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벽돌처럼 단단하게만 보이던 루시안의 적갈색 눈이 순간 흐릿해졌다.
사내의 눈빛에 손목을 잡힌 라비엘리가 주저하는 사이, 마치 연약한 풀잎에 이슬이 맺히듯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부탁이에요. 난 지금 모든 것이 어색하고 낯선걸요.”
라비엘리는 하마터면 ‘사기꾼, 이 거짓말쟁이!’라고 내뱉을 뻔하였다.
테아노의 돈을 노리고 저택에 붙어 있던 자들은 언제나 최후에 눈물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녀나 하인과 보낼 순 없잖아요.”
루시안이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러나 손목에서 느껴지던 뜨거운 기운은 오히려 짙어지고 있었다.
“당신도 산책을 하고 있었고, 나도 그렇고요. 우리 목적이 같으니 그저 같은 방향으로 걷자는 것뿐이에요.”
라비엘리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루시안의 모습에 하마터면 헛웃음을 내뱉을 뻔하였다.
‘혀를 놀리는 게 보통내기가 아니네. 사기꾼이 틀림없어.’
마음은 냉정히 돌아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장황한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결국, 라비엘리는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싸늘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하지만 너무 늦게까진 안 돼요.”
“그럼요, 레이디.”
그는 믿을만한 사내처럼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을 많이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비밀스러웠으며 전부 겉도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런데도 루시안의 말을 따르고 있는 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라비엘리, 내가 왜 여기 온 것 같아요?”
루시안은 그렇게 무거운 질문을 하나 던지고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가 입을 다물자 그나마 어색하지 않게 이어지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아마 제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라비엘리는 조심스레 고개를 틀어 루시안을 살폈다.
마냥 여유로워 보이는 사내에게도 고민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민이 있는 척 저를 포장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어느 쪽이든 라비엘리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글쎄요.”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죠.”
만약 날이 어둡지 않았다면 루시안의 표정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미 목소리만으로도 그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난 이곳에서 살게 되었어요. 그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었고요.”
“어머니 일은 유감이에요.”
“괜찮아요. 사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평화로울 수 있다면.”
덤덤하게 내뱉은 말은 라비엘리의 가슴 속을 숯불로 긁어 헤치는 것만 같았다.
사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평화로울 수 있는 건, 어쩌면 라비엘리를 두고 한 말일지도 몰랐다.
테아노의 허락 없인 저택 밖을 나갈 수도 없었으며, 밤마다 가학적인 행위를 견뎌야 하는 삶.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정원을 두어 바퀴 돌고 수백 번은 읽은 소설을 다시 읽는 것.
그녀 역시 지금의 삶이 죽는 것만큼이나 괴로웠다.
그러다 문득, 아주 어린 시절 잃어버린 동생이 떠올랐다.
살아는 있을까, 혹시 죽었을까.
어쩌면 이 험한 꼴을 보지 않고 르휜가를 떠나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비참한 삶은 사는 건 저 혼자로 족할 테니까.
라비엘리가 기억하는 동생은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아기의 얼굴일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다행인지도 몰라.’
루시안은 조용히 제국의 신께 성호를 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비엘리도 조심스레 루시안을 따라 했다.
‘부디 평안하길.’
열 걸음 더 정적 속에 걸음을 옮겼을 때 드디어 루시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꺼낸 이야기 때문에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만회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라비엘리, 밤에 자주 산책하러 나오나요?”
“가끔요.”
라비엘리는 그가 속이 빤히 보이는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밤에 자주 나온다고 하면 따라 나오기라도 할 셈인가?
“아뇨.”
“그래요?”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럼 오늘은 왜 나왔습니까?”
“그냥요.”
건조한 대답에 루시안이 미소를 속으로 감추며 되물었다.
“혼자 나오면 외롭지 않아요?”
“그러려고 나온 거예요.”
라비엘리의 말에 루시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외로우려고 나온다고요?”
