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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3)화 (13/136)

13화

“그걸 팔았다면 몸이 곪도록 일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만약 그랬으면 난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겠죠.”

라비엘리는 테아노의 시그니처의 문양과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여인에게 두고 온 퀴징 글라스는 애정의 증표가 아니라 이걸 팔아 목숨을 부지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걸 들고 심지어 아들까지 끼고 나타나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으리라.

그전까지 막연히 사기꾼이라 생각했는데 라비엘리는 어쩌면 눈앞의 사내가 저만큼이나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림받은 건 어머니인데, 아버지를 끔찍이 생각했어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죠.”

“유감이에요.”

“아마 사랑이었겠지.”

루시안의 마지막 말은 몹시 쓸쓸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난 다릅니다. 나를 아버지 없이 낳기로 한 건 어머니지 내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난 단 한번도 아버지를 사랑한 적 없거든요.”

“……”

“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이 태어났어요. 이게 내 운명이죠. 신께서 내게 이런 삶을 주셨어요.”

사내는 격양된 듯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감정을 참는 일은 익숙한지 곧 평정을 되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내 몸의 절반에는 테아노 마이어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그것조차 신께서 계획하신 일이겠지요. 스무 해를 어머니께서 키워내셨으니 남은 스무 해는 아버지께서 책임지셔야 한다는 마음으로.”

“…….”

“여기 있는 겁니다.”

시계추처럼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나 역시 살아남으려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

“당신처럼.”

루시안 마이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였다.

심지어 해가 기울어 붉은 기운이 흐릿하게 퍼져 있던 탓에 하늘 아래서 다소 경건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라비엘리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섣불리 위로도, 무엇도 하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가 공연히 제 감정이 줄줄 새어 버릴까 봐.

“지루한 얘긴 여기까지 하죠. 다시 출발합시다. 이러다 초원 한복판에서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띤 루시안이 라비엘리를 향해 손을 내민다.

이번에는 라비엘리가 그의 손을 거부하지 않고 조심스레 잡고 일어섰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였다.

* * *

날이 완전히 저물고 사방에 어둠이 내렸을 때, 두 사람은 로튼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구간에 말을 묶고 여관에 들어가 방을 잡은 뒤 3층 빈방으로 올라올 때까지, 두 사람은 대화라고 할 만한 말을 나누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따로 제공하지 않는 곳이라 루시안은 나가서 먹을 것을 사 오겠노라고 했다.

딱히 허기가 느껴지지 않아 사양했으나.

“아뇨, 하나도 안 괜찮아요. 당신 팔을 좀 보라고요. 앙상하다 못해 부러지겠어요.”

그는 특유의 과장된 표정을 짓고는 서둘러 여관 밖으로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라비엘리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와 한동안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제법 연식이 되어 보이는 가구들뿐이었으나 침구는 깨끗하게 관리하는 듯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기꾼이라 생각한 남자와 말을 타고 외곽까지 나오다니.

후작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남자가 저택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수많은 사기꾼이 그러했듯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것으로 여겼으니까.

그러나 빛나는 적갈색 눈을 가진 이 남자는 달랐다.

그는 저택의 공기를 날마다 미묘하게 바꿔놓았다.

거부감을 가졌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도록 조금씩, 아주 천천히.

“하지만 후작께서 아신다면.”

테아노는 신사적인 사내가 아니었다.

아마 라비엘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는 다른 얼굴을 할 것이다.

“여관 이름이 뭐였지?”

갑자기 정신이 든 라비엘리가 여관을 살피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달력에 적힌 글자 <엘던>.

<엘던>은 로튼에서 제법 큰 규모의 사업을 하는 무역업자 에몬 질이 운영하는 여관이기도 했다.

테아노의 영지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많은 세금을 내는 곳이 아니던가.

“맙소사.”

한참을 달려왔으나 여전히 테아노의 영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그의 손바닥 위인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 갑자기 잊고 있었던 한기가 스며들었다.

‘아냐…… 이건 내가 원한 일이 아니야.’

저택 밖으로 나왔다는 쾌감도, 숨 가쁘도록 말을 타고 달리며 느꼈던 흥분도 사그라들었다.

가슴을 뛰게 했던 기분 좋은 흥분감은 두려움으로 완전히 물들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테아노의 매질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발가벗은 채 능욕당하며, 어떤 식으로 저를 괴롭힐지를 기다리는 삶. 다리를 벌리고 메마른 구멍을 내보이며, 통증을 참아내야 하는 기나긴 밤…….

