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왔다.
라비엘리 르휜은 이불을 걷어내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말을 타고 오랜 시간 달린 탓인지 팔다리가 욱신거렸으나 생각보다 머리는 맑았다.
그녀는 늘 누군가 관자놀이를 지긋하게 누르는 듯한 통증에 시달려왔다.
언제부터 두통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으나 로튼에 오게 된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해왔다.
‘간만에 푹 자서 그런가. 다리가 아픈 것 빼고는 몸이 무척 가벼운걸.’
문득 간밤에 나누었던 대화 몇 토막과 제 다리 사이에 있던 사내가 떠오른다.
이런 위태로운 상황이 얼마나 지속되어야 하는 걸까.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한 것인지, 아니면 저 낯선 사내와 함께 있는 편이 나을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도 그녀에게 편한 선택이 아니었다.
어쨌든, 오늘 아침의 몸 상태가 좋다는 것 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라비엘리는 길고 곧은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으며 기지개를 켜보았다.
“후…….”
한결 개운한 눈으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자 한가로운 시골 풍경이 들어왔다.
“언니! 노란색 리본 빌려준다고 했잖아.”
말소리가 들려온 곳을 내려다보니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여자아이와 그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소녀가 앉아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
“정말 이럴 거야? 아버지께서 번갈아 가며 매라고 하셨잖아!”
“글쎄, 난 못 들었는데!”
“아이, 정말!”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비엘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라비엘리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저택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감격하였다.
물론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지난 밤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소 평온해진 건 루시안 마이어 덕분이기도 했다.
평탄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는 나이에 비해 노련했다.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늙은 여우를 하루아침에 구워삶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물론 적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를 완전히 믿겠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처음처럼 경계하고 벽을 세울 필요는 없다는 뜻임에는 분명했다.
‘후작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냐. 하녀도 없이 저택 밖을 나갔다는 걸 알게 된다면.’
테아노는 라비엘리를 믿지 못하였다.
그와 동행하지 않으면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라비엘리의 젊음과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를 거두었으나, 때문에 그것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걸 라비엘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대저택에 딸린 정원을 산책하는 일뿐이었으니까.
‘아무리 후작의 명이 있었다고는 해도…… 루시안 마이어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더라도 날 괴롭히실 게 분명해.’
전날 밤만큼 공포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대비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똑똑.
문가를 쳐다보니 젊은 여인이 나무 트레이를 들고 걸어들어왔다.
여관에 처음 들어왔을 때 방을 안내해준 여인이었다.
규모가 꽤 큰데 혼자 여러 일을 도맡아 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간밤에 잠을 설쳤는지, 아니면 일이 많아 힘든지 푸석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빵과 구운 콩, 우유 한 컵을 내려놓고 말없이 돌아섰다.
‘에몬의 사촌일까?’
그러나 사촌이라기에 머리에 두른 두건이나 행색은 영락없이 하녀였다.
여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라비엘리가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다.
“……저.”
“네, 아가씨…… 아니, 부인.”
하녀는 느릿하게 돌아서며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오목하게 패인 볼까지 내려온 피로가 퍽 딱해 보였으나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해요, 실례되는 말인 줄 알지만……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하녀가 라비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시답잖은 질문에 딱히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표정으로 전부 드러난다.
라비엘리는 아차 싶은 마음에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로브를 뒤적였다.
“미안해요. 별거 아니지만.”
그러곤 조심스레 하녀에게 10크랜을 내밀었다.
큰 돈은 아니었으나 하녀의 입술을 들썩이게 하는데 충분한 액수였다.
하녀는 크랜을 건네받더니 앞치마 주머니에 쏙 집어넣으며 표정을 풀었다.
“으음, 3년 정도요.”
“여기 오는 손님들의 아침을 대접하는 일을 하는 거죠?”
“그것만 하면 좋게요. 돈은 쥐꼬리만큼 받으면서 여기 주인처럼 일을 한답니다.”
“저런, 엘던을 책임지고 있군요.”
라비엘리는 다정한 몇 마디를 건네며 하녀의 호의를 사려 노력했다.
건조한 표정 탓에 말수가 적을 줄 알았던 하녀는 빗장이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라비엘리로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짧지만 서로를 탐색하기에 적절한 몇 마디가 오간 뒤, 라비엘리가 바짝 마른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던졌다.
“혹시 마이어가의 후작님을 뵌 적도 있나요?”
라비엘리가 물었을 때, 하녀는 도리질하며 대답했다.
“후작님이 사냥 때문에 가끔 오시기는 하지만 제가 모시진 않아요. 꼭대기에 있는 방에 따로 묶으시죠. 하녀 중에 제일 예쁜…….”
