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뜻밖에도 라비엘리 앞에 나타난 건 루시안였다.
“안녕, 레이디.”
루시안은 말에서 내리더니 라비엘리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분명 사냥을 하러 갔다고 했는데.’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최대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싶었으나 가슴 속에서 불편한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루시안은 아름다운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라비엘리를 살피는 시늉을 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자 허브티 향기가 다시 물씬 풍기는 듯하였다.
“저런, 내가 나타나서 놀랐군요.”
뒤로 다시 물러난 라비엘리가 단단히 굳은 얼굴로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사냥터에 왜 가지 않았죠?”
“와, 세상에.”
루시안은 눈을 크게 뜨더니 마치 희극배우처럼 두 손을 옆으로 뻗으며 과장된 몸짓을 했다.
“이 넓은 대저택에 내가 한 말이 퍼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군! 놀라워라.”
얼굴이 붉어진 라비엘리는 루시안을 지나쳐 정원을 빠져나가려 했다.
“기다려요.”
루시안은 멈춰선 채 손만 뻗어 라비엘리의 손목을 잡았다.
“왜 안 갔는지도 들어야죠.”
“아뇨,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 난 그냥…….”
“아니, 아주 중요해요.”
루시안은 은근한 목소리로 라비엘리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사내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그저 맥없이 음울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밤의 기억과 무기력하게 누워 있을 수밖에 없던 제 모습이 겹친 탓일까.
라비엘리는 제법 단단한 목소리를 내었다.
“놓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후작님 아들을 범죄자 취급이라도 하겠단 건가요?”
“못할 것 같나요?”
“가여워라. 간밤에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군요.”
“입조심해요!”
루시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라비엘리의 손목을 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갈라테이아까지 가야 하는데 두고 간 게 있어서죠.”
그때였다. 수발 하녀들과 함께 메이지가 다급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식사도 거르셨는데 너무 오래 밖에…….”
재잘대던 메이지는 루시안을 발견하곤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루시안은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메이지.”
루시안의 부름에 메이지는 불퉁한 얼굴로 샐쭉거렸다. 그녀를 은근히 보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선 지금 나와 사냥터에 가실 테니 서둘러 짐을 꾸려오도록 해.”
“예?”
메이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물론 당황한 건 메이지뿐이 아니었다.
라비엘리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사냥터라니요. 그게 무슨…….”
“오전에 하녀에게 물으니 인근에 갈라테이아 산이 말을 길들이기 좋다고 하더군요.”
라비엘리가 메이지를 쳐다보자, 메이지는 얼굴이 새빨개져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사실이니?”
“그, 그렇지만, 아가씨와 함께 가시는 줄은.”
“그만. 해가 더 기울기 전에 당장 짐을 꾸려오너라.”
루시안은 전에 없던 서늘한 눈으로 명령하고 있었다.
* * *
한바탕 실랑이가 있었으나 결국 라비엘리는 말 위에 올라야만 했다.
루시안이 강제한 것도 아닌데 라비엘리는 그 앞에서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라비엘리의 짐을 가져오고도 메이지는 한참을 주저하였다.
라비엘리를 위해 한 말인데 일이 잔뜩 꼬여버린 것이다.
메이지는 가방을 들고 머뭇대다 결국 갈라테이아는 너무 멀고 위험해 라비엘리가 가면 안 된다고까지 말하고 말았다.
“너무 멀고 위험하다?”
“네, 아가씨와 함께 가시면 안 되어요.”
“그럼 나는 멀고도 위험한 산을 올라도 된다는 것이냐?”
루시안이 서늘한 얼굴로 메이지를 노려보았다.
“그, 그런 것이 아니고요! 제 말은.”
“네 말은 딱 그렇게 들리는구나. 네 주인은 귀한 분이니 안 되고, 나는 미천하니 위험한 산을 헤매다 죽으란 뜻이 아니었느냐?”
“아아, 당치도 않으셔요!”
메이지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 저택에 제 주인을 위험하게 하려는 하녀가 있구나.”
루시안의 서슬 퍼런 음성이 메이지를 옭아매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네 주인을 꼭 데려가야 한다. 오늘 꼭 그 산을 가야 하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맡긴 일이 있기 때문이지.”
“예?”
“라비엘리, 함께 가야 하는 이유는 굳이 저들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할까요.”
라비엘리는 당황했으나 하녀에게 그 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전부 다 제 잘못인 것 같아 사시나무 떨듯 떠는 메이지를 달랜 후 라비엘리는 루시안과 함께 말을 타고 저택을 빠져나와야 했다.
