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7)화 (17/136)

17화

“부인, 이제 출발하시나요?”

1층으로 내려오자 로제가 상냥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네.”

라비엘리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위층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여전히 마음에 걸려 있는 탓이다.

그러나 라비엘리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루시안은 여관 열쇠를 건네며 정중한 목소리를 냈다.

“제 아내에게 친절히 대해주셔서 고맙군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부인 안색이…….”

“로제라고 했던가요?”

루시안이 웃으며 라비엘리의 어깨를 감싸더니 제 쪽으로 부드럽게 당겼다.

라비엘리 역시 최대한 표정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나 제가 어설프게 행동했다는 걸 핑계 삼아 루시안이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길 바라서였다.

“걱정해줘서 고맙군요.”

얼마 뒤 마구간에 매어 있던 말을 끌고 나온 하인에게 크랜 몇 푼을 쥐여준 루시안이 라비엘리를 먼저 말에 태웠다.

“조심히 가세요, 부인!”

로제는 굳이 문밖으로 나와 라비엘리를 배웅하였다.

순박하고 정 많은 여인이 점점 멀어지며 작아질수록, 라비엘리의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하루를 꼬박 달려왔으나 여전히 후작의 영지였다. 라비엘리는 빠르게 물러나는 풍경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머릿속을 비워 내려 애쓰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갈라테이아로 들어가는 초입이었다.

다소 거칠어진 능선과 멀리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둔 라비엘리가 루시안을 따라 말에서 내렸다.

차갑고 축축하던 아침 공기가 제법 따뜻해질 무렵까지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루시안과 대화하는 것이 싫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침묵이 길어지자 불편한 쪽은 오히려 라비엘리였다.

앉을만한 곳을 찾아낸 루시안이 묵직한 가방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더니 편편한 바위 위에 깔았다.

“앉아요.”

“…….”

라비엘리는 별말 없이 앉아선 맥없는 표정으로 제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희귀한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는 당장 수선이 필요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테아노의 기분이나 취향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던 것이었는데.

흙투성이까진 아니었으나 밑단이 까맣게 변한 걸 본 순간 라비엘리는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힘듭니까?”

생각에 잠긴 라비엘리를 깨워낸 건 루시안이 건넨 물 한잔이었다.

라비엘리는 말없이 물통을 받아들고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귀한 물을 축냈다.

그녀의 거친 모습에 루시안은 다소 놀란 눈치였으나 이내 미소를 숨기며 말문을 열었다.

“나와는 다신 말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물을 다 비워낼 기세로 마셔대던 라비엘리가 바위 위에 물통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오는 내내 목구멍을 꽉 막고 있던 말을 겨우 꺼내었다.

“정말 죽일 건가요?”

“누구를?”

사내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라비엘리가 눈썹을 바짝 세웠다.

그러자 루시안이 헛웃음을 내뱉더니 희고 고른 이를 드러냈다.

“설마 아직까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

“정말 어린애 같군.”

“뭐라고요?”

“그렇게 미숙한데 대체 왜.”

루시안은 하려던 말을 삼켜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되물었으나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그저 새장 속의 귀한 새처럼 자라온 시절이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세상으로 나아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홀로 침전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아신스 부인, 농담이었어요. 당신이 너무 겁을 내길래 그냥 한 말이었다고요.”

“…….”

“정말요. 내가 그렇게 무뢰한처럼 보입니까?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죽일 사람처럼 보여요?”

루시안은 두 손을 들며 몹시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라비엘리가 대답하지 않자 바닥으로 손을 떨구며 헛웃음을 내뱉는다.

“난 의사라고요. 살리는 게 전공이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여요.”

“…….”

“당신에겐 농담도 못 하겠군.”

“그게 농담이라고요?”

“죽이긴 누굴 죽인다고 그럽니까? 그리고 이름 모를 하녀 하나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

“그 말을 아직까지 담아두다니. 설마 내가 정말 그 여자를 죽이기라도 해서 우환을 없애주길 바란 겁니까?”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말도 안 돼.”

“세상에, 당신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군.”

라비엘리는 그제야 말로는 루시안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됐어요. 그만두죠.”

“원하면 얼마든지 말해요.”

“그만하라고요.”

농담인 줄도 모르고 라비엘리는 달리는 내내 로제를 생각했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일을 하는 로제가 딱하고 가여웠는데 고작 제가 건넨 몇 마디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괴로웠다.

그런데 고작 농담이라는 말로 모든 걸 무마하려고 하다니.

