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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심판과 응징 (93/95)

93화. 심판과 응징



 

설마 카일렌을 찾아간 걸까.

결국 혼자서라도 그를 이겨내려고?

미아의 마음에 불안함이 퍼져나갔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니, 밤 늦게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연락이 들려왔다.

그럼 미아를 재운 다음에 곧장 자리를 뜬 것일까.

그 늦은 밤에 대체 어디를 향했다는 건가.

미아의 시선이 불안하게 사위를 훑었다.

사람들은 이런 미아의 마음도 모른 채 저들끼리 나와 활동을 시작하기에 바빴다.

거리를 지나다니고 아침을 먹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틈에서 헤매던 미아가 카일렌이 머물고 있다는 처소로 향했다.

“미아 님!”

기사 중 하나가 그런 미아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미아는 어쩐지 낯익은 기사를 보자 안도감이 들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혹시 카일렌 전하 어딨어요?”

“예? 전하요? 지금 뵙게요?”

“응. 지금 뵈어야 해요, 얼른요.”

“지금은 좀 곤란한데…….”

“왜요? 누구랑 있어요?”

“그게.”

말끝을 흐리는 기사의 태도에 미아는 이안이 카일렌을 보러 벌써 왔음을 직감했다.

기사를 붙들고 몇 번이나 되묻자 기사가 할 수 없다는 듯 카일렌이 머물고 있는 여관의 꼭대기 층을 가리켰다.

미아가 걸음을 옮겨 여관 안으로 향했다.

가파른 계단도 순식간에 오른 그녀가 마주한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오고 가는 것이 들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옵니까, 오길!”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만 두고 떠난 거예요? 생각이 있긴 한 거예요?”

“내가 그대를 왜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는 부부잖아요! 설마 그 사실을 잊기라도 한 건 아니죠.”

“우리는 허울만 부부입니다. 알잖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올리비아와 카일렌이었다.

두 사람은 앙숙처럼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난 것 같은 목소리로 서로에게 날이 선 단어들을 내뱉고 있었다.

미아는 졸지에 부부싸움의 목격자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그들의 시선이 열린 문틈 사이를 향할 것만 같았다.

어쨌든 이안은 여기 없었다.

그럼 대체 어디를 갔단 말인가.

설마.

‘내일 아침, 미아를 두고 깨끗하게 떠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릴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그 말을 듣고 정말 자신을 떠났을까.

아니, 이안이 그럴 리 없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었다면 미아가 이렇게 이안을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 대체 어디로…….

“당신같이 징그러운 여자는 정말 질색입니다.”

“징그럽다고요? 내가요?”

“그래요. 당신의 그 야망이 당신을 좀 먹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로 남자 좀 꼬여냈다고, 뭐라도 된 줄 착각하는 모양인데. 당신이 가진 거라곤 추악한 내면뿐입니다.”

“언제는 그 얼굴에 속아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처럼 굴었으면서 이제 와 뭐요?”

“그래. 내 잘못이지. 당신을 만나면 내가 처한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어리석은 내 잘못이고 과오야!”

“이제 와 후회하면 뭐 해요. 당신은 평생 날 견뎌야 해! 그게 황제가 당신에게 내린 벌이니까.”

“감히 아버지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세요. 미아를 죽이려 한 그 더러운 몸뚱아리에 담지 말란 말입니다!”

뭐?

나를 죽이려 해?

미아는 순간 몸이 굳었다.

“안 죽었잖아요!”

“죽길 바라고 한 행동이라는 사실이 달라집니까? 윌리엄 황제와 짜고 발코니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했던 사실이 사라지냐는 말입니다.”

쿵.

미아는 순간 제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맞아.

누군가 자신을 발코니에서 분명 떠밀었다.

그 여자, 자신을 아래로 떠민 여자는 다름 아닌 올리비아였다.

아이가 있는 미아를 사지로 떠민 것이 올리비아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미아의 다리가 자연히 움직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올리비아와 카일렌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미아는 성큼성큼 올리비아에게 다가서는가 싶더니.

짝!

하고 미련 없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올리비아가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미아를 보자, 미아는 다시 손을 들어 이번에는 그녀의 반대편 뺨을 내리쳤다.

“이, 이게 뭐 하는…….”

“왜요. 아파요?”

“미쳤어? 감히 누구 뺨을.”

“나는 죽이려 해놓고 고작 뺨 몇 대 맞은 게 서러워?”

미아의 물음에 올리비아의 입술이 떨렸다.

그러나 쉽게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대거리라도 하려는 듯 올리비아가 미아에게 달려들자, 카일렌이 그 앞을 막았다.

“미아, 방금 들은 건…….”

“카일렌, 당신도 똑같아요.”

“미아, 그게 아닙니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뻔히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그냥 두었어요?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건, 당연히 벌주려 했습니다. 이안의 약점만 알아내면, 그러면…….”

미아는 기가 찼다.

아무리 사람이 변한다지만, 카일렌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당신이란 남자는 아이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미아, 그게 아닙니다.”

차갑게 내뱉고 돌아서는 미아를 가로막은 것은 기사였다.

기사는 뛰어온 듯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이안, 이안 경이 왔습니다!”

