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결말은 언제나
‘그리하여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모든 동화의 결말이 그러하듯, 미아 역시 그렇게 적어 내렸다.
그러나 어쩐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저의 글씨를 내려다보고 있던 미아가 윗부분부터 천천히 내려 읽기 시작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선택한 삶 앞에서 늘 충실할 것.
둘의 다짐은 굳건했다.’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간질였다.
미아는 이제 이 정도 바람에는 추위를 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이 둘러준 숄을 끌어 올려 단단히 덮었다.
아직 남아있는 이안의 온기가 기분 좋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저 멀리서부터 토독토독 달려오는가 싶더니 그녀의 다리에 착 달라붙었다.
“엄마!”
“응. 우리 황태자 전하 오셨습니까.”
“뭐 하고 있었어?”
아이는 미아가 하고 있던 것을 보려는 듯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오르려 애썼다.
미아는 그런 아이를 위로 안아 올렸다.
그리고 제 무릎에 앉힌 채 쓰고 있던 글씨를 보여주었다.
“너, 너무 안 배운 글자가 많은데.”
“알아볼 수 있는 것만 읽어봐.”
“사랑, 사람…… 그, 그녀……. 아! 나 이건 알아요!”
아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이는 확신하는 얼굴로 마지막 줄을 읽어나갔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미아가 활짝 웃으며 그런 아이의 얼굴을 쓸어 올려주었다.
동화에서 많이 본 구절이라 그런지 아이는 마지막 줄 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누가 알려줬어?”
“아버지가.”
“그랬어?”
“응.”
며칠 이야기책을 완성한답시고 이안에게 아이를 맡겼더니, 잠들기 전 책을 읽어준 모양이었다.
정작 자신은 이야기책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이에겐 그렇게 읽어주고픈 마음이 드는지.
“이건 누구의 이야기야?”
“이건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
“응.”
“나도 읽어도 돼?”
“응. 나중에 읽어줘, 꼭.”
“응!”
아이는 활짝 웃었다.
그 해맑은 웃음을 보면 미아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해!’
아이가 태어난 것은 미아가 아이를 가진 지 고작 여덟달이 지났을 때였다.
조산의 기미가 보였던 미아는 최대한 분만을 늦추려 노력했지만, 결국 양수가 일찍 터졌다.
이안은 만사를 제쳐두고 미아를 보러 왔다.
베아트리체가 미아를 연거푸 찾았다.
난산이었다.
몇 번이나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미아는 저도 모르게 제 어머니를 찾았다.
‘응애!’
아이가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났을 때, 비로소 미아는 마음 편히 울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서신이 그녀에게 도착했다.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오해가 풀릴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으나, 다행히 가족은 무사할 수 있었다.
노아의 배려 덕분이었다.
이안은 노아에게 감사의 인사로 넉넉한 선물을 보냈고, 노아 역시 바트르 황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엄마, 꽃 보러 가요!”
아이는 미아의 손을 쥐어 끌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아가 아이와 발을 맞춰 걸으며 정원으로 향했다.
마침 꽃을 돌보고 있던 애니가 미아를 보고 반가운 듯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아 님! 아니, 황후 폐하. 오셨어요?”
“애니, 둘이 있을 땐 편하게 불러도 돼.”
“지금은 황태자 전하도 함께 계시잖아요. 황태자 전하, 그동안 강녕하셨어요?”
“강녕? 강녕이 뭐예요?”
“잘 지내셨냐는 뜻이다.”
이안은 막 정무를 마치고 온 듯 정복 차림으로 정원에 들어섰다.
미아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는지.
“아버지!”
아이가 이안에게로 달려들었다.
이안은 넘어진다고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다리를 꽉 끌어안는 아이를 그대로 안아올렸다.
“전혀 자라지 않았구나.”
“자랐어요. 이만큼이나요! 유모가 분명 자랐다고 말했는걸요.”
“유모는 거짓말쟁이구나.”
“아니에요!”
아이가 울상을 지어보였다.
미아는 짓궂은 이안을 타박하듯 어깨를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이안이 그제야 아이의 미간을 슬슬 쓸어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좀 자랐다.”
“정말이죠?”
“그래.”
아이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아이가 귀여운 듯 이안은 아이의 머리를 헝클이듯 쓸어주었다.
“결국 꽃을 피웠군.”
“그럼요 여기서도 피울 수 있는 꽃이 있을 거라 말했잖아요.”
“황후 폐하의 집념은 정말 대단해요. 그러지 않고서야 이 황량한 아이가 땅에 꽃을 피울 수는 없죠.”
“그래. 확실히, 집념은 대단하다.”
그들이 삶의 터전을 아이가로 옮긴지는 좀 되었다.
대신 황궁을 지키고 있는 것은 베아트리체였다.
이따금 두 곳을 오가며 이안은 정무를 보았고, 미아는 이안과 떨어져 있는 시간에 정원을 가꾸고 음식을 만들고 글을 썼다.
“그 대단한 집념으로 나를 살렸지.”
“이안 경의 대단한 사랑으로 제가 살았고요.”
“내가 사랑한다고 했던가?”
이안이 물었다.
미아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이안을 보았다.
이안은 그 모습이 귀여운 듯 낮게 웃었다.
“그래. 사랑한다고 했지, 분명히.”
❀ ❀ ❀
아름다운 황혼이 깔렸다.
