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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6)화 (16/136)

16화

사실 루시안 마이어의 말이 크게 불쾌하지 않았는데 라비엘리는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건 조금 전 하녀와 대화를 나누다 저도 모르게 불쑥 치밀었던 감정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제게로 향한 당혹감을 공연히 눈앞의 사내에게 해소하는 것처럼.

하지만 루시안은 그런 라비엘리의 태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나른히 대꾸했다.

“잊지 마요. 여긴 저택 밖이니 내가 보호자예요.”

“아뇨, 저택 밖이니 당신의 보호는 필요 없어요.”

“저런, 낯선 곳에서는 남편의 보호를 받아야지요.”

“그게 무슨…….”

“나는 당신이 당황할 때 짓는 그 표정이 좋아요. 몰리 이아신스.”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하였다.

저 태연한 얼굴을 하고선 아마 밖에서 라비엘리와 로제의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다.

물론 민감한 내용은 없었으나 어쩐지 제 속내를 전부 들킨 것 같아 라비엘리는 콩 한 쪽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었다.

그녀가 석상처럼 굳어버리자 루시안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웃었다.

“의외네. 그런 거짓말도 할 줄 알고.”

그의 말에 라비엘리가 발끈했다.

“나라고 좋아서 한 줄 알아요? 행여 나중에 알려지게 될지도 모르니…….”

두려움을 피할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이런 문제가 벌어지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무얼 하면 되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돈과 호의는 가장 단순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졌노라 믿었다.

라비엘리의 항변에 루시안은 퍽 딱하다는 듯 눈썹을 얄궂게 움직였다.

“순진하네. 아예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왜죠?”

“설마 하녀에게 돈도 쥐여준 건 아니겠지.”

그 말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봐요, 이아신스 부인.”

그때, 방문 너머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룻바닥이 삐걱대는 소리, 구두 굽 소리, 어설프지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알아들을 법한 말소리까지.

루시안 마이어는 난처한 얼굴을 한 라비엘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바깥의 소리가 넘어온다는 건 두 사람의 대화 역시 새어나갈 수 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가만히 있었다면 그저 여행 중인 부부로 보였을 겁니다. 공연히 하녀에게 말을 걸고 돈을 쥐여주는 바람에 그녀에게 각인이 되었겠군요.”

“…….”

“이런 곳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새털만큼 가볍답니다. 입을 막고 싶었던 거라면 내게 부탁하지 그랬어요.”

라비엘리가 구겨진 두 눈으로 루시안을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나와 부정을 저질렀다면 이아신스 부인께 미안해서 고개를 숙였을지 모를 텐데.”

거기까지 말한 루시안 마이어가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루시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잠시 굳어버렸던 라비엘리가 이내 입술을 꼭 붙였다 떼며 말했다.

“그만둬요.”

그녀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이내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것을 후회하고 말았다.

벌어진 일도, 추측도 아닌 한낱 가정일 뿐인 데다 루시안의 말은 어느 하나 틀린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은 가슴에 지질하게 남아 라비엘리를 건드렸다.

‘나와 부정을 저질렀다면 이아신스 부인께 미안해서 고개를 숙였을지 모를 텐데.’

그를 오래 지켜본 건 아니었으나 루시안 마이어가 자유로운 사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라비엘리가 이해하는 자유롭다는 뜻이 가진 범주 그 이상으로 말이다.

어쩌면 루시안은 전날 밤 라비엘리를 위로하고 돌아서서 하녀의 침실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유로운 만큼 철두철미한 사내다. 영원히 속박되지 않을 영혼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판을 짜는지 잘 알았다.

마른 두 손을 맞잡은 라비엘리가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내가 괜한 짓을 했군요. 이미 대비한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지더니 갑자기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가여운 여자 같으니.”

루시안은 슬쩍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았으나 그 이상을 말하지는 않았다.

라비엘리의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으며 여전히 방 안에 남은 미묘한 분위기를 즐겼다.

하지만 돌아선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짙어진 의심에 더하며 제가 한 행동을 곱씹어야만 했다.

불쾌하긴 했으나 루시안이 누구와 섹스를 하든 사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테아노 후작의 아들이라 얽혀 있을 뿐 완전히 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가 누구와 붙어먹든 저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공연히 마음이 가라앉는다.

게다가 라비엘리에게는 그런 감정에 휘둘릴 여유가 없었다.

‘어쩌지. 괜히 돈을 주고 이런저런 말을 하는 바람에 내 얼굴만 더 각인한 꼴이 되었어.’

불안을 지우려 한 행동이 오히려 라비엘리를 잡아먹은 꼴이 아닌가.

