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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4)화 (14/136)

14화

“겁먹지 말아요, 라비엘리. 적어도 난 당신 편이니까. 넓은 마이어가 저택에 한 명 정도는 당신 편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래서 그 망할 명령을 핑계로 당신을 데리고 나온 겁니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저 대화를 하고 있을 뿐인데 맥박이 몹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날 믿지 않아도 좋아요. 아니, 믿지 말아요. 그냥 이용해.”

“…….”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다시 찬찬히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날 이용해요. 명색이 후작의 아들이잖아. 안 그렇습니까?”

“…….”

“이용하는 것도 싫다면 그냥 옆에 두기만 해요. 믿지도 말고, 이용하지도 말고 그냥 옆에 있어요. 어때요, 이 정도면 나쁘지 않죠?”

라비엘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루시안이 다시 목소리를 바꾸었다.

이제 그녀를 어르고 달랠 차례라는 듯 부드러운 톤이다.

“그래요, 라비엘리. 사실 그 망할 명령을 핑계로 당신을 데리고 나왔지만.”

루시안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마치 빛을 내는 듯 기묘한 색을 띠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라비엘리는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으나 딱히 고개를 돌리거나 어깃장을 놓지도 않았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무례하다면 먼저 용서를 구하죠.”

“당신답지 않은 정중한 언사로군요.”

라비엘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이를 갖지 못한다면서요.”

“…….”

“아이 갖는 것을…… 당신도 진정 원하고 있습니까?”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테아노가 루시안에게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라비엘리의 질에 약을 바르는 건 아이를 갖기 위한 게 아니라 그녀의 불감증 때문이었으니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 갖는 걸 원한다면 도와줄게요.”

“…….”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입술을 달싹거리던 라비엘리가 한 번 숨을 들이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원해요.”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루시안 마이어가 말하는 아이인지 아니면 그의 위로인지, 라비엘리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끝없이 무너지는 가슴은 저도 모르게 구원처럼 연약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도와줘요.”

* * *

어둠 속에서 라비엘리는 가만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텅 빈 방, 루시안은 밖으로 나갔고 외딴 방 안에는 그녀 혼자였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을까.’

라비엘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아이 갖는 것을…… 당신도 진정 원하고 있습니까?’

루시안이 남긴 말이 귓가에 맴돈다.

테아노가 항상 아이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라비엘리는 아니었다.

물론 테아노의 저택에 처음 올 때까지만 해도 단란한 가정을 꿈꾸었다.

부모는 세상을 떠났고, 하나뿐인 동생은 생사를 모르지만 희망을 갖고 싶었다.

행복한 삶까진 바라지 않았어도 그런대로 살아가길 원했다.

어느 정도 테아노의 권력에 기대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테아노라면 유모가 팔아버린 동생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기대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지 모를 가여운 아이를 찾고 싶었다.

그런 생각 끝에는 늘 자신의 가정도 있었다.

저를 닮은 귀여운 아이들을 낳아 기를 수 있을지, 그렇게 가슴에 뚫린 상처들이 조금씩 채워지고 치유되길 기대하였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자신에게도 다시 평범한 삶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꿈꾸었다.

저택에 들어온 첫날 밤, 테아노가 그녀를 능욕하기 전까지는.

테아노가 세간의 평판과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론 그가 무서웠다.

매일 밤이 지옥 같았기 때문에 아이를 갖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이 갖는 걸 원한다면 도와줄게요.’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루시안 마이어가 말하는 아이인지 아니면 그의 위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루시안에게 아이를 원하니 도와달라고 말해버렸다.

‘멍청한 행동이었어.’

너무 약해진 탓일까.

그러나 그 이후의 행동은 라비엘리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진정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주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침대에 앉히고 따뜻한 차를 준비해주었다.

다소 격정적인 말과 움직임 때문에 사내를 자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서로를 품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으니까.

그러나 루시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진귀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그러더니 말을 살피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정말 아이가 생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갖는다면 테아노의 가학적인 행위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짐승도 제 새끼를 밴 것은 건드리지 않듯이.

