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최후의 선택
미아의 눈물이 뺨을 타고 끊임없이 흘렀다.
입술이 맞닿고 나서야 비로소 정말 이안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 탓이다.
미아를 달래듯 혀로 입술을 훑어주고 안을 헤집던 이안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닦아내었다.
눈물이 그렁한 눈을 하고 자신을 보는 미아는 이런 순간에도 빌어먹게 사랑스러웠다.
그가 바랐던 것, 그가 오로지 꿈꿨던 것.
그런 그녀가 그의 앞에 있었다.
처음에는 살 용기조차 못 냈던 사람이, 모든 것을 잃었다 포기하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보다도 강해져서 저를 이렇게 찾으러 왔다.
그 용기가 가상하고 애틋해서, 이안은 미아의 입술을 다시 찾아 물었다.
몇 번이나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 사이로 해가 졌다.
“……이제 우리 돌아갈 수 있는 거죠?”
이안은 걸을 수 있다는 미아를 극구 등에 없었다.
미아가 이안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고서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은데.”
“어디든 당신과 있으면 좋아요.”
“어디든 데려다주겠다. 갖고 싶은 게 무엇이든 손에 쥐여주고, 먹고 싶은 건 무엇이든 입에 넣어줄 거야.”
“혼인 전에 하셔야 할 말을 지금 하시네요.”
“혼인하자마자 긴 잠에 든 신부는 어떻고.”
“그런 신부를 혼자 두고 떠난 신랑은 어떻고요.”
미아는 이제 지지 않았다.
이안의 입꼬리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두 사람이 머물만한 곳을 찾는 이안의 시선이 분주하던 때였다.
“저게 다 뭐야?”
“지원군이래.”
“전쟁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에그, 적장의 목만 베었다고 전쟁이 끝이 나나. 적들이 물러가야 끝이 나는 거지.”
“근데 어디서 왔는데?”
“저 멀리, 어디더라. 그래. 달브에서 왔다던데?”
“달브?”
순간, 이안이 우뚝 걸음을 멈춰섰다.
달브에서 지원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은 저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보내는 이유는 뻔했다.
미아를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이안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카일렌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것이었다.
미아 역시 지나가는 행인의 말소리를 들은 듯 몸이 경직되었다.
카일렌이 기어코 일을 벌이는구나.
기어코, 두 사람을 떼놓겠답시고 병력까지 동원해.
그녀는 이제 와 그가 이러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사랑이 아니었다.
집착이었다.
“저희 숨는 게 좋겠어요. 제가 봐둔 곳이 있긴 한데…….”
“봐둔 곳?”
“산을 넘어가지 않고도 갈 수 있다고 들었어요. 저를 도와주신 분들에게 은혜도 갚을 겸, 다시 찾았으면 해요. 괜찮으시다면요.”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리지였다.
적어도 리지의 가족이 있는 곳은 분쟁지역이 아니니 안전할 터였다.
이안은 그녀의 말에 알겠다 답한 뒤 방향을 틀었다.
미아는 이제 걸을 수 있다며 내려달라 재촉했지만, 이안은 끄떡 없었다.
“업힌 게 싫으면 안아줄 수도 있다.”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아니면.”
“그게 아니라……. 이안 경 힘들어요. 저 무거워요.”
“그새 더 야위었다.”
“아무리 야위었어도, 전쟁을 이제 마치고 온 이안 경께 업힐 만큼은 아니에요.”
“쉿. 시끄러워. 눈을 좀 붙여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이안은 밤이 새도록 그녀를 업고 걸을 셈이었다.
미아는 그런 그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몇 번을 버둥여도 타격 하나 없는 그에 하는 수 없이 목을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선선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해쳤다.
깜빡 졸았던 미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수상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너울거릴 때였다.
“……이안 경?”
“깼나.”
“무슨 일이에요?”
이안은 제 앞에 선 카일렌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이 묻은 눈을 비비던 미아도 뒤늦게 카일렌을 발견하고 몸이 굳었다.
이안은 천천히 미아를 아래로 내려주었다.
“여길 어떻게 알고, 당신이…….”
“당신을 닮아 귀엽고 예쁜 아이가 알려주더군. 이름이 리지랬나.”
“리지를 어쨌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미아. 난 그저 당신에 관한 얘기를 들은 것 같아 되물었을 뿐입니다. 내가 아이의 아빠인데,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고.”
“그런 비겁한 짓을!”
“무엇이 비겁하다는 겁니까. 난 정말 아이의 아빠인데.”
미아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카일렌을 노려보았다.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미아에 카일렌은 마음이 상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차피 조금 지나면 그녀는 그의 것이 된다.
이걸 바랐다.
지원 병력이랍시고 동원한 기사들은 실상 이안을 처리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아의 앞에서 가장 굴욕적으로 이안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무릎 꿇게 만들고 싶었다.
“안타깝군.”
“뭐?”
“여인의 마음 하나를 붙잡지 못해 군사까지 동원하다니.”
“…….”
그러나 이 순간에도 이안은 태연했다.
당장이라도 이안의 멱살을 쥐고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카일렌은 겨우 내리눌렀다.