“네,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제 감정을 흘리고 말았다.
단단히 채웠던 빗장을 풀자 그간 참아왔던 말들이 줄줄 새고 만다.
루시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왜요?”
“당신은 집다운 집이 생겨 좋다고 했지만, 사실 난 이곳이 집이라고 느껴본 적 없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저택에 들어온 뒤 라비엘리는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숨을 붙든 건 제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루시안은 무언가 간파한 듯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라비엘리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말은 삼가려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 원래 로튼 사람인가요?”
출신에 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는 여전히 라비엘리의 아픔이었다.
처음 로튼에 왔을 때, 라비엘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기억이 흐릿해질지를 생각했다.
행복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생채기 난 가슴 위에 평범한 일상이 덧입혀지기만을 원했다.
그러나 로튼은, 아니 정확히 테아노의 저택은 라비엘리의 기대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라비엘리?”
루시안의 음성이 라비엘리를 깨워냈다.
“네.”
“원래 로튼 사람인가요?”
“아뇨, 전 롭에서 살았어요.”
“아, 좋은 도시에서 왔군요.”
루시안의 말이 다시 한번 라비엘리의 가슴을 헤집는다.
“네.”
라비엘리가 담담히 대답했을 때, 루시안은 다음 질문을 할지 말지를 두고 머뭇거리는 듯했다.
“?”
“굳이 로튼까지 올 만큼…….”
테아노 마이어를 믿었냐고 묻고 싶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
대체 무엇을 짊어지고 이곳에 있는 것인지 루시안은 알고 싶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알아낼 생각이었다.
“자세한 건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튼, 후작께서 절 받아주신 건 감사한 일이었어요.”
“…….”
부모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 라비엘리는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제법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다.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의미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인들의 수군거림을 듣는 것도,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살아가는 것도, 전부.
“힘들어 보이는군요.”
그 말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테아노의 저택에 들어온 이후 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그때, 루시안이 라비엘리의 가슴에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도망갈래요?”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웃어 보인다.
“뭐라고요?”
“뭘 그렇게 놀라요. 농담이에요. 힘들다길래.”
라비엘리는 그제야 그녀가 너무 목소리를 크게 낸 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만이 느껴질 뿐이다.
몹시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어리석은 반응이었다는 회의감과 불같이 솟은 수치심이 라비엘리를 잡아먹고 있다.
“농담이었어요. 화났어요?”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 탓에 루시안이 그녀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아뇨, 하지만 그런 농담은 유쾌하지 않네요.”
“미안해요.”
라비엘리는 발끝에 시선을 두고 걸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지만, 어쩐지 숨이 막혔다.
결국 거대한 저택을 완전히 한 바퀴 돌고 말았다.
서로에게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 산책이었다.
루시안은 그녀 주변에 세워져 있던 단단한 벽을 조금 허무는 데 성공했으며, 라비엘리는 루시안이 그저 철없이 날뛰는 망나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사기꾼이라는 그림자는 지울 수 없었지만.
“라비엘리, 꽤 오래 걸었으니 이제 잠 잘 올 거예요.”
문 앞에 선 루시안이 라비엘리에게 나른히 덧붙였다.
“잘 자요, 레이디.”
“네.”
건조하게 대꾸한 라비엘리가 돌아서려 했을 때.
“내 이름은 루시안이에요.”
루시안이 그렇게 말하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라비엘리는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이름을 입에 올려선 안 될 것 같았다.
그 앞에 세운 벽이 처음보단 약해졌다 하더라도 루시안은 결코 가까이할 수 없는 사내였다.
하지만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세운 흙벽에 손가락을 하나 쑤셔 넣곤 야금야금 돌리고 있었다.
“그래요. 잘 자요.”
“내 이름은 루시안라고요.”
“…….”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레이디.”
루시안이 나른히 웃으며 손을 저었을 때였다.
라비엘리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루시안 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