저택 밖으로 나온 건 거의 1년 만의 일이었다.
늘 창가에 서서 바라보던 오솔길을 내달리자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라비엘리는 흔들리는 말 위에 몸을 맡긴 채 그렇게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잠깐 쉬었다 가죠.”
말을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둔부에 뻐근함이 느껴지려던 찰나 말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루시안은 잠시 말을 세우고 먼저 내리더니 라비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손을 거부하곤 홀로 능숙하게 안장에서 내려왔다.
저를 스쳐 지나간 라비엘리의 뒷모습을 슬쩍 본 루시안이 슬쩍 미소를 보였다.
“그래도 롭에선 말을 탔었나 보군요.”
루시안이 바위에 걸터앉으며 라비엘리에게 물었다.
“…….”
라비엘리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고귀한 가문의 여인이니 승마는 기본 소양으로 다루었겠죠.”
“…….”
“갈라테이아는 여기서 꽤 멀어요.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간다면 무척 적적한 여행이 될 겁니다.”
“여행이라고요?”
라비엘리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루시안을 노려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 이게 여행인가요? 난 납치인 줄 알았는데.”
그러자 루시안이 눈을 크게 뜨더니 라비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이네요.”
“?”
“당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
갑작스러운 말에 라비엘리가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말해봐요, 라비엘리. 납치당한 것 치곤 꽤 즐거워 보이는데, 내 말이 틀렸나요?”
라비엘리는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숨기려 애를 써야 했다.
애석하게도 루시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말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불안감에 몸이 떨려왔다.
그러나 저택에서 멀어질수록, 거북하게 느껴졌던 말의 움직임이 점차 편해질수록 설명하기 어려운 쾌감이 밀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함께 있는 사람이 루시안이라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억지로 표정을 숨기고 있었는데 루시안은 그런 라비엘리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루시안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딱딱하고 거친 빵 덩어리를 꺼냈다. 그러곤 반으로 갈라 한쪽을 라비엘리에게 내밀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저택에 갇혀 있다가 나왔으니 좋은 게 당연하죠.”
“쓸데없는 소리를 잘도 하는군요.”
그러자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말은 무시하곤 빵을 한 입 베어 물더니 탄식했다.
“이것 좀 봐요! 첫날 아버지와 식사했을 때는 어린애 궁둥이처럼 보드라운 빵을 내놓더니, 지금은 돼지도 안 먹을 이런 형편없는 빵만 주잖아요.”
루시안이 남은 반쪽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라비엘리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설마 진짜 마이어가의 아들로 대접받고 싶은 건가요?”
“설마라니, 내가 진짜 마이어가의 아들인데!”
루시안은 몹시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네, 그러시겠죠.”
라비엘리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다 말만 번드르르한 사내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테아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저택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온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라비엘리가 웃음을 감추려 나무껍질같이 퍽퍽한 빵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였다.
“라비엘리, 내가 뭐 하는 사람 같습니까?”
루시안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테아노 후작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납치범 같네요.”
라비엘리의 차가운 대답에 루시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내가 의원이 되길 간절히 바라셨어요. 그 열망이 너무 강해서, 거기에 뜻이 없었지만 따라야 했죠.”
“설마 당신 의사인가요?”
루시안 마이어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더니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당신처럼 가벼운 사람이 의사라고 생각하니 놀랍네요.”
“이래 봬도 힐스에선 꽤 유명한 의사라고요.”
“네, 그러시겠지요.”
라비엘리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처음보단 얼굴이 풀어져 있었다.
들고 있던 빵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루시안이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었다.
“아직도 내가 불편합니까?”
“그렇다고 하면 뭐 선물이라도 주려고요?”
라비엘리가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루시안은 이번만큼은 장난스레 맞서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된 건 가엾은 어머니가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죠. 평생을 그리워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고 결국 숨이 끊어질 때가 되어서야 내게 진실을 이야기했어요.”
그러곤 라비엘리에게 주머니를 건네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비스듬하게 틀었던 몸을 조심스레 돌려 앉은 라비엘리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열어봐요.”
말없이 벨벳 주머니를 매만지다 고민 끝에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퀴징 글라스(렌즈 하나에 막대기가 달린 안경)였다.
한눈에 보아도 몹시 화려했는데, 진짜 안경으로 쓰려고 만든 게 아니라 장식품처럼 보였다.
그러나 라비엘리를 정말 놀라게 한 건 퀴징 글라스에 새겨진 테아노의 이니셜이었다.
“이건…….”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