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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4)화 (4/136)

4화

그녀는 의자를 밀어놓고 식탁을 벗어나고 있었다.

“벌써 다 드셨어요?”

“네.”

“이렇게 맛있는 걸 남겨두고 일어서다니.”

라비엘리는 대답 없이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다시 라비엘리를 붙든다.

“마이어가의 저택은 마치 성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군요. 전부 당신이 관리합니까?”

“…….”

루시안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집사장은 누구죠? 제 방을 새로 준비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

“로튼은 처음이라 그러는데 근방에 약재상이 있습니까?”

“이봐요.”

처음엔 이 남자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후작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분명 조금 전 혼자 저택을 둘러보겠다고 했는데, 후작이 자리를 비우자 참새처럼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네.”

루시안 마이어는 포크를 내려놓더니 라비엘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젊음의 생기가 가득 차 있었고 입술 끝에는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에 혼자 둘러보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마음이 바뀌었습니다만.”

“…….”

“안주인께서 저택에 대해 가장 잘 아실 테니까.”

루시안이 입술을 양쪽으로 늘리며 농담을 던졌다.

물론 라비엘리는 그런 루시안의 말을 받아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메이지.”

“네, 아가씨.”

“집사장이 누구인지, 방은 언제쯤 정리될 것인지 네가 알려드리렴.”

라비엘리는 메이지에게 명령을 내린 뒤 곧바로 돌아섰다.

“냉정한 편이구나. 잘 알겠습니다.”

등 뒤에서 루시안 마이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루시안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사실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불편해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 *

넓은 저택에 서서히 고요가 내려앉기 시작했을 때.

책이라도 볼까, 아니면 바느질이라도 할까 생각하던 라비엘리는 전부 다 내려놓고 아예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라비엘리는 얇은 외투를 하나 걸치곤 촛대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며 산책을 즐기고 싶진 않았으니까.

모두가 잠든 시각, 홀로 나와 여유를 부리는 건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사치였다.

라비엘리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왔다.

잡념을 떨쳐 내려 나온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다이닝 홀을 지나치자 얼마 전 있었던 일이 또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믿기 어려우면…… 증명해 보일까요?’

‘여기 전부 들어 있거든요.’

‘당신은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얼마나 아둔해지는지 모르는군요.’

루시안이 남긴 말들이 되살아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둔해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라비엘리는 테아노의 다부진 눈빛과 그의 얼굴 뒤에 가려진 그림자를 생각했다.

그는 수년 전 아내를 잃은 뒤 홀로 학문과 연구에만 정진했다고 알려진 사내였다.

제국에선 제법 명망 있는 의사였으며 동시에 어질고 바른 학자이기도 했다.

라비엘리는 그런 후작이 제 후견인이 되었을 때,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끔찍한 사기와 반역에 연루된 가문, 결백은 밝혀냈으나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 부모님과 허공에 뜬 작위.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남은 재산을 믿었던 자들에게 갈가리 찢기고 남은 건 몸뚱이뿐이었던 과거.

라비엘리는 아버지뻘인 사내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처음에는 무섭게 느껴졌으나 그녀를 보호할 사람이 없는 세상 속에 던져지는 것이 더 끔찍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후작이 좋은 사내일 거라 믿었다.

그는 로튼 일대에서 존경받는 석학이자 유명한 의사였으니까.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테아노는 사람들이 밖에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라비엘리는 저택 안으로 들어온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깊게 떠올리면 간밤의 일이 떠오를 것 같아 이를 살짝 물며 빠르게 문밖으로 나갈 때였다.

“……!”

어둠 속에 묻혀 희미하게 보이는 건 분명 사람 그림자였다.

라비엘리는 그대로 굳어선 문 앞에 섰다.

‘사기꾼?’

앞마당 뜰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건 분명 루시안이었다.

다행이라면 라비엘리가 마주한 게 그의 뒷모습이라는 것.

라비엘리는 제 발걸음이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길 바라며 조심스레 치마를 돌렸다.

하지만 무언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안녕, 레이디.”

그녀의 뒷머리에 스친 건 분명 바람이 아니다.

나른하지만 제법 정확하고 또렷한 남자의 음성.

라비엘리는 못 들은 척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라비엘리?”

라비엘리를 붙든 음성이 나른하게 허리를 감아 돌려세운다.

“네.”

어둠 속이라 다행이었다.

