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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3)화 (3/136)

3화

“알 것 없소.”

“…….”

“앞으로…… 아니, 오늘 이후로 그 녀석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좋겠군.”

“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

테아노는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스스로도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데다 갑자기 나타난 아들의 존재가 몹시 거북한 듯했다.

“이리 와요.”

웬일인지 테아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라비엘리를 불렀다.

그는 라비엘리의 말간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어둠 속에선 더 아름답군.”

“…….”

“어떤 표정인지 선명히 보이지 않아서겠지.”

숨죽인 라비엘리가 굳게 닫힌 입술에 힘을 바짝 주었을 때였다.

“예쁘지만 향기 없는 꽃 같으니.”

테아노가 거칠게 라비엘리의 등허리를 끌어안더니 입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

테아노의 수염이 살갗에 닿아 따가웠다.

게다가 그의 입술을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라비엘리를 잡아먹었다.

진득한 타액이, 그의 축축한 혀가 몹시 싫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한동안 라비엘리의 입술을 탐닉하던 테아노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눈은 필요 이상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단순히 이야기를 위해 찾아온 것이길 간절히 바랐건만.

“옷 벗어.”

그의 음성은 달라져 있었다. 라비엘리는 손을 덜덜 떨며 슬립을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테아노가 다가와 슬립을 꽉 쥐고 양쪽으로 벌렸다.

잔뜩 겁먹은 라비엘리가 테아노의 뜻에 따라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테아노가 남은 옷감을 북북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아노는 변태적인 행위에 집착했다.

밖에서 봤을 땐 고고하고 명망 높은 석학이었으나 침실에선 변태 성욕자일 뿐이었다.

황제의 금욕령도, 무엇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불안감에 그녀가 떨고 있을 때 제법 두툼한 손이 갑자기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런, 금세 차가워졌군.”

몸이 오그라들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어깨에서 시작된 감각에 배 속이 뒤틀렸지만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이곳을 뛰쳐나가는 순간, 자유는 얻을지 몰라도 살아갈 방도가 없었으니까.

그녀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고 재산은 부모가 굳게 믿던 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부모를 따라 죽으려 했으나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죽었을지도 모를 동생이 눈에 밟혀 죽지도 못했다.

라비엘리는 그녀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저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을 잃었다.

자매를 돌보던 유모가 홀연히 어린아이를 안고 사라졌는데, 그 시절 유모가 아이를 훔쳐다 파는 일은 빈번했다.

“그럼 곧 따뜻하게 해줘야지.”

그 순간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테아노가, 라비엘리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너도 흥분하는 게 좋을 거야.”

테아노는 가녀린 여인의 몸에 제 손자국을 이리저리 남기고 있었지만, 라비엘리에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감흥은커녕 저릿한 감각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걸 그에게 드러내선 안 되었다.

라비엘리는 적당히 테아노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어때? 오늘은 괜찮을 것 같은가?”

테아노는 라비엘리의 귀에 대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물론 테아노 역시 라비엘리의 상태를 알았다.

그녀는 언제나 메말라 있는 데다 마치 나무토막처럼 움직이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라비엘리를 살피던 테아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오늘도 이 모양이로군.”

바짝 메마른 걸 확인한 테아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 너도 이제 노력을 해야겠지?”

라비엘리 르휜은 외적으로 보아선 빠지는 곳 하나 없이 완벽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그녀는 테아노가 무슨 짓을 해도 느끼지 못했으며 늘 메말라 있었다.

라비엘리는 테아노와의 관계에서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좋아, 오늘만큼은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라비엘리가 온몸을 사로잡은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을 때였다.

삐걱-

굳게 닫힌 문틈으로 마룻바닥이 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테아노의 움직임에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 홀로 들은 모양이었다.

잘못 들었거니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다시 한번 묵직한 울림이 그녀 귀에 찍히듯 날아왔다.

하녀 메이지는 아닐 것이다. 종달새처럼 작고 마른 데다 소리도 내지 않고 발끝으로 걷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 문밖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라비엘리의 머릿속에 여유만만한 표정의 이방인이 떠올랐다.

‘설마. 사기꾼?’

당황한 나머지 라비엘리는 부러 신음을 만드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바로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에 찬물을 끼얹었다.

테아노는 당황해 문가를 바라보았으나,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쉿.”

테아노는 라비엘리의 허벅지를 세게 쥐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는 흉흉한 눈빛으로 문을 쏘아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고, 이 저택에서 자신의 방 안에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의 명이 내려진 상황이 아닌가.

만약 명을 어기고 여색을 탐했다는 소문이 난다면 곤란해진다.

