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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2)화 (2/136)

2화

“제가 함께 지낼 분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함께 지내다니.’

라비엘리는 자칫 코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그녀는 이 낯선 사내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테아노가 와서 쫓아내든 아들이라 인정받고 이 집에 눌러앉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전 루시안 마이어입니다.”

무심한 얼굴을 다시 붙잡은 건 루시안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응접실에 서 있는 것조차 피로하게 느껴져 라비엘리는 내뱉듯 제 이름을 말했다.

“라비엘리 르휜.”

그러나 그 순간, 어떤 것에도 당황하지 않을 것처럼 초연하던 사내의 미간이 처음으로 움찔거렸다.

루시안이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당혹스러움을 숨기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 많이 놀랐군요.”

그는 라비엘리가 퍽 딱하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

“갑자기 후작님의 아들이 나타나서인가요, 아니면 그 아들이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서인가요?”

이번 질문은 꽤 무례하게 들려왔다.

“아뇨, 제가 알기론 후작님껜 아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런, 그랬군요.”

루시안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인지는 조금도 걱정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 웃는 거야?’

약 석 달 전, 라비엘리는 갑작스러운 가문의 몰락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정혼자는 그녀를 외면했고 오갈 데 없는 그녀를 받아준 건 부인과 오래전 사별한 테아노였다.

그는 라비엘리가 혼인할 상대를 찾아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주겠노라 했다.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고목처럼 서 있던 라비엘리를 향해 루시안이 말문을 열었다.

“믿기 어려우면…… 증명해 보일까요?”

루시안은 소파 위에 올려놓은 제 가방을 두어 번 두들겨 보였다.

“여기 전부 들어 있거든요.”

“…….”

“당신은 사랑에 빠진 아버지가 얼마나 아둔해지는지 모르는군요.”

사랑에 빠진 남자는 방향을 잃은 말처럼 앞으로 내달릴 뿐이다.

제 말굽이 차는 땅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축축하고 거친 호흡만을 내뿜으며.

“그게 무슨.”

“눈앞의 여인에게 구애하려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뜻이죠.”

루시안이 검질기게 마지막 말을 뱉었을 때였다.

하녀 메이지가 차를 들고 나타났다.

“후작님께선 언제 돌아오실지 모릅니다.”

“아, 그럼 우선 쉴 수 있게 방을 좀 내어주시죠. 제법 먼 길을 왔더니 피곤하네요.”

“…….”

“참, 제 말은 미리 마구간에 매어 놓았습니다. 명마라 소란을 피우진 않을 겁니다.”

루시안의 말에 하녀가 라비엘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집 안에 들어온 사람을 쫓아낼 순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라비엘리는 루시안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메이지, 2층에 작은 방을 하나 내주렴.”

“네.”

그것이 전부였다.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간 라비엘리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다리를 모으고 무릎을 세운 뒤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가만히 떠올렸다.

‘루시안 마이어라고 했지.’

엄청난 부를 가졌으나 자식이 없는 탓에 테아노의 돈을 노린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름도 생소한 지명을 대며 투자할 것을 권하기도 했고, 사업을 하자며 며칠을 저택에 들러붙기도 했다.

물론 테아노의 먼 친척이라며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저를 아들이라 칭한 사람은 처음이었으나 루시안 마이어 역시 지금껏 왔던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 분명했다.

‘사기꾼 같지만…… 알 게 뭐야.’

라비엘리는 제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을 환기할 뭔가가 필요해서였다. 간밤에 읽다 만 책을 집어 든 라비엘리가 활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테아노는 매번 바보 같은 글을 읽는다고 했지만, 소설을 읽는 것만큼 그녀를 자유롭게 하는 건 없었다.

이 저택에서 그와 함께 살기 위해선 해방구가 꼭 필요했다.

그녀는 목을 매는 대신 글을 읽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라비엘리는 저택 입구가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조금 나았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빳빳하게 굳은 목을 풀기 위해 고개를 들던 라비엘리의 시선 끝에, 멀리 테아노의 마차가 닿았다.

‘이제 꽤 시끄러워지겠군.’

어떻게 결말이 났을지 궁금했지만, 라비엘리는 조용히 저녁이 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하녀의 부름에 1층으로 내려갔을 때 테아노는 루시안과 나란히 서서 라비엘리를 맞이했다.

“라비엘리.”

은으로 수를 놓은 짧은 연미복이 번쩍인다.

테아노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은 라비엘리가 억지로 연미복 단추에 시선을 두었다.

“네.”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은 생각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테아노는 다소 상기된 얼굴이었다.

안색은 어두웠고 온몸으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꾹 누른 채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라비엘리, 이미 인사를 나눴겠지만, 정식으로 소개하지요. 이쪽은 내 아들, 루시안 마이어입니다.”

테아노가 말을 마치자 루시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라비엘리를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루시안은 제법 반듯한 음성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오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분명 옆에 테아노가 있기 때문이겠지.’

라비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루시안의 인사를 받았다.