잘게 떨리는 그녀의 얼굴 근육이 전부 드러나지 않을 테니.

“안 자고 왜 나왔어요?”

“산책을…… 좀 하려고요.”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순순히 루시안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잠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중이라든가, 소리가 들려 나왔다 들어가는 길이라고 얘기했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싶던 찰나.

“같이 걸을까요?”

루시안의 목소리에선 독특한 향이 느껴진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마시던 허브차 향이 이와 비슷할까.

“아뇨, 그냥 정원이나 잠깐 걸을 생각이라.”

“저도요.”

“…….”

루시안은 나른하게 웃더니 라비엘리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 식구가 되었는데 너무 벽 세우지 말아요.”

루시안이 라비엘리의 보폭에 제 걸음을 맞추며 말했다.

은은하게 풍기던 향기는 조금 전보다 더 진해져 있었다.

“혹시 아버지한테 얘기 들었나요?”

“무슨 얘기를요?”

라비엘리가 되묻자 루시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여기서 살게 될 거예요.”

“……그렇군요.”

“잘됐죠? 처음으로 집다운 집에서 살게 되었네.”

루시안이 라비엘리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다행히 라비엘리는 그 천연한 웃음을 보지 못했다.

“그나저나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네?”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고요.”

라비엘리는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예 마주치지 않았으면.’

“그냥 라비엘리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요.”

고민하던 라비엘리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떨어뜨린다.

“그럴까요?”

“네.”

“좋아요, 라비엘리. 하지만…… 가끔 필요할 땐 부인이라고 부르죠.”

루시안은 잔뜩 얼어 있는 라비엘리의 얼굴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멋쩍은 얼굴이 된 사내가 두 손을 세차게 앞뒤로 저으며 다시 말했다.

“밤공기가 좋군요. 그렇죠?”

“네.”

“달도 밝고요.”

“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정원을 제법 근사하게 관리한 것 같아요. 당신이 했나요?”

“아니요.”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질문에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겨우 하루 전 만난 사내였다.

물론 앞으로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된 남자였지만.

그런데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라비엘리를 알고 있던 것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라비엘리는 겁이 났다.

이 젊고 사랑스러운 사내가 말을 걸어올 때마다, 그의 묵직한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리고 바람에 실려 사내의 숨소리가 흘러올 때마다.

몹시 겁이 났다.

겁이 나는 이유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라비엘리는 그와 함께 걷는 시간이 몹시 두려웠다.

대화라기엔 단조롭고 숨 막히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원을 지나 뒤뜰로 향했을 때였다.

처음보다 다소 흐릿하게 느껴지는 루시안의 음성이 날아왔다.

“원래 말수가 그렇게 적어요?”

“네.”

“성격도 조용하고요?”

“네.”

“아버지와 결혼할 건가요?”

“……네?”

내내 평정심을 유지했는데 마지막 질문엔 그러지 못했다.

그를 올려다보자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빛을 내는 적갈색 눈동자가 라비엘리를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질문은 조금 무례하네요.”

“그랬나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우아한 미소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루시안은 생각보다 차게 웃었다.

그러곤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라비엘리 역시 루시안을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을 뿐이었는데 불쾌했다면 사과하죠.”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미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라비엘리는 마른침을 넘기며 대꾸했다.

“진짜 어머니가 될 것도 아닌데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대답만 하던 라비엘리가 처음으로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후작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아니 아들로 인정받았다 할지라도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물론 테아노는 이미 그녀를 마이어가의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 일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루시안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섭나요?”

마치 라비엘리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루시안이 물었다.

“내가 왜 당신을 무서워하죠?”

“꼭 그런 것처럼 보여서요.”

값을 매겨 팔 수도 있을 것 같은 우아한 금빛 머리. 오래 쳐다보아선 안 될 것 같은 적갈색 눈동자가 라비엘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 이만 들어가야겠어요.”

“잠시만요.”

허리를 틀어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라비엘리의 손목에 뜨겁고 시큰한 기운이 닿았다.

“기다려요, 라비엘리.”

“아니요, 저…… 이만 들어가야겠어요.”

촛대를 쥔 반대쪽 손이 덜덜 떨렸다.

손목에서 시작된 뜨거운 기운이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가지 말아요.”

“…….”

“밤은 길잖아요. 조금 더 이야기해요.”

“…….”

“네? 그렇게 해줘요. 오늘은 여기 온 첫날밤이니까.”

“…….”

“처음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늘만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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