 온전히 의술에 집중할 수 없게 하였다.
하지만 서늘한 동시에 무표정한 적갈색 눈을 떠올리면 알 수 없는 믿음이 피어나기도 했다.
테아노는 그것이 끈질기고도 교묘한 핏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애초에 루시안 마이어를 아들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제 어마어마한 재산과 작위는 라비엘리가 낳은 아이에게 전부 물려줄 생각이었으니까.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루시안에게 그녀와 저택을 맡기며 테아노는 반드시 제 자식을 품에 안아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완벽한 지성인인 자신과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만들어낸 것은 지상에서 가장 고귀할 것이다.
그 완전한 생명체야말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제 아이에게 무거운 작위를 남기고, 그것을 지탱할 막대한 유산을 넘긴다면 그제야 자신은 꿈꾸던 안식을 찾으리라.
“저, 각하.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길었던 상념을 깨뜨린 건 에몬의 다소 상기된 목소리였다.
“그렇네만…… 무슨 일이 있는가?”
에몬은 테아노가 늘 거래하는 약제상이긴 했으나 워낙 많은 사업을 하고 있는 터라 이따금 못마땅할 때가 있었다.
테아노는 에몬이 약초에만 집중하길 원했고, 그는 돈이 되는 일은 뭐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몹시 바쁜 와중에도 테아노와 약초를 거래하는 날이면 만사를 제쳐두었다.
그는 테아노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달려왔다. 까다로운 의사의 요구조건을 전부 들어주려 애를 썼고, 그 점이 테아노가 에몬과 계속 거래하게 만든 유일한 이유였다.
그런데 오늘처럼 테아노가 약초를 다 챙기기도 전에 일어나려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에몬은 수상하게 얼굴을 붉히더니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여자를 좀 보러 왔습니다, 각하.”
“여자?”
뜻밖의 말에 테아노가 비틀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네, 루미온 신전에서 일하는 여자라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제법 예쁘다더군요.”
에몬은 어수룩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던 손에 힘을 주었다.
테아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무신경했는지를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이미 혼기를 채우고도 넘긴 사내다. 그런데 테아노는 그가 가정을 이루었는지 혹은 자식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아…… 아주 중요한 일을 하러 왔군.”
머릿속에 라비엘리에 대한 생각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상인에게 인간적인 호기심이 일어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에몬이 만나게 될 여자가 궁금했다.
“자네가 좋은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된다니. 내가 다 기쁘군. 그래, 어떤 여자인가?”
테아노의 질문에 에몬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장사치가 얼굴에 속내를 전부 비친다는 건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것은 테아노의 호기심을 몹시 자극하고 말았다.
“대체 어떤 여자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는가?”
“아니…… 각하와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러더니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각하,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꼭 머리 색이 은색과 금색 중간 빛을 띠는 여인을 만나고 싶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런 금실같이 아름다운 머리를 가진 여인을 찾는 게 어디 쉽습니까?”
백금발은 희귀한 데다 보통 고귀한 가문에서 하나둘 나올까 말까 했다.
테아노는 공연히 라비엘리를 떠올리며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라비엘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여러 말 하면 입이 아플 수준이 아닌가.
이미 권력도, 명예도, 평생 다 쓰지도 못한 만큼의 재산도 가진 그에게 없는 단 한 가지.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이미 제 손안에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여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는 조언을 해주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이번에 찾았다지 뭡니까?”
에몬의 말에 테아노의 콧수염이 잘게 흔들렸다.
“그래?”
“네, 신전에서 잡일하는 하녀라고 하더군요.”
“하녀?”
“아아…… 각하. 저는 하녀든, 잡부든 상관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에몬이 입맛을 한 번 다시더니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제가 원하는 건 오직 백금발을 가진 피부가 희고 입술이 붉은 여인이에요.”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하녀일 리가 없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테아노 마이어의 머릿속에 오스트린에 온 첫날 신전에서 마주쳤던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커다란 두 눈동자, 희고 창백한 피부, 볼록하게 솟은 이마. 결정적으로 희귀한 백금발에 푸른색 눈동자.
분명 라비엘리 르휜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던 여인이 있었다.
‘설마 그 여자인가?’
“각하, 사실 그 여인을 한 번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이라도 핥고 싶었다고요.”
“…….”
“만약 그녀가 허락한다면 말이죠. 아니, 사실 그녀에게는 달리 선택권이 없습니다만.”
“그런데 그 여자는 어떻게 알게 된 거지?”
테아노의 질문에 에몬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그 여자의 아비를 잘 알아요. 잠시도 술병을 입에서 떼지 않는 주정꾼이죠. 거기다 도박을 하는데 엄청난 빚을 져서 고리대금업자에게 쫓기고 있고요.”
테아노가 그게 백금발의 여인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물으려는 듯 미간을 잔뜩 좁혔을 때였다.
“물론 제게도 빚이 있지요. 그자가 하는 일로는 평생 일해도 절대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액수를요.”
“그래서?”
에몬이 돈을 벌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돈을 굉장히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액수에 상관없이 몹시 철저하게 돈을 관리했다. 주머니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지만, 불리는 방법도 잘 알았다.
그중 하나가 고리대금이었다.
“우연히 헤르젠에게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뭐 어렸을 때 헤어져서 생사도 모른다고 잡아떼길래 사람을 써서 알아봤는데 루미온 님을 모시는 신전에 있더라고요.”
에몬은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탓에 너그럽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듯 보였으나, 사실 누구보다 교묘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 딸아이가 그렇게 아름다울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지 뭡니까. 그래서 헤르젠에게 그녀를 주면 빚을 전부 갚아주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된 거로군.”
“그런 인간말종 같은 놈에게 어떻게 그리 아름다운 딸이 있는 건지. 헤르젠 말로는 그녀가 이미 허락을 했고 주변을 정리할 시간만 조금 필요하다고 했다더군요. 아아, 물론 그렇겠지요. 당장 떠나기는 아무래도 힘들 거예요.”
에몬은 이미 그녀에게 완전히 반한 모양이었다.
“이름은 레브리안입니다, 각하. 레브리안 루즐……. 밤마다 누워 그녀를 생각하기만 해도 아랫도리를 주체할 수가 없어요.”
거기까지 말한 에몬은 제가 경솔했다 싶은지 코 아래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괜찮네.”
테아노는 라비엘리와 자매라고 해도 믿을법한 하녀를 찬찬히 생각했다.
신은 그녀에게 아름다움만 남기고 최악의 환경을 내리신 듯했다. 물론 전부 신의 뜻이 있을 테지만 여인에게는 퍽 가혹하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아무튼, 그녀를 꼭 데리고 로튼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래, 행운을 비네.”
에몬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