공포에 잠식된 라비엘리가 아래턱을 덜덜 떨며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라비엘리?”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루시안이 떨고 있는 라비엘리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예요, 라비엘리! 왜 그래요?”

들고 온 음식을 내던지듯 테이블 위에 놓고, 루시안이 라비엘리에게 달려왔다.

그렇지않아도 흰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야겠어요. 날 다시 저택으로 보내줘요.”

“라비엘리.”

“제발…… 제발요!”

“라비엘리, 진정해요.”

“난 그만 가야겠어요. 망할 말을 길들이는 일은 당신 혼자서 하라고요. 대체 날 왜 데려왔죠? 난 저택에 있어야 한다고요!”

라비엘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내가 당신과 저택을 벗어났다는 걸 알면…… 후작께선 아마 날…….”

“라비엘리.”

루시안은 부드럽게 라비엘리의 어깨를 잡았다.

작고 동그란 어깨를 완전히 감싸 안자, 그녀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라비엘리,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오스트린에 있어요. 여기서 100마일은 떨어진 곳이라고요.”

“…….”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당신을 이 먼 곳까지 데려왔을 것 같나요?”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먼 곳이라고요? 그래 봐야 로튼이에요. 여긴 후작의 영지라고요! 젠장, 여긴 에몬 질의 여관이란 말이에요!”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슬그머니 힘을 주었다.

“라비엘리, 후작의 영지이긴 하지만 여긴 국경에 더 가까운 곳이에요. 갈라테이아에 관해 못 들어봤습니까?”

“…….”

“여긴 로튼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곳이라고요. 게다가 너무 험지고 경계에 닿아 있어 후작께서 신경조차 쓰지 않는 곳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에몬 질은 후작님과 무척 가까운…….”

“에몬의 여관이든 후작의 여관이든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하지 않다니. 전부 후작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 날 부정한 여인이라 의심할 테고 당신도 가만두지 않겠죠!”

라비엘리는 몹시 격양되어 있었다.

“이런 라비엘리, 잊었어요? 내가 당신과 함께하는 건 전부 후작의 명 때문이라고요.”

“…….”

“아버지가 내게 내린 명 때문이죠. 잊었나요?”

루시안의 말에 불쾌함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겐 다 계획이 있으니 당신은 따르기만 하면 돼요.”

“……그래요, 그 망할 명령.”

라비엘리는 두 눈을 감았다.

잠시나마 해방되었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불우한 사건을 연달아 겪으며, 라비엘리는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부유한 백작가의 유일한 딸, 가문이 몰락한 일만 아니었다면 걱정거리 하나 없는 삶을 살았을 그녀다.

그녀에게 고민거리라고 해봐야 내일 오찬에 어떤 드레스를 입을 것인가 정도였으니까.

라비엘리는 갑자기 변해버린 제 처지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겉으론 태연히, 그리고 무던히 살아가려 애를 쓰는 척했으나 사실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언제든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나날이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라비엘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 낯선 사내와 함께 들어온 공간이 그녀에게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주었고, 라비엘리는 북받치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테아노에게 잡혀 끌려갈 것만 같은 불안감, 그런데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모든 것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그녀의 가슴을 헝클어뜨렸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호흡만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당신…… 도대체 누구죠?”

라비엘리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전까지의 삶이 평화로운 건 아니었다.

평화롭기는커녕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움을 안고 살았다.

그러나 루시안 마이어가 저택에 들어온 이후, 라비엘리는 그전과는 새로운 유형의 불안감을 마주해야 했다.

제 감정을 정확히 마주할 수 없었고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느꼈다.

라비엘리의 질문에 루시안은 평온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제 와 내 이름이 궁금한 건 아닐 테고. 뭐가 알고 싶은 거죠?”

“…….”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말했어요. 테아노 마이어 후작의 아들, 루시안 마이어라고.”

“왜 갑자기 나타나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거죠? 왜 이제 와서……!”

“그전에도 이미 엉망이었어요. 솔직히 말해봐요, 라비엘리 르휜. 내가 와서 다행인 순간도 있지 않았습니까?”

루시안은 라비엘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대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내가 단순히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 여기 온 것 같아요?”

“…….”

“그깟 재산을 노리고 온 것 같습니까?”

루시안의 적갈색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살기에 가까운 눈빛.

라비엘리는 그것이 오롯이 저를 향하자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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