한편, 두 사람을 힐긋거리던 테아노가 짧고 뻣뻣한 수염을 매만지더니 하녀를 돌아보았다.

“2층에 있는 방 중 가장 큰 걸 내주도록 해. 그리고 내일 체첸을 좀 불러와. 가구도 새로 맞춰야 하니까.”

“네, 주인님.”

그러자 루시안이 대뜸 입을 열었다.

“가구는 제가 직접 고르죠. 취향이란 게 있으니까.”

“그, 그래…… 좋을 대로 하거라.”

두 사람의 대화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라비엘리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 * *

그날 밤 라비엘리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불안감에 떨고 있을 때 제법 두툼한 손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라비엘리는 익숙한 듯 별말 없이 손길을 받아들였다.

사실 테아노 마이어는 그저 호의로 라비엘리의 후견인을 자처한 게 아니었다.

“옳지, 착하지.”

그는 제국에서 제법 알려진 석학으로 명성이 중요한 자였다.

친척조차 외면한 라비엘리 르휜이 거리로 내몰리게 생겼을 때, 테아노는 그녀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모두가 후작을 칭송했으나 사실 테아노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흣.”

가여운 라비엘리를 보살피는 척하다 때가 되면 아내로 맞이할 생각이었다.

물론 저택 내에서는 모두가 이미 그녀를 마이어가의 안주인으로 여겼다.

테아노 마이어는 낮에는 점잖은 신사였으나 해가 떨어지면 라비엘리의 침대 위로 은밀히 기어 올라갔다.

“굶어 죽기 싫다면 얌전히 따르는 게 좋을 거야.”

목에서 느껴진 뜨거운 기운에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불쾌한 기운 탓이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고른 이를 드러내곤 비실비실 웃고 있겠지.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감증인 라비엘리는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신께서 저를 불쌍히 여긴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신이 그녀에게 허락한 유일한 자비일 것이라고.

이 밤이 끝나길 간절히 바라며 라비엘리는 스스로를 놓아 버렸을 때였다.

“허억, 허억…….”

퉁겨지듯 일어나 눈을 떴을 때, 이미 주변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꿈이구나.’

라비엘리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쓸어 올리며 길게 숨을 토했다.

그녀는 종종 학대당하는 꿈을 꾸었다.

가학적인 행위를 강요받고 원치 않아도 다리를 벌리는 횟수가 늘어난 탓이다.

덕분에 깨어 있어도, 깨어 있지 않아도 라비엘리는 괴로웠다.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으나 쉽게 잠들 리 없다. 현실처럼 생생했던 지독한 꿈 때문이다.

라비엘리는 제 몸을 부정하려 팔과 다리를 마구 문질렀다.

‘싫어…….’

여러 번 뒤척이다 결국 몸을 세우자 희미한 촛불에 그녀 몸이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단번에 잠든 것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 일이다.

테아노의 저택에 들어온 이후 라비엘리는 끔찍한 불면증과 악몽, 그리고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것은 저택의 주인이 죽어야 끝나는 일이었기에 여기 말곤 갈 곳이 없는 그녀에겐 희망이 없었다.

평소엔 물안개가 낀 것처럼 정신이 뿌옇다가도 침대에 누우면 오히려 또렷해졌다.

그녀는 이것이 저택 곳곳에 남아 있는 테아노의 흔적 때문이라고 여겼다.

‘열이 있나.’

잠시 손님이 찾아왔을 때를 제외하곤 종일 방 안에만 있었는데, 몸살이 온 듯 온몸이 무거웠다.

마른 장작 같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그녀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네.”

라비엘리 역시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이 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올 이는 뻔했기에 목소리 끝이 떨리고 말았다.

분명 테아노 마이어일 것이다.

그러나 테아노여선 안 되기도 했다.

그는 엄연히 후견인인 데다 현재 제국은 로튼을 중심으로 금욕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제국은 새로운 성녀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 한 달간 이어지는 신성한 기도에 힘을 모으기 위해, 황제는 자작 이상의 귀족들에게 금욕령을 내렸다.

“라비엘리.”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온 건 역시 테아노였다.

그는 꽤 지친 얼굴로 라비엘리에게 다가왔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끌어왔어야 했다. 아니, 자는 척 연기라도 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돌아갈 테아노가 아니었지만.

“아직 안 자고 있었군요.”

“……네.”

테아노는 라비엘리의 침대 끝에 걸터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오늘 우리에게…… 뭐랄까, 뜻밖의 일이 있었죠.”

‘그 사기꾼 얘기를 하려는 걸까.’

라비엘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아이, 내 아들이라는 아이…… 신경 쓰지 말아요, 라비엘리.”

테아노는 평소엔 몹시 온화한 사내였다.

옆에 천둥이 내려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처럼,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물론 침대에선 예외였지만.

그런 그가 이런 식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으나 이제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싶었다.

테아노가 없으면 저택엔 낯선 이방인과 둘이 지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 사람을 받아주셨지요?”

라비엘리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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