“화났습니까?”

라비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루시안이 그녀 앞에 천천히 다가가더니 한쪽 무릎을 대고 앞에 앉았다.

“라비엘리.”

“…….”

“미안해요. 그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루시안이 조심스레 라비엘리의 왼손을 잡고는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마음 같아선 손을 빼고 싶었지만,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인 사내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신처럼 여리고 순진한 사람을 배려하지 못했군요. 미안합니다.”

“…….”

“미안해요.”

라비엘리는 루시안을 바라보지 않고 눈을 감았다.

어쩐지 이 사내 앞에 있으면 감정적으로 미숙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별것 아닌 일에도 크게 동요하고 마음이 묘하게 뒤틀렸다.

라비엘리는 제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며 입술을 열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든 말해봐요.”

루시안에게 당겨졌던 손이 조심스레 제자리로 돌아올 즈음, 라비엘리는 처음보다 한결 마음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가슴에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을 숨기고 다소 예민한 목소리를 내었다.

“다신 몰리 이아신스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러죠, 라비엘리. 하지만…….”

“?”

“그 이름 당신에게 꽤 잘 어울렸어요.”

루시안은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청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라비엘리는 눈앞의 사내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겼다.

“당신 이름은 어머니께서 지어주셨나요?”

“네, 맞아요.”

라비엘리는 무슨 뜻인지 물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알고 싶은 건 사실이었으나 선을 넘는 질문인 것 같아서였다.

“신이 뿌린 눈물이라는 뜻이에요.”

루시안은 마치 라비엘리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했다.

“꽤 감상적인 뜻이죠? 지금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왜 그런 뜻으로 지어주셨을지를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어머니는 내 삶에 축복을 내리는 것보다, 그저 당신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어머니께 아버지는 신과 같은 존재, 아니 그 이상이었으니까.”

“…….”

“자식을 버리고 도망치듯 사라졌으나 내가 유일한 연결고리기도 했겠지. 비참하게 살다 갔지만, 끝까지 아버지를 놓을 수 없었던 어머니를 이해하기 어려워요.”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눈 속에 차올랐다 순식간에 사그라든 고통을 발견했다.

그건 같은 슬픔을 겪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루시안.”

“신이 뿌리고 거두지 못한 씨앗이 나예요. 난 영원히 그늘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억지로 웃음을 만드는데 이골이 나 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루시안이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갈색 머리카락에 햇볕이 닿자, 마치 잘 익은 밀밭처럼 금빛을 내며 휘날리고 있었다.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이 몹시 보기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조차 불경스럽다고 판단해 마음을 다잡았을 때였다. 잘 익은 밀밭의 곡물보다 더 영근 사내의 음성이 그녀를 건드린다.

“라비엘리.”

“네?”

“여기까지 오면서 어느 정도 길이 든 것 같은데 한 번 타볼래요?”

루시안이 여유로운 자태로 서 있는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혼자서요?”

“네.”

그는 이미 라비엘리에게 말을 내어줄 생각을 마쳤는지 나무에 묶었던 줄을 풀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 탄 지 너무 오래되어서.”

“괜찮아요. 길들이는 게 어렵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순한 성미는 아니지만 사람을 좋아해요.”

“…….”

“게다가 하루가 넘도록 우리를 태웠으니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알레를 믿어봐요.”

루시안과 함께 타고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고삐를 잡고 말을 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오롯이 홀로 해방감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걸까.

자리에서 일어난 라비엘리는 어쩐지 흥분되는 걸 숨길 수 없었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손으로 움켜쥐고는 날렵하게 말에 올라타려 했을 때였다.

루시안이 제가 두르고 있던 로브를 벗더니 라비엘리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고삐를 제대로 쥐었군요.”

루시안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에 올라탄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처음보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그녀가 루시안을 내려다보며 농담을 했다.

“내가 알레를 타고 혼자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어쩌려고요? 이 허허벌판에 당신 혼자 남겨둘 건데 괜찮겠어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고삐를 다시 한번 바짝 움켜잡았다.

늘 목소리에 묻어 있었던 장난스러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양 건조한 음성을 내고 있는 탓이다.

게다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눈빛.

‘그냥 농담이에요, 한 바퀴 돌고 돌아올게요’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요, 라비엘리.”

루시안이 부드럽게 덧붙이더니 말의 궁둥이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말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리더니 이내 힘차게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자, 알레.”

말은 마치 새로운 운명으로 그녀를 데려가려는 듯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