이안은 카일렌을 비웃듯 작게 조소하며 미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미아는 이미 날 선택했다. 그 사실을 이렇게 받아들이지 못해서야.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과 다를 것이 없군.”
“뭐가 어쩌고 어째?”
“카일렌 전하. 제발 그만 해요. 제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설령 저를 억지로 데려가신다고 한들, 제 껍데기만 데리고 사는 것이에요. 제 마음은 언제나 이안 경과 함께 있을 테니까요. 굳이 그러고 싶으세요? 그렇게까지 저를 원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아이는!”
카일렌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그가 매달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아이 하나뿐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미아가 낳은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이 아이는 제 아이예요.”
“내 아이이기도 하잖습니까, 미아.”
“제 배에서 제가 길렀고, 제 배 아파 낳을 것입니다. 아이는 제가 바르게 키우겠습니다.”
“그대는 아이에게서 지금 무슨 기회를 빼앗는 것인 줄은 압니까?”
“설령 아이가 그 자리를 원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이리 명예롭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알면 더 괴로워할 뿐일 겁니다.”
지금 폐위된 폭군을 두고 나를, 명예롭지 못한 자라고 칭하는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카일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몸을 움찔한 미아가 눈을 감자, 이안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카일렌의 어깨를 뒤로 밀쳤다.
“더 이상의 무례는 참지 않겠다.”
“누가 누구에게 무례. 아무것도 아닌 네가, 감히 나에게?”
“미아의 마음을 얻었으니, 그걸로 충분한데.”
“그래서 어디로 돌아가려고. 돌아갈 곳도 없는 주제에.”
“바트르로 돌아갈 것이다. 공을 세웠으니…….”
“미아 양은 압니까? 이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라는 것을?”
아버지를 죽였다니.
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물론 이안이 실제로 그랬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카일렌이 이렇게 확신을 갖고 말하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이안의 미간 역시 찌푸려 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다 들통났어, 네 거짓말! 너는 처음부터 부정하게 황제가 되었다. 돌아가서는 반역자로 재판을 받고 죽는 것만이 남아있단 말이다.”
“윌리엄이 그랬나?”
“레이디 데드가 증언했어! 당신의 할머니지. 오죽했으면, 제 손자를 버릴까.”
윌리엄에 레이디 데드.
더 듣지 않아도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윌리엄, 이 비겁한 새끼.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미아를 데리고 무사히 귀환하려고 했던 그의 꿈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당신에겐 답이 없어, 이안. 그저 파멸만이 남았다. 그러니 그녀를 내게 넘기는 것이 당신에게도 좋은 일임을 알 수 있을 거야.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다면, 개처럼 기어보란 말이야. 내 앞에서.”
카일렌은 거의 발악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이안과 미아 둘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사들도 알 수 있었다.
사기가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적어도 대의를 위해 출정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내일까지 시간을 주겠어. 최후의 통첩이다. 내일 아침, 미아를 두고 깨끗하게 떠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릴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카일렌!”
미아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불렀다.
그러나 카일렌은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다른 이를 살리고자 저를 원망하는 미아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멀어지는 카일렌의 뒷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한 듯 주저앉는 미아에게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이안 경…….”
❀ ❀ ❀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뒤척이는 미아를 바라보던 이안이 품으로 들어오라는 듯 팔을 벌렸다.
겨우 여관을 찾아 들어온 뒤 미아와 이안은 함께 몸을 씻었다.
엉망이 된 드레스 대신 미아는 여관에서 일하는 아이의 옷을 사 입었다.
이안은 그 값으로 제 단추 하나를 더 떼어주었다.
너무 큰 값에 여관 주인은 저녁까지 든든히 챙겨주었으나, 미아는 거의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이안 경, 괜찮을까요?”
미아가 근심어린 표정을 하며 이안의 품을 찾았다.
이안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는가.”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안 경이 다칠까 걱정되는 것뿐이에요.”
“전쟁터에서도 살아 돌아온 나다.”
“이건 전쟁이 아니잖아요.”
“다를 것 없는 싸움이지.”
“싸우는 건 안 돼요. 그 기사들의 실력, 훌륭해요. 이안 경의 실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혼자서 그들을 상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아요.”
“어려운 일도 해내는 게 나다.”
“이안 경!”
이안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미아의 입술을 찾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미아가 그를 다그치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쏠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잔소리가 늘었군, 못 본 사이.”
“이게 어떻게 잔소리예요. 애정 어린 걱정이지.”
“원래 잔소리하는 부모들이 다 그런 핑계를 댄다.”
“이안 경!”
또 참지 못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미아에 이번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린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입술을 찾아 물었다.
미아는 순순히 이끌려 이안과 입을 맞췄다.
자연스레 이안이 그녀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그의 농염한 손짓에 미아의 몸이 떨렸다.
걱정을 저리 밀어두듯, 이안은 미아를 탐하고 또 탐했다.
미아는 그런 제 속을 헤집는 이안을 느끼며 천천히 잠들었다.
“……눈 부셔.”
미아는 제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가렸다.
아직 무거운 눈꺼풀을 힘주어 밀어올리자 텅 빈 옆이 보였다.
이불 속엔 온기가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안?”
미아가 의아함을 느끼고 몸을 세웠다.
그러나 이안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