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둠이 내린 밤, 사내는 밭은 숨을 내쉬고 있는 여인의 살갗을 어루만졌다.
“휴…….”
느릿하게 호흡하던 사내는 여인의 희고 말간 피부를 느끼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을 대하듯, 혹은 몹시 귀한 것을 어떻게 건드려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섬세하게.
분명 다정하지만 묘한 긴장감을 주는 손길이었다.
여인은 몸을 동그랗게 말며 루시안의 시선을 피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날 봐줘요.”
어둠 속, 사내의 눈빛은 어쩐지 맹수의 것처럼 요요한 빛을 띠었다.
“더는 숨기지 말아요.”
여인의 속내를 읽은 것인지 루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침대 시트에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사내의 손길이 닿은 손목이 뜨겁다.
온몸의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지만, 섣불리 호흡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해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끝이었다.
“…….”
나른히 이어지던 은근한 손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인은 어깨를 움츠리며 사내의 입술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성난 입술은 끝내 여인을 붙들었다.
“!”
기어이 그녀를 갖겠다는 듯 교묘하고 집요하게.
온몸에 잔뜩 힘을 준 탓에 어깨와 양쪽 팔뚝이 뻐근하고 아리다.
그러나 야릇한 감각에 이내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게 싫다면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요.”
축축한 사내의 음성이 여인에게 스며들었다.
“이러면 안 돼요, 제발.”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여인은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 괴로웠다.
다리를 오므려도, 아랫배에 바짝 힘을 주어도 어찌할 수 없었다.
“늦었어요. 이미.”
동시에 두 사람의 호흡이 뒤엉킨다. 그러나 여인은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기며 어떻게든 루시안을 벗어나려 했다.
“제발, 그만.”
“그러지 말아요, 날 그리워하고 있었잖아.”
“……아니, 아녜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루시안의 희고 고른 이가 슬쩍 보였다가 어둠 속에 묻혔다.
“이러지 말아요.”
여인은 목소리를 내면서도 행여 복도를 오가던 누군가가 제 목소리를 들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아래턱이 덜덜 떨리던 순간, 사내의 입술이 닿고 말았다.
“!”
놀란 마음에 숨을 몰아쉬었지만, 입술은 속절없이 벌어진다.
“루시안!”
여인은 그것만으로도 몸을 바르르 떨었다. 햇살보다 곱다 여겼던 회금발이 제 앞으로 쏟아지려는 순간이었다.
아래서 올려다본 루시안의 얼굴은 평소에 보던 것과는 몹시 달랐다.
피어난 홍조, 벌어진 입술과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게 뜨인 두 눈…….
루시안 역시 여인을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었다.
그동안 그녀를 생각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던 것을 떠올린다.
저를 밀어낼 때마다, 그러는 동시에 제 옆모습을 힐긋거릴 때마다 그녀를 끌어안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나날들을.
마음 같아선 그동안 참았던 것을 쏟아부어 한꺼번에 욱여넣고 싶었다.
그러나 함부로 그랬다가 여린 살점이 찢어질지도 모른다.
루시안은 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시작할게요.”
라비엘리는 이제 시작이라는 말에 그만 까무룩 정신을 놓을 뻔했다.
거친 호흡을 내뱉던 사내가 몸을 세우더니 여인을 똑바로 누였다.
여인은 이마에 들러붙은 금발을 손등으로 대충 쓸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비엘리 르휜.”
말갛게 빛나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구가 피어난다.
루시안은 이제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루시안 마이어.”
그녀의 음성에선 마른 장미 같은 향기가 난다.
“나의 라비엘리.”
흐릿하게 피어난 가녀린 여자의 미소를 완전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여인은, 오늘에야 비로소 그녀에게 억지로 씌워졌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직감했다.
* * *
루시안 마이어는 한 달 전 수도 로튼에 처음 왔다.
손에 굳게 쥔 단 하나의 목적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불분명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무척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몰았다.
말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로워 보였으나 정작 그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일주일간 달려온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고 아름다운 적갈색 눈은 앞을 막아선 대저택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옹골차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 잘 빚어 세운 콧대와 그 아래 놓인 선명한 빛깔의 입술까지.
그는 아마 저택에 들어선 순간, 크기만 컸을 뿐 평범했던 공간의 기운을 순식간에 바꿔놓을 것이다.
“이곳이 테아노 후작님의 저택 맞습니까?”
마구간에 말을 맨 뒤, 루시안은 곧바로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네, 맞습니다. 어떻게 오셨지요?”
저택에 들어서자 말끔한 차림의 신사가 응대했다.
루시안은 풋맨과 시선을 바로 맞추었다.
“테아노 후작께선 안에 계십니까?”