❀ ❀ ❀

“어디를 가든 그대가 있군.”

이안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선 미아를 보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미아를 반가워했을 그였지만, 카일렌을 찾아온 것을 보고도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어찌 됐든 홀로 카일렌을 찾아왔으니, 카일렌은 이를 저에 대한 도발로 받아들일 터였다.

“돌아가요, 이안 경.”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얼굴이 그 모양이지, 미아.”

“그건…… 지금 나누기엔 적절한 얘기가 아니에요.”

진상을 알면 올리비아든, 카일렌이든 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 말할 수는 없었다.

카일렌은 오히려 이안이 온 것이 반갑다는 듯 웃었다.

드디어 이안을 무릎 꿇릴 수 있었다.

처치할 수 있었다.

“제 발로 호랑이 굴을 찾아오셨군요, 이안 경.”

“호랑이에게 무례한 발언이군.”

“그 여유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볼까요.”

카일렌은 기사에게 눈짓했다.

기사가 머뭇거리며 칼을 빼내 이안에게 다가올 때였다.

이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카일렌에게 던졌다.

카일렌은 제 발치에 떨어진 서신을 주워들었다.

“……!”

카일렌의 얼굴이 굳었다.

이안은 그런 카일렌을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된 것을 축하합니다, 카일렌 경.”

“……뭐라고요?”

뒤편에 서 있던 올리비아가 이안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들을 에워싼 기사들 역시 주춤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폐위? 술렁이는 분위기에도 카일렌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노아가 보낸 서신에도 확실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너는 더 이상 황태자가 아니다. 지원군을 동원해 고작 네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으니, 그 어리석음은 돌이킬 길이 없다.’

“이 기사들 역시 그대로 돌려보내야 할 터입니다.”

“이, 이 서신을 네가 왜.”

“그야, 만났기 때문이죠.”

“누구를.”

“나를.”

우람한 발소리가 들렸다.

미아가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제이슨……?”

카일렌의 형인 제이슨은 미아를 알아본 듯 눈짓했다.

미아는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제이슨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제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기사들을 지나쳐 들어오더니, 카일렌의 앞에 섰다.

카일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혀, 형이 여길 왜.”

“그러게. 내가 왜 여기 왔을까.”

“…….”

“그러니까 잘 좀 하지 그랬어, 아우야. 네가 잘만 했어도, 형이 이렇게 찾아올 일은 없었잖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이해를 하지 못한 미아가 의아한 얼굴로 카일렌과 제이슨을 번갈아 보았다.

이안은 그런 미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가 미아의 귀에 속삭였다.

“봐. 그대의 남자는 절대 지지 않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미아의 물음에 이안은 그저 미소로 답하며 그녀의 귓바퀴에 짧게 입을 맞췄다가 뗐다.

제이슨은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은 결심으로 지원군으로 나선 그대들의 노고를 황제 폐하는 높이 받들었다. 그대들의 용기를 우습게 안 황태자 카일렌을 나 제이슨이, 황제의 이름으로 폐위한다.”

“우, 웃기지 마! 갑자기 아버지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셨을 리 없어.”

“이안 경. 서신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분명 똑바로 전해야 한다 말씀 드렸을 텐데요.”

제이슨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이안은 손을 들어 카일렌의 손을 가리켰다.

카일렌은 제 손에 들린 서신을 구겼다.

“이깟 서신, 형이 꾸며내면 그만이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아우야, 내가 너라면 좀 더 현명하게 굴겠어.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살살 기는 거. 한 평생을 그렇게 기면서 자리를 연명했으면, 끝까지 그렇게 했어야지.”

“…….”

카일렌의 손이 분노로 떨렸다.

제이슨은 그런 카일렌을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기사들은 당장 죄인인 카일렌을 포박하라.”

기사들이 일제히 카일렌에게 몰려들었다.

카일렌은 반항할 용기조차 들지 않은 듯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카일렌을 보며 슬슬 도망갈 구멍을 찾던 올리비아는 제 앞을 막아선 기사 하나에 놀라 몸을 떨었다.

“어디 가십니까. 황태자비 전하.”

“우, 우리는 진짜 부부가 아니에요! 허울뿐인 부부라고요!”

“부부는 운명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선 따라오시죠. 미아 양을 위험에 빠뜨린 죄는 천천히 묻겠습니다.”

“그, 그걸 어떻게 알고.”

하얗게 질린 올리비아가 끌려가는 모습을 본 미아는 그제야 안도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이 휘리릭 지나갔다.

이안은 그 밤에 은밀히 제이슨을 만나러 향한 것이었다.

어떻게 알고 그랬을까.

어떻게 또 이 위기를 헤쳐나갈 생각을 했을까.

“정말이지. 그대는 눈만 떼면 사라지는군.”

“누가 할 소리를요.”

“아무리 그렇다고 여길 직접 와?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안 무서워요. 내가 이겨요.”

“그대가?”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아의 얼굴을 마주했다.

미아는 그런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었다.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 벌이지 마요.”

“그대가 내 곁에만 있겠다 약속하면.”

“약속할게요.”

“그래. 그럼 됐어.”

“이제 남은 건…….”

“우리의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일이다.”

이안의 말에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앞에 놓인 마지막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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