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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8)화 (8/136)

8화

“아버지가 궁금해서요.”

“…….”

“저를 낳아준 분이 알고 싶어서.”

어떤 말을 해도 그저 콧방귀나 뀔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가슴을 명치로 세게 맞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테아노는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궁금했다?”

“네.”

그즈음 테아노는 이 사내를 길러낸 여인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어머니는 계속 힐스에 있는 건가?”

“아뇨,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엔 테아노도 표정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유감이군.”

“네, 유감스러운 일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같이 왔을 텐데.”

루시안 마이어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입꼬리를 들고 웃었다.

대리석처럼 매끈하게 잘생긴 얼굴은 오히려 서늘함을 자아냈다.

“그게 무슨.”

테아노는 루시안의 말이 허풍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버렸고,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설마 이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했을까?’

테아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아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웃는 얼굴로 아버지를 부를 수 없었겠지.

테아노가 과거의 상념에 뒤엉켜 엉망인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루시안 마이어가 우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물론 농담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선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으셨어요.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

“하지만 전 다릅니다.”

루시안은 입가에 떠 있던 웃음을 순식간에 지워내더니 말을 이었다.

“절 아버지 없이 낳기로 한 건 어머니의 선택이었죠.”

그의 눈은 마치 맹수의 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의 절반엔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죠. 스무 해를 어머니께서 키워내셨으니, 나머지는 아버지께서 책임지셔야겠습니다.”

책임이라는 무거운 단어에 테아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그 순간 테아노는, 루시안 마이어가 단순히 보고 싶은 마음에 저를 찾은 것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더하여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전 의사니,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진료소 출입을 허락해주시죠.”

“그건 안 돼.”

테아노는 반사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꾸며낼 말이 신통치 않은지 허둥대는 얼굴이 되었다.

“내, 내 말은 갑자기 진료소에서 일을 하게 할 순 없단 뜻이다.”

테아노는 뛰어난 의술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의사였다.

덕분에 라비엘리의 후견인이 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정체불명의 아들이 찾아왔다는 말이 돌면 곤란했다.

“아, 이런. 갑자기 아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아버지께 꽤 유익하진 않겠군요.”

“…….”

루시안 마이어는 고개를 틀어 저택을 한번 훑더니 다시 말했다.

“하지만 하인들 입을 쉽게 막을 순 없을 텐데요.”

루시안의 말에 테아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들은 이 저택에서 일하는 것을 축복이라 생각하지. 만약 누군가 섣불리 입을 놀린다면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알고 말이야.”

루시안은 테아노가 자기 나름의 왕국을 구축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군요.”

“사내에게 정부가 있는 건 흠이 아니지만, 게다가 십수 년 전 철없는 나이의 일이기도 하고. 게다가 정부의 아들이 건실한 청년이 되어 나타난 것이 어쩌면 자랑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필요 이상으로 말이 길어진 것으로 보아, 루시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난 의술로 사람들 입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해. 그러니 당분간은…….”

테아노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루시안 마이어가 눈치껏 뒷말을 이었다.

“멀리서 온 친척으로 하지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는 일부러 아버지란 단어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좋아.”

테아노는 청년의 얼굴을 빤히 한번 본 뒤 그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아내가 죽은 뒤 재혼하지 않았던 건, 자유로운 섹스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자식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

사람들의 의아함에도 라비엘리 르휜을 데려온 건 표면적으로는 동정과 안타까움이었으나 사실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후견인이라는 그럴싸한 이름 뒤에 숨어 그녀를 취하기를 바랐다.

그녀를 닮은 금발의 귀여운 아기를 낳는 것. 낮에는 곳곳에 아기 웃음소리를, 밤에는 라비엘리의 신음을 채워 넣는 것.

그리하며 저택에 완전한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근래 들어 가장 꿈꿔왔던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틀어진 기분이었다.

테아노는 현관에 서서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이런 끔찍한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군.’

“너를 급히 부른 이유는.”

테아노는 이런 대화를 오래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용건을 꺼냈다.

“나는 라비엘리 르휜의 후견자이니만큼 그 아이에 관해 크고도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라비엘리에 관한 이야기로구나.

루시안은 속으로 군침을 흘렸으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아이를 잘 돌본 뒤 좋은 혼처를 찾아주는 게 나의 의무겠지.”

“네.”

“물론 결혼한 뒤에도 뒷말 없이 그 아이가 잘 살아야 내가 낯을 들 면목이 있을 것이다.”

루시안은 이 사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말을 빙빙 돌리는지를 생각했지만, 짐작 가는 게 없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때문에 아비를 경박하다 생각하지 말거라.”

“네.”

루시안이 짤막하게 대답하자, 테아노는 두툼한 손으로 메마른 입가를 한 번 쓸어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여인에게 아이를 갖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지. 혹시…… 몰라 얼마 전 산파를 불러 확인했는데 지금 그 아이는 산과 병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구나.”

그 순간 루시안은 여위었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앙상한 라비엘리의 어깨와 팔을 떠올렸다.

“심각한 병증입니까?”

“아니, 심각하진 않다. 산파의 말에 의하면 치료로 충분히 나아질 수 있다고 했으니.”

테아노는 루시안의 도움은 받더라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불감증 때문에 아들의 손을 빌린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루시안의 손을 빌리는 것은 사실 죽을 만큼 싫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돈을 주고 사람을 쓸까도 생각했으나, 이런 일은 가족 안에서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녀석이 의사라는 사실은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의사라니 더 믿을만하겠지.’

테아노는 이런 식으로 루시안을 가족으로 인정하게 된 제 처지가 어이없었다.

“아버지께서 의술에 능하시니 문제 될 것이 없겠군요.”

루시안은 건조하게 대꾸하였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 교활하고 늙은 사내가 무엇을 위해 저를 찾았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어떤 후견인도 돌보는 아이의 임신을 걱정해주지는 않는다. 끔찍하군.’

더하여 음흉한 속내를 태연히 감추는 테아노의 모습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2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음부에 이 약을 발라주어야 한다. 오직 사내의 손가락만이 효능을 발휘한다고 하는구나.”

“…….”

“그런데 나는 내일 아침 당장 오스트린으로 가야 한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루시안은 메마른 눈빛으로 테아노가 들고 있는 약병을 쳐다보았다.

“네.”

그 이후로 약의 재료, 이것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어떤 식으로 약을 발라야 하는지 등을 장황하게 설명한 테아노가 루시안을 올려보냈다.

그는 테아노의 말에 그리 놀라지도, 당황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퍽 다행스러운 동시에 껄끄러웠다.

게다가 아들이라고는 하나 젊은 사내였다.

일반적인 사내도 아닌 몹시 매력적인 사내.

테아노는 사실 루시안이 아닌 라비엘리를 믿을 수 없었다.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인이 아닌가.

한참을 끙끙거리던 테아노는 결국 메이지를 불렀다.

“내가 저택을 비운 사이, 네 주인을 잘 살피거라.”

“네?”

“매일 밤 루시안이 네 주인의 방을 찾을 것이다. 두 사람이 무얼 하는지 잘 지켜보고 내게 빠짐없이 보고하거라.”

거기까지 들은 메이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의 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무슨 일인지 물을 수는 없었다.

“문틈으로 혹시 신음이 새는지, 내 아들이 라비엘리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를 말이다. 알겠느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조신이 대답하는 수밖에는.

“네,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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