그러곤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아뇨, 지금 주인님께선 외출 중이십니다.”
문을 열기 전, 저택에 딸린 농장과 정원을 먼저 훑어본 루시안은 풋맨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농장과 정원은 몹시 훌륭했다.
마구간 안에는 살찐 말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수북하게 쌓인 여물을 한가롭게 씹고 있었다.
심지어 정원 뒤편 우리에는 관상용 공작새가 열댓 마리는 되어 보였다.
보통 약속 없이 방문객이 찾아왔을 때, 외출 중이라는 말로 피한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정말 테아노가 부재중이었다.
모든 것을 갖추었으나 저택의 주인이 타는 마차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예?”
풋맨은 루시안의 말에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찾아온 이 미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인 데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루시안은 제 미모를 관찰하느라 타이밍을 놓친 풋맨을 지나쳐서는 부드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야, 집이 무척 근사하군요.”
그는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닫지 않은 문을 슬쩍 쥔 채, 풋맨이 사내를 훑어보았다.
이대로 사내를 집안에 들이면 주인으로부터 어떤 꾸지람을 들을지 몰랐다.
2층 난간에 기대어 있던 라비엘리 르휜이 말소리에 고개를 돌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누구지?’
그때, 풋맨이 루시안을 살피며 다소 딱딱한 음성을 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버지를 뵈러 왔습니다.”
“뭐라고요?”
그 말에 입이 벌어지지 않은 건 어기적거리며 거실을 떠돌던 고양이뿐이었다.
“아버지요. 제 아버지, 테아노 마이어 후작을 찾아왔습니다.”
정작 저택에 냉수를 끼얹은 루시안만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놀란 라비엘리가 난간 뒤에서 그만 아, 하는 신음을 흘린 탓에 루시안의 턱이 곧장 하늘로 향했다.
‘말을 엿듣는 부주의한 암컷 고양이가 있군.’
라비엘리가 아차 싶어 마른 손으로 입을 가렸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제가 여러 명과 대화를 하고 있었나 봅니다.”
사내의 음성이 느릿하게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사용인 말고, 이곳의 주인과 이야기하고 싶군요.”
“…….”
라비엘리는 그저 호기심만 해결한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젠 완전히 모른 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곁에 서 있던 하녀를 한 번 힐긋거린 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게…… 말씀하시죠.”
라비엘리는 건조한 음성으로 낯선 사내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찬찬히 뜯어보면 그녀는 분명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희귀한 백금발에 선이 살아있는 오뚝한 코와 보들보들해 보이는 입술까지.
그러나 푸른색 눈동자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본래 뽀얗고 투명했을 피부는 핏기없이 창백하게 느껴졌다.
당장 바닥에 주저앉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앙상하게 마른 체형까지.
“조금 전 하신 말씀…… 대체 무슨 뜻이죠?”
라비엘리는 분명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만, 사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메마른 목소리였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루시안은 제가 던진 말의 무게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라비엘리에게 되물었다.
“그쪽은 제 여동생인가요?”
석상처럼 서 있던 라비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 그럼 사촌인가요?”
“아뇨.”
루시안은 단출한 가방을 흔들며 아예 응접실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래요? 그럼 이쯤에서 당신이 누군지 말해줄래요?”
손님은 분명 루시안인데, 그는 마치 집주인인 양 태연히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라비엘리는 한 손으로 제 가슴을 누르며 차분히 말했다.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했죠.”
“네.”
넓은 소파에 제 몸을 기대며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님께선 제 후견인이세요.”
“후견인?”
사내는 의아한 듯 그녀를 응시했다.
어려 보이긴 해도 스무 살은 넘어 보였다. 게다가 사지 멀쩡해 보이는 여인이 부모가 아닌 후견인과 함께 지낸다는 게 이상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바레쥬 천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장신구를 달았지만, 보석의 영롱함을 전부 가릴 정도로 라비엘리의 젊음은 빛이 났다.
“아, 그렇군요.”
루시안은 짤막하게 뱉은 대답과는 반대로 라비엘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쩌다 마이어가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 진짜 그녀의 부모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라비엘리는 오늘 처음 보는 사내에게 제 이야길 털어놓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이 어색하고 불편한 인사를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라비엘리는 손짓으로 하녀를 불렀다.
“메이지, 손님께 차를 내어 드려.”
“네.”
하녀 메이지는 라비엘리에게 대답하고는 루시안을 힐끗거렸다.
그녀는 오늘 들여온 미술품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상하네, 주인님과 조금도 닮지 않으셨는데.’
메이지가 주방으로 향했을 때, 라비엘리는 루시안을 지나쳐 다시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잠깐만요.”
치맛자락을 쥔 라비엘리를 돌려세운 건 사내의 청량한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