‘그래…… 어쩌면 그게 해결책이 될지도 몰라. 밤마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될지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테아노의 아이를 갖는 것이 정말 괜찮을까.

‘아냐…… 싫어. 그건 정말이지.’

라비엘리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순간 루시안 마이어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루시안은 젊고 매력적인 사내였다.

그에게 감정적으로 끌리는 건 분명 아니었는데.

‘바보 같은 생각 집어치워.’

라비엘리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기며 몸서리쳤다.

그사이 멀리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루시안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라비엘리가 마신 차를 확인하고는 외투를 벗었다.

말을 보러 간다는 건 아마 핑계일 것이다. 라비엘리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정하길 기다린 것이리라.

얼마 후,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루시안이 라비엘리에게 다가왔다.

테아노의 명령대로 약을 바를 모양이었다.

“루시안.”

루시안이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왔을 때, 라비엘리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조금 전엔 미안했어요.”

생각해 보면 그 덕분에 상황이 다소 나아진 건 사실이었다.

이따금 테아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고, 지금처럼 저택 밖으로 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더하여 그를 두고 불손한 상상을 한 것도.

“그런 반응은 당연한 거죠. 그런데…… 이 여관 주인이라는 에몬 질이란 사람은 아버지와 가까운 사람입니까?”

루시안은 은근슬쩍 에몬에 대해 물었다.

“네, 후작님 의원에 약초를 대는 사람이니까요.”

“약초를 취급하는 사람이 여관도 운영하나요?”

루시안이 고개를 들어 여관을 살피며 물었다.

“네, 에몬은 이것저것 사업을 많이 하거든요.”

라비엘리는 별다른 의심 없이 루시안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군요. 사업을 꽤 크게 하나 봅니다.”

“네…… 발이 넓어 귀하기 어려운 약초도 곧잘 가져온다고 하더군요.”

루시안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대로라면 무척 바쁜 사람이니 외곽에 있는 여관 사정까지는 신경 쓰지 못할 겁니다.”

에몬의 여관이라는 걸 확인한 직후엔 너무 흥분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에몬은 지금 로튼에 없었다.

“미안해요. 생각해 보니 그 사람 지금 로튼에 없어요.”

“혹시 아버지와 함께 갔습니까?”

“아뇨…… 오스트린으로 아내를 만나러 간다고.”

에몬은 장사꾼이라 말솜씨가 좋았고 서글서글 웃는 상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큼.

그러나 라비엘리는 그를 처음 마주한 날을 선명히 기억했다.

에몬은 마치 창부를 살피는 듯한 눈으로 라비엘리를 훑어보았다.

후에 그가 후작에게 흘리듯 남긴 말을 엿들은 적이 있는데, 라비엘리와 같은 백금발 여인을 찾아 결혼할 계획이라는 말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돈은 얼마든 줄 수 있으니 백금발을 가진 미인을 원한다고.

여인을 마치 저가 취급하는 물건 정도로 생각하는 사상에, 라비엘리는 가벼운 오한을 느꼈다.

“그렇다면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어요.”

루시안은 머릿속에 에몬의 이름을 잘 새겨넣으며 씨익 웃었다.

침대에서 얼마간 대화를 나누고 난 뒤, 루시안은 분위기를 바꾸려는지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

조심스레 이불을 들치자 그 아래 라비엘리의 희고 마른 다리가 드러났다.

그녀가 긴장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전처럼 두려움으로 가득한 건 아니었다.

“오늘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겁니다.”

루시안이 무릎에 올린 손을 천천히 아래로 쓸어내린다.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한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내의 손길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처럼 이것이 아주 싫지만은 않았다.

“좋아요. 오늘은 당신이 꽤 편해 보이는군요.”

루시안의 목소리가 벌어진 다리 사이로 스민다.

곧 길고 곧은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올 것을 알았지만 라비엘리는 그저 호흡을 고르며 루시안의 다음을 기다렸다.

“하나, 둘…….”

그 뒤에 이어질 행동을 알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어느새 이 위험하고 낯선 사내에게 익숙해진 것일까.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라비엘리는 우선 제 몸을 이 사내에게 맡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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