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다음 날 아침, 루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식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비쩍 마른 돼지 뒷다리 구이, 숨이 죽은 채소 절임, 탑이라도 세울 기세로 쌓아놨지만 자세히 보면 형편없는 빵 조각.
저택 주인의 부재가 단박에 느껴지는 차림이었다.
분주히 움직이던 하녀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설 때까지도 라비엘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번쩍이는 은 식기를 빤히 보던 루시안이 하녀장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아가씨께선 오늘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하녀장 에레타는 물그릇을 루시안 옆에 내려놓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럼 수프를 좀 챙겨드리도록 해.”
루시안은 어디가 어떻게 좋지 않은지 물으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간밤의 일로 저와 얼굴을 마주하는 게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라비엘리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하녀장은 대답 없이 팽 돌아서서 물러났다.
가주가 없는 저택에선 분명 루시안이 그들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루시안 마이어를 테아노를 대신할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녀장과 집사는 그의 질문에 늘 얼버무렸고, 마지막 대답은 하지 않길 일쑤였다.
그중 루시안을 가장 멸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건 안주인 수발을 드는 메이지와 하녀장 에레타였다.
물론 집사의 태도는 루시안으로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하녀들의 반응은 재미있기까지 했다.
이유가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에레타와 하녀들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루시안 마이어에게 호의적이었다.
후작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아랫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루시안 마이어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미모를 가진 사내가 아니던가.
아들이든 사기꾼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뜨내기라면 더더욱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혈기왕성한 사내와 두어 번 붙어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니까.
먼저 루시안에게 관심을 보인 건 에레타였다.
그녀는 은근히 루시안 곁을 서성이며 여지를 주었다.
그러나 여지를 주는 것만으로는 루시안이 꿈쩍도 하지 않자, 그의 방을 정리하는 척하다 치마를 까뒤집으며 넘어지고 마룻바닥을 솔질하며 엉덩이를 내밀기까지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루시안 마이어의 차갑고도 무심한 반응뿐이었다.
“에레타.”
루시안은 건조한 면면을 바꾸지 않고 움직임을 멈춘 에레타에게 물었다.
“인근에 쓸 만한 사냥터가 있나?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에레타가 눈동자를 굴리며 하녀들이 서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사냥터는 잘 모르겠습니다.”
에레타가 야물지 못한 입매를 씰룩이자, 하녀들이 전부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께서 떠나시기 전 새로 산 명마를 길들이는 일로 고심하셨거든. 그래서… 내가 말을 데리고 사냥을 다녀오는 게 어떨까 하는데.”
구운 빵을 집어 든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라비엘리의 수발 하녀 메이지가 수건을 든 손에 바짝 힘을 주더니 불쑥 말문을 열었다.
“포목점 주인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갈라테이아 산 너머가 사냥하기 좋다던 걸요.”
“갈라테이아?”
“네.”
메이지는 저를 쏘아보는 하녀장의 눈을 피하더니 끝까지 말을 이었다.
“산세가 험해서 웬만한 사람에겐 어렵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말을 길들이기엔 그만이고 짐승들 살집이 좋아서…….”
“메이지?”
떠벌대는 것을 참지 못한 하녀장이 낮은 목소리로 메이지를 불렀다.
그러자 메이지는 이마까지 새빨개져선 입술을 꼭 붙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위해 꼭 가야겠군. 오늘 당장.”
루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막내 하녀 하나만 남기곤 나머지 하인들을 전부 물렸다.
“메이지! 분명 저자 앞에선 입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식탁에서 멀어지자마자 에레타는 메이지의 앞치마를 잡아채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메이지는 목덜미가 서늘했으나 당당하게 맞섰다.
“전부 아가씨를 위해서라고요.”
“뭐? 요것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일부러 그랬어요. 갈라테이아까지 가려면 족히 반나절은 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하녀장이 여전히 미간을 펴지 않자, 메이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대꾸했다.
“그래서라니요. 갈라테이아까지 갔다면 하루 만에 돌아올 수 없다고요. 그럼 적어도 사흘은 이 저택에 없겠죠. 도착하자마자 한 마리만 잡고 오는 게 아니라면요.”
메이지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치마를 붙들었던 에레타의 손아귀에 힘이 조금 풀어졌다.
“저자가 저택에 있는 걸 아가씨께서 너무 힘들어하신단 말이에요.”
