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생각지 못한
“어리석군. 여긴 도움을 청할 이가 아무도 없는 산골입니다. 그렇게 달려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닐슨은 미아를 비웃었다.
물론 장성한 사내를 따돌리고 달리기란, 홑몸이 아닌 미아에게는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풀숲을 헤치고 달려 겨우 말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으나, 닐슨의 손이 미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미아를 낚아챈 닐슨이 거칠게 그녀를 뒤로 밀쳤다.
“아!”
미아는 제 배를 감싸 안았다.
아이가 놀랐는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미아가 아이를 달랠 틈도 없이, 닐슨은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거칠게 벗기려 들었다.
“미쳤어요? 이거 놔요!”
미아는 거세게 저항했다.
자꾸 자신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닐슨을 밀쳐내기 위해 미아는 몸을 뒤틀었다.
닐슨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눈빛을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안…….’
잠시나마 그를 마주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꼭 그때처럼, 같이 씨앗을 사러 나갔다가 미아가 납치됐던 그 날처럼.
이안이 거짓말처럼 구하러 와줄 것만 같아서 미아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비켜요!”
“그 재수 없는 새끼. 끝까지 나를 지키란 말도 듣지 않고 혼자 전쟁터로 달려나갔어. 그 새끼가 살아있을 거라 믿는 건 아니지?”
“전쟁터라뇨!”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굳이 굳이 전쟁터로 향한 걸 보면 뒤지고 싶었던 거 아니겠어?”
“그 입 닥쳐요.”
미아가 날이 선 목소리를 내자, 닐슨은 심사가 뒤틀렸는지 그대로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미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미아는 순간 정신이 확 드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이안이, 이안이 전쟁터로 갔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거면 찾으러 갈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 미아는 젖먹던 힘을 내 무릎을 세워 닐슨의 허벅지 안쪽을 가격했다.
“아!”
새된 비명과 함께 닐슨이 뒤로 물러난 사이 미아는 급하게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제 발목을 쥐어오는 닐슨의 얼굴을 발바닥으로 밀어냈다.
와중에 신고 있던 구두가 벗겨졌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말에 올라타려 나무에 매어둔 고삐를 쥐었다.
매듭을 풀려 버둥거리는 미아의 손은 떨림 때문인지 자꾸만 엇나갔다.
“이게 왜 이렇게 안 돼…….”
얼마나 지났을까.
가까스로 매듭을 풀었을 때, 미아의 머리가 뒤로 훽 젖혀졌다.
한 손으로 제 눈을 가린 닐슨이 거칠게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쥐었다.
“이 상스러운 계집이!”
미아는 까치발을 딛고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닐슨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의 눈이 멀쩡하지 않은 이때가.
미아의 시야로 닐슨이 차고 있는 검이 들어왔다.
원래의 미아라면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가만히 당하고는 살지 않을 것이다.
넘어지지 말라고 말하던, 이안이 떠올랐다.
다른 누가 아닌 그녀를 위해서 조심하라고 했던 이안이.
그러니까 미아는 힘을 내야 했다.
그녀를 위해서, 그를 만나야 하니까.
“아악!”
순식간에 검을 빼낸 미아가 겨우 닐슨의 다리를 베어냈다.
닐슨의 피가 미아에게 튀며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미아는 제 위로 쓰러지는 닐슨을 피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 짜내 달리기 시작했다.
말을 탈 새도 없었다.
뒤에서 욕지기가 들려왔으나, 멈출 수도 없었다.
“이안, 이안을 찾아야 해…….”
미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참을 뛰었다.
산길을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자, 몸에 힘이 풀렸다.
그제야 뒤를 돌아볼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쫓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 하…….”
그제야 턱 끝까지 찬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제 손과 드레스에 튄 피를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그녀가, 그녀의 힘으로 누군가를 해쳤다.
물론 그 정도의 상처로 죽진 않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날 것이다.
다리를 자른 것은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려는 순간의 기지였다.
미아는 배를 감싸 안고 마을의 입구로 들어갔다.
목이 말랐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에 어디든 앉아 쉬고 싶었다.
“그거 들었어?”
“뭐?”
“전쟁에 누군가 혜성처럼 등장하더니, 적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냈대.”
“누가?”
“누구라더라, 어디서 온 황제였나.”
“황제가 여길 왜 와?”
“황제가 아닌가…….”
길을 지나가는 남자 둘의 대화 소리가 그 와중에 미아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미아는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남자를 대뜸 붙잡았다.
피와 먼지투성이가 된 미아를 보고 놀란 남자가 움찔하며 그녀를 밀어냈다.
“아, 뭐야! 재수 없게.”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요? 거기, 거기가 어디래요. 그 남자가 있는 곳요.”
“나도 모르지. 일단 적의 머리만 베고 떠났다고 하니까.”
“떠났다고요? 어디로요.”
“아, 이거 놓으라니까!”
남자가 미아를 밀쳐냈다.
힘없이 밀쳐진 미아가 바닥에 쓰러질 즈음, 누군가 그런 그녀를 붙들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품 안에 미아가 빨려 들어갔다.
“……죄송합니.”
미아는 무심코 인사를 건네려다 멈칫했다.