창밖으로 깔리는 아름다운 황혼을 창가에 선 채 응시하던 미아가 제게 다가온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미아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이안의 숨결이 그녀를 간질였다.
“하지 마요, 간지러워.”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정원에 오래 있으면, 꼭 꽃의 향이 묻어나요. 그래서 좋아.”
“네가 꽃이지.”
이안의 낯간지러운 말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누가 알았겠어.
차갑기만 하던 그가,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사내가 될 줄.
미아가 손을 뻗어 이안의 뺨을 쓸었다.
이안이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안 돼요. 곧 황태자 전하가 오실 거예요.”
“아이도 부모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랑 말고요.”
“이런 사랑과 저런 사랑은 다르지 않다.”
이안이 미아를 안아올렸다.
꺄아, 소리와 함께 버둥이던 미아가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앉았다.
이안이 미아의 위로 상체를 숙이며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미아는 그런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선 속삭였다.
“고마워요.”
“무엇이.”
“나를 살려주어서. 그 차디찬 눈발 속에서 죽지 않게 해주어서. 사랑하고, 사랑 받는 기쁨을 알게 해주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도 원망 없이 그런 말을 하는 여자는 너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고비들이 사랑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었잖아요.”
“앞으로 무슨 고비가 찾아와도 같이 넘길 수 있겠어?”
“물론이죠.”
“아이를 다시 낳아야 한다 해도?”
이안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미아는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 미아의 목덜미에 이안이 입술을 묻었다.
곧 달뜬 신음이 그녀의 입술 새로 샜다.
❀ ❀ ❀
이건 미아는 모르는 이야기다.
이안이 그녀에게 들려주지 않은, 어쩌면 앞으로도 들려주지 않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둘이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그날, 식사 자리에서가 아니었다.
‘어머, 어쩌면 좋아요. 제가 잠시 한눈파는 사이 이게 다 타버렸어요.’
울상을 짓는 시중은 아무리 많이 쳐봤자 열여섯이 되어 보이는 앳된 아이였다.
미아는 혼나겠다며 덜덜 떠는 시중을 앞에 두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곧장 두 팔을 걷어붙였다.
재료를 직접 따겠다며 나무를 오르는 미아의 모습은 천방지축 그 자체였다.
달브 황국에 방문한 지 이틀째.
특별할 것 없는 여행과 오고가는 입에 발린 소리들에 질려가던 이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런 그녀였다.
“내가 떨어뜨릴 테니까 받아.”
“조심하세요, 전하!”
전하?
지금 나무의 열매를 직접 따고 있는 것이 황족이라고?
그게 아니면…….
이안은 고개를 기울인 채 기묘한 풍경을 보았다.
드레스를 걷어붙인 채 사과를 아래로 떨궈주는 여자와 그 사과를 조심히 받아 챙기는 소녀의 모습을.
“여기서 무얼 하고 계세요?”
올리비아가 다가와 물었으나, 이안은 답이 없었다.
이안의 시선은 온통 저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어머, 교양 없긴.”
올리비아는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알이 좋아 보이는 사과로 골라 따던 여자는 이제 된 것 같다는 시중의 말에 씨익 웃어 보였다.
찬란한 햇빛을 받은 그 얼굴이 어찌나 순진하고 맑아 보이던지.
이안은 지금껏 제가 본 적 없는 여자의 모습에 당황해 말을 잃었다.
“어, 어어. 어떡하지?”
“왜요?”
“나…… 못 내려가겠어.”
“네에?”
문제는 미아가 나무를 탈 줄만 알고 내려올 줄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나무를 탔던 기억은 있었지만, 내려온 기억은 없었다.
그제야 미아는 깨달았다.
늘 이런 식으로 내려오질 못해 오빠나 아빠가 받아주었다는걸.
미아가 매달린 나무는 제법 높았다.
“어, 어째요!”
“치, 침착해! 나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이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가냘픈 팔로 버텨봤자 얼마나 버티겠는가.
힘이 빠지는지 미아의 몸이 눈에 띄게 처지는 것이 보였다.
“사, 사다리! 그래. 사다리를 좀 가져다줄래!”
“잠시만요.”
이안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다리를 챙겨보겠다며 급하게 뛰어가는 아이가 그의 곁을 지나쳤다.
이안이 나무 아래에 서자, 힘에 부친 미아가 다리를 버둥이는 것이 보였다.
저러다 떨어지겠군.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아!”
미아가 나뭇가지를 놓쳤다.
그대로 추락하는 그녀의 몸을 이안이 받아냈다.
미아는 바닥으로 떨어질 줄 알았는지 눈을 질끈 감은 상태였다.
뜨지 않으려나?
일 초, 이 초, 삼 초.
시간이 흘렀다.
이안은 그 사이 미아의 얼굴을 낱낱이 살폈다.
평범한 이 얼굴이 왜 이렇게 빛나 보였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어라……?”
미아는 푹신한 감촉에 당황한 듯 중얼거리다 슬쩍 눈을 떴다.
이안은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이안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이제 막 알아본 참이었다.
처음 자신이 달브 황궁으로 들어설 때 보았던 여자.
황태자라는 맹하게 생긴 남자 옆에 서 있던 여자.
황태자비, 미아였다.
걷는 내내,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뒷모습에 향해 있다는 것을 의식한 이안은 제 심장이 이리 쿵쿵 뛰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아직 몰랐다.
完
[itera공금]
Title by. m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