하인이 아니라 오늘 갑자기 나타난 그 녀석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녀석의 입을 막아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심장이 불쾌하게 헐떡이기 시작했다.

속으로 삼켜낸 숨들이 힘겹게 얽히었다. 얼마 후, 고요함 속에 싸늘히 식은 사내의 욕망 역시 수그러들고 말았다.

“젠장.”

* * *

“라비엘리.”

“……네.”

“거기 있는 후추 좀 건네줘요.”

라비엘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작은 유리병을 집어선 테아노에게 건네었다.

코 밑과 턱이 수염으로 가득 찬 신사는 진지한 얼굴로 후추통을 받아 들더니 수프에 톡톡 뿌렸다.

그러곤 바로 앞에 내려놓기 전, 라비엘리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줄까요?”

“아뇨.”

라비엘리는 그를 따라 건조하게 대꾸하곤 수프에 코를 박았다.

목소리는 내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보는 눈이 많은 탓에 불편함을 내색할 수도 없다.

라비엘리는 최대한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따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저도 괜찮습니다, 아버지.”

그때, 라비엘리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시안이 부드럽게 대꾸했다.

“흠.”

테아노는 루시안을 한 번 힐끗거리더니 말없이 후추통을 내려놓았다.

탁.

라비엘리는 고개를 슬쩍 들어 루시안을 쳐다보았다.

느긋한 얼굴로 음식을 입에 가져가던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시선을 발견하곤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뭐야?’

고작 짧은 눈짓이었지만, 낯설고 묘한 기운이 가슴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혹시 테아노가 보았을까, 뒤에 서 있던 하녀가 본 건 아닐까.

라비엘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으나 사내의 눈짓은 꽤 오래 잔상이 남아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더는 먹고 싶지 않았으나 목구멍이 잔뜩 말라버린 탓에 뜨거운 수프라도 넣어야 했다.

음식은 훌륭했지만 식사는 끔찍했다.

숨 막힐 듯 조용한 식탁 위, 들리는 소리라곤 접시에 숟가락이 닿아 내는 마찰음 정도였다.

혹은 음식을 내오는 하녀의 발걸음, 위층 마룻바닥을 닦은 하인의 발걸음 소리.

평화를 깬 것은 루시안 마이어의 나른한 목소리였다.

“아버지, 이 근방엔 고양이가 많은 모양입니다.”

“……?”

“간밤에 발정 난 고양이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더군요.”

“…….”

“제법 늙은 수컷 고양이 같던데.”

“쿨럭, 쿨럭!”

수프를 넘기던 테아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마른기침을 연신 뿜어냈다.

“이런, 괜찮으세요 아버지?”

“주인님!”

사용인이 다급히 다가와 테아노에게 수건을 건넸다.

그는 얼굴을 수건 속에 묻고 있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귀는 가리지 못했다.

“흠……. 엘리자, 앞으로 수프 간을 좀 약하게 하도록 해.”

“네, 주인님.”

조금 전 수프에 후추를 잔뜩 친 것은 기억나지 않는지 테아노가 엉뚱한 소릴 했다.

다시 테이블 위에 정적이 찾아오자 라비엘리는 두 눈만 들어 루시안을 힐긋거렸다.

확실히 보통은 아닌 사내다.

“라비엘리.”

어느 정도 진정한 듯 보이는 테아노가 라비엘리를 불렀다.

“네.”

그는 식탁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오후에 루시안에게 저택을 소개해주겠소?”

“아뇨, 아버지.”

그때, 루시안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제가 그냥 혼자 둘러보죠.”

루시안은 라비엘리가 앉은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 편한 대로 하거라.”

그러곤 여전히 목구멍이 따끔거리는지 눈가 주름을 새기며 말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소.”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린 테아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마 후, 화려한 음식과는 어울리지 않게 앙상하게 마른 여인도 은수저를 내려놓았다.

“아가씨, 그만 드시려고요?”

하녀 메이지가 라비엘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입맛이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녀는 영 딱하다는 얼굴로 라비엘리를 바라보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루시안에게 말을 걸었다.

병든 닭처럼 맥없는 라비엘리와는 다르게, 루시안은 즐겁고 제법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식사하고 있었다.

“수프를 더 드릴까요?”

“그래 주겠어요, 메이지?”

“네, 그럼요.”

루시안은 고개를 한쪽으로 틀더니 빙긋 웃었다.

사랑스러운 미소에 하녀도 상냥하게 응답하였다.

루시안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게 할 법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서려던 라비엘리가 고개를 슬쩍 들어 다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저택을 소개하는 일을 맡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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