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재판
“보아하니 네가 리지군.”
“아저씨는 누구예요.”
“아저씨?”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리지는 그런 이안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제 뺨을 부풀리고선 그의 이마를 꾸욱 손으로 눌렀다.
“리지, 버릇없게 굴지 마.”
“아니에요. 먼저 이안 경이 잘못했는걸요.”
“내가?”
이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아를 보며 물었다.
미아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저녁 식사를 위해 준비한 음식들을 테이블로 옮겼다.
미아의 모습에서 고생한 티가 나자, 리지의 엄마는 이안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애 아빠는 이 사람이라는 거지.”
“나다.”
“인물만 훤한 것 같은데.”
“내가 누군 줄 알면 그 말을 한 오늘을 후회하게 될 텐데.”
“왜. 황제라도 되시나?”
이안은 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이안이 속상해하는 것을 느낀 미아가 웃음을 꾹 참으며 테이블 아래로 그의 허벅지를 쓸어주었다.
리지는 작은 입술로 수프와 빵을 오물오물 씹으며 미아와 이안을 번갈아 보았다.
“언니.”
“응.”
“언니네 왕자님이 이 아저씨예요?”
“음, 뭐. 그런 셈이지?”
“그럼 이 아저씨의 공주님은 언니고요?”
“글쎄. 그런가요. 이안 경?”
“아니.”
이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리지가 금방이라도 울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이안은 그런 리지를 보고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여왕이다.”
“여왕이요.”
“그래. 여왕.”
“……와아.”
뒤늦게 의미를 이해한 듯 리지가 활짝 웃었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그런 리지의 웃음을 빤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예뻤다.
아이에 대한 별 감상이 없던 그였지만, 막상 보대끼고 겪어보니 아이는 투명하고 변화무쌍했다.
용감하면서도 겁이 많고, 씩씩하면서도 유약했다.
그 모순이 주는 사랑스러움은 아이들이 가진 특별함이었다.
“봐요. 내가 엄청 예쁘댔죠.”
“…….”
미아가 작게 이안에게 중얼거렸다.
이안은 차마 부인하지 못하고선, 제 남은 단추를 다 뜯어냈다.
이러다간 돌아갈 여비도 몽땅 털어줄 기세였다.
“자. 이거 받아라.”
“이게 뭐예요?”
“나중에 위험한 일이 생기거든 나를 찾아.”
“아저씨를요?”
“응.”
“위험한 일이 없어도 찾아. 언제든 놀러와. 어딜 가든, 꼭 그곳이 어딘지 알리는 서신을 보낼게.”
“이거, 진짜 금이야?”
리지의 손바닥 위에 놓인 금단추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리지의 엄마가 눈을 크게 떴다.
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지 엄마의 눈빛이 달라지더니, 이안의 앞으로 고기가 떠밀렸다.
이안은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제 면을 세웠다.
미아에게는 그 모든 모습이 그저 귀엽기만 했다.
“갈 길이 멀어서 이만 갈게요.”
“자고 가면 좋을 텐데.”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
“그래. 다음에 꼭 만나자.”
리지는 미아와 이안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안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이안 경, 아이 좋아하시네요.”
“아이가 좋은 게 아니라.”
“리지가 좋다고요?”
“…….”
둘은 한참 리지의 이야기를 했다.
주로 떠드는 쪽은 미아였지만, 이안은 재잘거리는 미아의 말을 전부 호응해주며 경청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날이 어둑해질 때 즈음이었다.
“저, 저 사람들 설마.”
미아가 익숙해 보이는 깃발을 발견하고는 이안의 팔을 쥐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미아를 제 품으로 숨겼다.
그래, 저 깃발은 바트르 황국의 깃발이었다.
그 깃발을 내걸고 있는 기사 중 몇은 이안이 아는 얼굴이었다.
즉, 윌리엄이 보낸 자들임을 뜻했다.
‘너는 처음부터 부정하게 황제가 되었다. 돌아가서는 반역자로 재판을 받고 죽는 것만이 남아있단 말이다.’
만약 이 의견이 현재 바트르 황국에 우세한 상황이라면, 윌리엄은 이안이 재판대에 오르는 것 역시 거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즉, 이안을 죽이는 것이 이들의 목적일 터였다.
불안함이 담긴 눈빛이 된 미아를 돌아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들킬 일, 기왕이면 미아를 덜 고생시키는 편이 나았다.
“가자.”
“이안 경, 지금 이들 앞에 가는 건…….”
“걱정 마.”
이안은 미아를 안심시키듯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근처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초상화를 보여주고 있는 기사 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이안이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멍하니 돌아본 기사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입을 헥 하고 벌렸다.
그리고 다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를 찾는 건가.”
“이, 이안 경을 찾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듯 기사가 소리를 지르자, 근처에 퍼져 있던 기사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런 기사들을 보며 검을 빼어들었다.
“저…… 저희는 바트르 황국에 돌아가려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길을 좀 터주세요.”
“황명을 받았습니다. 두 분의 목숨을 그 자리에서, 앗아가라는 황명을요.”
“그래?”
이안이 묻자 기사는 눈을 깔았다.
한때나마 저를 직접 통솔했던 황제였다.
이안 앞에만 서면 몸이 절로 굳는 경험을 모두 한 번쯤은 거쳤을 터였다.
아무도 쉬이 이안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던 때였다.