메이지는 매일 밤, 루시안 마이어가 라비엘리의 침실에 들어가는 걸 알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테아노가 제게 내린 당부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매일 밤 루시안이 네 주인의 방을 찾을 것이다. 두 사람이 무얼 하는지 잘 지켜보고 내게 빠짐없이 보고하거라. 문틈으로 혹시 신음이 새는지, 내 아들이 라비엘리의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를 말이다. 알겠느냐?’
주인의 명은 생각할수록 이상한 것이었다.
그는 제 아들이라 주장하는 사내가 밤마다 라비엘리의 침실에 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고작 수발 하녀에게 신음이 새는 것 따위를 지켜보라니!
이는 분명 함정이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가씨가 덫에 걸릴 것이 분명하리라.
메이지는 가녀린 제 주인 라비엘리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후작의 아들이 저택 밖을 나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갈라테이아까지 갈까? 집사님에게 묻는다면 너무 멀어 쉽게 갈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래서 메이지는 부러 ‘웬만한 사람에겐 어렵다’라고 흘렸다.
사내라는 동물은 단순하니까.
쓸데없는 경쟁심이 가슴에 불을 지폈을 것이다.
웬만한 사내가 아니니 분명 간다고 나설 것이 뻔했다.
“간다면 사나흘은 아가씨께서 편하게 지내시겠죠.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있다 올 수도 있고요.”
“갈라테이아는 능숙한 사냥꾼들에게도 쉽지 않은 산이야. 너 정말 알고 얘기한 거야?”
에레타의 말에 메이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면 더 잘됐고요.”
“요런 앙큼한 년 같으니.”
두 시녀가 재잘거리며 부엌으로 돌아가는 동안, 루시안은 고고하게 수프를 떠 입에 넣고 있었다.
아랫것들을 부리는 건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껍데기만 복종하게 하려면 금화로 충분했고, 뼛속까지 내 사람으로 만들려면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수발이나 드는 줄 알았더니 제 주인을 끔찍이 생각하는군.’
루시안은 타지 사람이지만 악명 높은 갈라테이아를 모르지 않았다.
귀족들에겐 꽤 탐나는 사냥터였으나 산세가 험준하고 위험하기로 유명했으니까.
그러나 격렬한 사냥을 즐길 수 있는 데다 그곳에서 잡히는 짐승의 가죽은 최상품이라 사내라면 누구든 구미가 당기는 곳이었다.
더하여 갈라테이아의 치안은 형편없기로 유명했다. 툭하면 사람이 죽어나가는 탓에 국경 인근의 영주가 특별 기관을 설치하기까지 했으나 막지 못했다.
‘일이 재미있어지네.’
사실 루시안이 사냥터를 물은 건 다른 의도가 있었다.
가엾은 메이지는 저가 루시안을 속였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루시안 마이어에게는 금화보다 더 완벽한 계획이 있었다.
* * *
해는 조금 기울었고 바람에선 서늘함이 느껴진다.
그날 오후, 라비엘리는 얇은 외투를 하나 챙겨선 정원으로 나왔다.
하녀 중 한 명이 루시안이 잔뜩 짐을 꾸려 사냥을 떠났다고 했다.
그길로 라비엘리는 홀로 정원을 산책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이어가의 정원은 넓고 아름답기로 유명하였다.
광활한 대지에 우뚝 솟은 저택만큼이나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했는데, 진귀한 수목과 야생화를 잔뜩 옮겨다 심어 황실의 정원 못지않았다.
물론 테아노가 있을 때는 정원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다.
명목은 워낙 넓은 터라 길을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지만, 사실 라비엘리를 믿지 못해서였다.
오솔길처럼 꾸며놓은 길을 걸으며 라비엘리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뺨을 간질이거나 치맛자락 사이로 찬 기운이 스칠 때면.
머리칼 사이로 간밤의 기억이 스며드는 것이었다.
라비엘리는 분명 알고 있었다.
루시안 마이어가 원해서 그녀의 침실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 역시 테아노의 명을 따랐을 뿐이다.
그러나 낯선 사내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누워야 했던 것은, 사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루시안은 저항하려는 라비엘리를 침대에 눕힐 때를 제외하고는 무척 신사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는 말없이 약을 발랐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나 어젯밤엔.
“휴…….”
생각하는 순간, 다리 사이에 아찔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저항하고 싶지만, 해가 기울고 어둠이 찾아오면 오늘도 그가 침실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식된 라비엘리가 서글픈 걸음을 내디디고 있을 때였다.
먼발치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점점 커지고 있었다.
‘누구지?’
저녁 시간에 맞춰 온 양계 상인이나 기름 장수일지 모른다.
거칠게 넘어오는 소리로 짐작하건대 세금에 앙심을 품은 여관 주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