거기까지 말한 하녀가 입술을 붙였다. 그러곤 어깨를 한번 들썩이더니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건 왜요?”
“아녜요. 고마워요. 참, 그런데 이름이…….”
“로제예요.”
하녀의 표정 속에 의아함이 떠오르기 전, 라비엘리는 화제를 바꾸었다.
“고마워요, 로제. 그럼 혹시 여기서 갈라테이아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여기선 금방이에요. 트위즌 로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가면 보인답니다. 혹시 사냥하러 온 거예요?”
라비엘리는 복잡한 마음을 숨기며 여유로운 목소리를 냈다.
“네, 남편을 따라 왔어요.”
“어젯밤부터 계속 마구간을 왔다 갔다 하던 신사분이시지요? 부인께 드려야 한다면서 뜨거운 물을 찾질 않나…… 하지만 굉장한 미남이던걸요.”
처음보다 얼굴이 풀어진 로제가 마지막 말은 실수했나 싶은지 나무 트레이를 내려놓고 두 손을 휘저었다.
“아니, 그렇다고 남편분을 자세히 본 건 아녜요. 탓하는 것도 아니랍니다.”
“알아요. 그이가…… 조금 까다롭긴 하지요.”
“물론 부인도 무척 아름다우시고요. 전 처음에 두 분이 황족인 줄 알았답니다.”
아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백금발 머리 색을 가진 자는 사실 몹시 희귀한 데다 이곳은 외곽, 그것도 사냥터 바로 초입이었으니 그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루시안 마이어 역시 사내치고는 희고 뽀얀 피부에 은은한 갈색 머리, 잘 빚어 세운 콧대와 보들보들해 보이는 선명한 입술까지, 한 눈에도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미남이었으니까.
게다가 그에게는 가벼운 미소만으로도 주변 공기를 환기시키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럴 리가요. 칭찬이 과해요, 로제.”
라비엘리는 그만 루시안의 매력적인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마치 곁에 있는 듯 사내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과하다니요, 부인. 저는 지금껏 살면서 부인의 남편처럼 멋진 분을 본 적이 없는걸요. 그런 훌륭한 신사와 함께하신다니 몹시 부러워요. 제가 별말을 다 하는군요. 용서하세요.”
로제는 잔뜩 거칠어진 손으로 제 입을 두어 번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녀의 말이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라비엘리도 루시안의 매력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불어 라비엘리는 자신이 이토록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경계하고 의심하던 사내를 남편이라 속이고 그를 칭찬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즐거워하다니.
당황한 두 손이 치맛자락을 슬쩍 말아쥐었다.
“고마워요, 로제. 모, 모든 손님을 살뜰하게 챙기는군요. 엘던의 주인을 만난다면 로제 이야기를 꼭 할게요.”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가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대답했다.
“설마 에몬 씨를 말하는 건 아니지요? 그분을 못 본 지 저도 오래되었어요. 대체 사업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로제가 한숨 섞인 푸념을 하자 라비엘리는 놓치지 않았다.
“왜요?”
“워낙 바쁘시니까요.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서 안주인이 들어오시면 좋겠어요. 주인이 없으니 온통 엉망이라고요. 빨래나 하면 될 줄 알았더니!”
“그렇군요.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들었네요. 미안해요.”
라비엘리는 사과의 의미로 10크랜을 더 꺼내 로제에게 쥐여주었다.
“어머, 별말씀을요, 부인.”
“아…… 그리고 나는.”
로제가 싱긋 웃으며 돌아섰을 때, 라비엘리가 다시 하녀를 불러세웠다. 대화하는 내내 고민하던 말을 꺼내야 할 순간이다.
“몰리 이아신스에요.”
“네, 상냥하고 아름다운 이아신스 부인. 대화 즐거웠어요.”
로제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안색을 하곤 손잡이를 쥐었다.
“에그!”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키가 몹시 큰 사내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볍게 놀라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내 그가 상냥한 부인의 남편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이곤 계단을 내려갔다.
루시안은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더니 특유의 느릿하고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밤에 푹 잤습니까?”
말끔하게 빗어넘긴 머리를 슬쩍 올려다본 라비엘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제 앞에 놓인 포크를 들고 삶은 콩을 하나 콕 찍었다.
“네, 그럭저럭요.”
“다 좋은데 아침 식사가 형편없더군요. 하지만 꽤 멀리 가야 하니 배는 채우도록 해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움직이던 포크를 뚝 멈추었다.
“꼭 보호자처럼 말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