이안은 윌리엄이 고작 이런 사람들을 저를 죽이라 보냈나 싶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죽이지 않고 뭐 하는 거냐.”
“그, 그럼. 공격하겠습니다.”
싸움에서는 기세가 중요한 법이다.
기세를 점령당한 기사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안은 그들을 하나씩 제압해나가면서, 손수 훈수를 두기까지 했다.
몸이 너무 무겁다는둥, 그렇게 해서 누굴 베겠냐는둥.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기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는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마차 하나가 그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만!”
미아는 걱정 어린 얼굴로 이안을 보던 것도 잠시, 다가오는 마차의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보였다.
“황태후 전하!”
미아가 베아트리체를 보고 반갑다는 듯 뛰어가자 곧 마차의 문이 열렸다.
베아트리체의 등장 때문일까 모든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머뭇거리다 일제히 인사를 올리는 그들을 지나친 베아트리체는 미아와 이안 앞에 섰다.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있는 두 사람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황제께서 명을 철회하셨다.”
“황명을요?”
“무사히 귀환시키라는 명이시다.”
“저, 정말입니까?”
기사 중 하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베아트리체가 황제의 도장이 찍힌 종이를 들어 보였다.
베아트리체의 말이 사실임을 인지한 기사들은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은 미아가 베아트리체를 보자, 베아트리체가 미아를 끌어당겨 안았다.
❀ ❀ ❀
“미아, 무사했구나. 걱정했단다.”
“전하, 전하를 이리 다시 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미아는 안도하듯 말했다.
미아와 베아트리체, 이안을 태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충분히 겨뤄 이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풀 기회를 잃은 것에 대해 내심 아쉬운 눈치였다.
미아는 그런 이안을 밉지 않게 흘겨보던 시선을 거뒀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게 말이다.”
베아트리체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귀족들은 이안이 선황제를 죽였다는 레이디 데드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윌리엄은 여론이 저를 돕지 않자 조바심이 든 나머지,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바로 올리비아에게 연락을 취하려 한 것이다.
문제는 올리비아가 바트르로 향하는 대신 카일렌을 찾기 위해 발길을 돌렸고, 달브에 도착한 서신을 받은 사람은 노아였다.
‘미아를 죽이려 한 것은 올리비아와 윌리엄 다르뷔입니다.’
이 사실을 묵과할 수 없었던 노아는 베아트리체에게 서신을 보냈다.
아무리 자신의 품을 떠난 미아라지만, 목숨을 노리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베아트리체는 그 서신을 확인한 후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식으로 이 문제를 대두시켰다.
간악한 자, 착한 줄 알았더니 전부 거짓이었던 자.
순식간에 윌리엄은 그런 평을 받는 황제가 되었다.
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술렁이는 귀족들의 반응을 보자, 베아트리체는 한발 더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이안이 선황제를 죽였다 주장하는 것 역시 그의 형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황제로서 그는 신실하지 못합니다. 이러다간 신이 벌을 내릴까 두렵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마침 이안이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소문이 돌자, 모두 압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안이 돌아와서 벌어질 일이 두려워진 것이다.
레이디 데드가 제시한 서신 속 필체가 선황제의 것과 묘하게 다르다는 의견도 새어나왔다.
오랜 시간 선황제를 보필했던 수석의 눈엔 틀린 부분이 보였다.
그러자 모두 이안을 불러들여서 자초지종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내린 황명을 거둬들여야 했다.
만약 이런 순간에 이안이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리면, 자신의 자질 역시 의심받을 것이 분명했다.
베아트리체의 이야기를 듣던 미아는 그녀의 혜안에 감탄했다.
베아트리체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어머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자신은 그것을 미아를 보고 배웠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 ❀ ❀
“형은 분명 아버지가 죽던 날,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본 사람이야. 그렇지?”
윌리엄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안을 추궁했다.
이안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런 윌리엄을 마주 보았다.
“그때 아버지와 형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아버지는 늘 형의 자질을 의심했어. 그렇지 않아?”
“그래, 네 말이 옳아.”
“대체 그때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나눴던 거야?”
미아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옆자리에 앉은 신시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미아가 그런 신시아에게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해보였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냐고 물었어.”
“무엇이든?”
“그게 설령 누군가를 해하는 일이라 해도 할 수 있느냐 물었지.”
“설마 아버지를 그래서…….”
“내 말끝까지 들어.”
이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윌리엄을 마주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나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어.”
“…….”
“하지만 황태자로는 인정하셨지. 왜?”
“…….”
“난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했으니까. 그리고 어머니의 뜻을 끝까지 따랐으니까.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것이 곧 아버지의 뜻임을 알았으니까.”
“뭐?”
“그러니 생각해 봐. 돌아가신 선황제 폐하께서 너를 보고 얼마나 슬퍼하실지.”
이안의 말에 윌리엄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안은 그런 윌리엄을 위로하듯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다 레이디 데드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레이디 데드 앞에 놓인 종이를 들었다.
“이 서신, 언제 받으셨습니까.”
“뭐? 그걸 왜 갑자기…….”
“선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셨던 해엔 날이 가물어 비다수들이 잇따라 말라 죽었습니다.”
“그 얘기를 왜 꺼내.”
“이 종이는 비다수, 그것도 싱싱한 비다수를 눌러 만들어낸 종이입니다. 원하신다면 감정을 의뢰해도 좋습니다.”
“……!”
귀족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레이디 데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떨었다.
패배를 직감한 윌리엄의 다리가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