루시안 마이어는 전날 밤과는 다르게 겁에 질린 라비엘리를 달래주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울고 있던 여인을 보듬던 사내는 온데간데없었다.

뜨거웠던 열기는 하룻밤 새 전부 식어버린 것처럼.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봐요, 몰리.”

루시안은 라비엘리를 놀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는 듯 빙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만약 후작께서 엘던의 하녀를 불러 추궁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추궁이라니요.”

“하녀가 돈 몇 푼에 의리를 지킬 것 같나요?”

“…….”

“아니지,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더 큰 돈을 주는 쪽에게 붙지 않을까?”

라비엘리는 마르고 푸석한 얼굴로 제 신세를 한탄하던 로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여인이 아닌가.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신경 쓸 만한 상황 같지는 않았다.

라비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루시안이 다시 물었다.

“이를 어쩌나. 돈이라면 후작 쪽이 훨씬 많을 텐데.”

“모르겠어요, 나는 그저.”

“왜요, 하녀와 안면이라도 터서 그녀가 당신을 위해 무슨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랐습니까?”

“그런 게 아녜요.”

그저 두려웠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저택을 벗어나도 좋을지 알지 못했으니까.

“단순히 여행 중이라고 했다면 의심받지 않았을 텐데. 공연히 남편이니 가명을 지어내서 우리 둘 다 곤란해졌군요.”

이번에도 라비엘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긴장 탓에 몸이 굳어지면 늘 손이 가장 먼저 차가워지곤 했다. 바짝 마른 손을 맞잡은 라비엘리가 돌아서서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사내는 곤란하다는 말을 입에 올린 사람치고 몹시 여유로운 얼굴이다.

그제야 루시안이 저를 놀리려 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죽일까요?”

사내의 말에 다소 풀어졌던 라비엘리의 어깨가 다시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만다.

등허리를 바짝 세운 라비엘리가 갈라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러나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입술을 늘리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채 그저 하얗게 질린 여인을 바라본다.

라비엘리는 사내의 적갈색 눈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적갈색 눈이 오묘한 빛을 내며 번뜩이고 있었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이 침묵을 지키자 오히려 초조해졌다. 그녀는 굳게 닫힌 문을 한 번 힐긋거린 뒤 낮게 으르렁거렸다.

“당신 미쳤군요.”

“…….”

“납치도 모자라 살인까지 저지를 생각인가요?”

살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어쩐지 한기가 스치는 것만 같아 라비엘리가 옷깃을 여몄다.

그녀를 빤히 보던 루시안이 이번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아신스 부인께서 두려워하니까.”

“두렵다고 해서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하다니.”

“두려운 것보다 그게 낫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시킨 것도 아닌데.”

“제정신이 아냐.”

“이아신스 부인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 방식은 피하는 쪽이 아니라서.”

루시안은 찬찬히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마주하는 게 내 방식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잠시 뒤로 물러서서 기회를 보기도 하지요.”

라비엘리는 그가 꺼내고 있는 말들이, 단순히 하녀를 상대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지금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테이아 산으로 가고 있는 라비엘리 르휜과 마이어가의 장자라고 주장하는 사내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방식이기도 하지요. 내가 그분의 아들이라서.”

루시안이 그 말을 끝으로 입술에 흐릿한 미소를 걸었다.

“마이어가의 아주 대단한 장자시군요.”

“드디어 나를 마이어가의 아들로 받아들인 겁니까?”

“당신을 따라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라비엘리는 잠시나마 루시안 마이어에게 손을 내밀었던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며 불행한 유년시절을 토로할 때, 조금이라도 그를 불쌍히 여긴 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을 텐데요.”

라비엘리의 삶은 며칠 새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물론 다시 되돌리고 싶은 행복했던 삶은 아니다. 되돌아가고 싶은 인생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벗어나고 싶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삶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벗어나는 걸 원한 것은 아니었다.

테아노는 맹수처럼 공격적으로 먹이를 낚아채는 유형이라면, 루시안은 사방에 덫을 놓고 먹잇감이 걸려들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라비엘리를 숨 막히게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대체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죠?”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라비엘리는 사나운 표정으로 루시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마치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틀며 부드럽게 대꾸하였다.

“당신을 돕고 싶어서.”

뭐라 항변하고 싶었으나 누군가 목을 틀어막은 것처럼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라비엘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도와달라고 한 건 당신이야.”

그사이 옷매무새를 정돈한 루시안이 목소리를 바꾸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요.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오늘 밤도 여기서 묵어야 할 겁니다.”

루시안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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