이 온기는, 이 체향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설마 싶은 마음에 고개를 들자, 그녀를 마주한 것은…….
“그대가 왜 여길.”
이안이었다.
❀ ❀ ❀
“대체 누가 이딴 거짓 정보를 퍼뜨려.”
“너는 형의 필체도 못 알아보는 것이냐.”
베아트리체가 윌리엄을 다그쳐 물었다.
윌리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안이 살아있다니, 그것도 살아서 적장의 목을 베어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설령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그 전갈을 여기까지 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허위 정보입니다. 같이 있던 닐슨 왕자 역시 찾은 이가 없었습니다.”
“닐슨과 함께 있다 흩어졌을 수도 있지 않니.”
“아무리 형이 뛰어난 검사라고 하더라도 혼자의 몸으로 수십, 수백에 달하는 적을 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가 형을 과신하시는 겁니다.”
“너는 형이 죽길 바라고?”
베아트리체는 윌리엄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윌리엄도 미칠 지경이었다.
만약 이 전갈이 사실이라면, 이안은 떠나서 혁혁한 공만 세워 돌아오는 꼴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베아트리체의 계획대로 되었다.
물론 레이디 데드가 선황제를 죽인 것이 이안이라는 주장을 했으나, 돌아온 이안이 그것을 부정하면 일이 골치 아파졌다.
역모의 죄는 컸다.
죄가 큰 만큼 벌 또한 반드시 귀족들 앞에서 문책해야 했다.
귀족들이 윌리엄의 편을 들어줄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외교적 분란을 잠재운 이안의 편을 들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재판에 이안을 세우고 싶지 않았다.
이제 윌리엄은 이안이라면 지긋지긋했다.
“나가세요, 어머니.”
“네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안은 돌아올 거다. 살아서, 미아 양과 함께.”
“나가시라고요!”
윌리엄은 패악을 부리듯 악을 썼다.
악을 지르는 윌리엄을 노려보던 베아트리체가 걸음을 옮겼다.
베아트리체가 나간 것을 확인한 윌리엄은 곧장 호위 기사를 불렀다.
그리고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해. 반드시 찾아내서, 목숨을 끊어놔. 기사 몇을 동원해도 좋다. 바트르의 땅을 결코 밟게 해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기사는 윌리엄의 지시가 마뜩잖은 듯 머뭇거렸으나, 살의를 담은 그의 눈빛에 하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럼에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윌리엄이 와인이 든 잔을 들어올렸다.
그가 곧 승리의 축배를 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이안.”
미아가 겨우 입술을 달싹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은 손을 뻗어 미아의 뺨을 그러쥐었다.
그녀의 등장이 믿기지 않는 것은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터에서 많은 일을 겪은 듯 수척해진 모습이었으나, 이안은 다친 곳 하나 없이 성했다.
“그대가 여기 있다니. 꿈인가.”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전쟁터에 있다고…….”
“적의 목을 벴다. 전쟁이 곧장 끝나지는 않겠지만, 나는 내 할 도리를 다 했다. 그대에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해냈는지, 그대를 보기 위해 먼길을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그런데 바트르에 있어야 할 그대가 왜 여기. 머리는, 분명 머리를 다쳤잖아.”
“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 이안 경은요. 이안 경은 다친 곳 없어요?”
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그를 살폈다.
그는 다친 곳 없이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찾아 쥐었다.
주르륵.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미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이안이었다.
이안이 자신의 앞에 있었다.
다치지 않고, 살아서.
온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안고 있었다.
미아는 팔을 들어 이안의 목에 두른 채 그를 깊이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짓에 호응하듯 그 역시 미아를 마주 안아주었다.
“이대로 다시는 못 볼까 봐. 당신이 사랑한다고 한 말이, 마지막이 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나는 약속은 꼭 지킨다. 그대에게 돌아간다고 약조했으니,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킬 생각이었어.”
“하지만 위험한 곳에 혼자 가셨다면서요. 옷에 단추도 도둑맞으시고.”
“단추?”
“닐슨 왕자요!”
“그이를 마주쳤어? 그래서 이 꼴이 된 거야?”
미아는 차마 제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안의 눈에 미아의 뜯어진 드레스 상의가 보였다.
입고 있던 정복의 외투를 벗어 미아의 어깨에 둘러준 이안이 그녀를 천천히 살폈다.
터진 입술이며, 엉킨 머리칼이 그제야 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마주한 것이 반가워, 뒤늦게 이것을 보았다는 사실에 그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죽여버리겠다.”
“…….”
이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잔뜩 묻어났다.
당장이라도 찾아가 죽일 기세를 보이는 이안을 미아가 감싸 안았다.
“제가, 제가 베었어요.”
“그대가?”
“네. 다시는 쫓아오지 못하게, 다리를 베어버렸어요.”
“…….”
“만약, 정말 죽었으면 어떡하죠?”
이런 꼴을 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는 말 대신,
이안은 미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대의 힘으로 어림도 없어. 그저 살갗을 조금 긁혔을 것이다.”
“정말요?”
“검을 다루는 법을 안다고 하여도, 애초에 다뤘던 검의 무게가 다를 테니. 걱정 마.”
“……이안 경.”
미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이안과 눈을 맞췄다.
이안은 미아의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주다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뜨겁게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