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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가까워진 듯 멀어진 (90/95)

90화. 가까워진 듯 멀어진



 

“그걸 보내?”

“그럼 어떻게 해요. 가겠다는데.”

“당신이란 여자는, 정말이지……. 정말, 쓸모가 없네요.”

“누가 쓸모가 없어요?”

올리비아가 날이 선 시선으로 윌리엄을 보았다.

그렇지만 윌리엄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가진 것 없는 여자는 원래 두렵지 않은 법이다.

“할머니가 오셔서 망정이지. 할머니도 안 오셨으면…….”

“비밀은 원래 손에 쥐고 있을 때 강력한 법인데. 그 패를 지금 까요? 어리석긴. 게다가 그 패는 원래 나에게 주었어야 할 패잖아요.”

“애초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올리비아 양입니다.”

“올리비아 전하예요. 황태자비라고요.”

“저는 황제입니다. 잊었습니까?”

둘 다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팽팽했다.

의미 없는 다툼이 이어지는 것은 카일렌이 달브에 도착하자마자 출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린 탓이었다.

갈 곳 없이 버려진 신세가 된 올리비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윌리엄을 찾아왔다.

윌리엄은 가뜩이나 머리 아픈 상황에 등장한 올리비아가 달가웠을 리 만무했다.

“그래요. 아직은 황제시죠. 이안 경이 살아 돌아온다면 언제든 물러날!”

“멀쩡히 살아 돌아올 리가 없다니까. 이미 죽은 사람을 무슨 수로 살립니까.”

“죽었다는 증표 있어요?”

윌리엄은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올리비아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가 답답하긴 올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 아닌 건, 폐하도 잘 아시잖아요.”

“마치 살아있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씀하십니다?”

“그야…….”

“그만해.”

노여움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비아와 윌리엄이 고개를 들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레이디 데드였다.

레이디 데드는 탐탁지 않은 눈길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이안과 혼인하는 날을 마지막으로 다시 마주칠 일이 없으리라 믿었던 그녀의 등장에, 올리비아 역시 몸이 굳었다.

“아, 안녕하세요.”

“예의를 밥 말아 먹은 인사법이구나.”

“할머님.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네가 자리를 오래 비우니 사람들이 파리처럼 들끓어서 말이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평소 베아트리체에 악감정을 품은 이들은 레이디 데드의 등장을 무척이나 반겼다.

더구나 그녀가 가져온 서신으로 이안의 자리가 위태로운 지금, 그녀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없었다.

“귀찮으셨어요?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 애는 딱 자기 같은 애를 며느리로 앉혔구나.”

그녀가 말한 ‘그 애’는 베아트리체를 뜻했다.

베아트리체와 함께 욕먹게 된 올리비아는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레이디 데드의 손짓을 받았다.

나가라는 듯 손가락을 털어보이는 레이디 데드의 모습에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에게는 올리비아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 레이디 데드.”

“아직 안 갔니.”

“혹여 모르실까 봐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달브 황국의 황태자비예요. 이미 죽고 없는 선황제 폐하의 어머니보다야, 힘 있는 사람이죠.”

“올리비아, 지금 무례하게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적어도 사실은 바로 아셔야죠. 저는 이렇게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버림받았나?”

레이디 데드는 무심히 말하고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아예 올리비아를 등지고 섰다.

분한 마음에 주먹을 꼭 쥔 채 레이디 데드의 뒷모습을 보던 올리비아가 몸을 훽 틀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윌리엄은 레이디 데드에게 괜찮냐 물으면서도, 올리비아에게서 드디어 해방됐다는 듯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네 탓이 아니니 그럴 필요 없다.”

“머무시는데 불편함은 없습니까?”

“내가 너와 그런 얘기나 하자고 여기 온 거 아니다.”

“네, 할머님.”

크흠.

윌리엄에게도 레이디 데드는 확실히 불편한 사람이었다.

레이디 데드가 자리를 찾아 앉자, 윌리엄도 허리를 곧추세운 채 앉았다.

“미아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그 여자 하나로 이 사달이 났단 말이지.”

“……면목 없습니다.”

“죽었다는 확실한 증표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냐.”

“증표는 없지만, 거의 확실합니다. 다른 왕자들 역시 1왕자인 닐슨을 죽이려 혈안이었으니, 가만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전쟁 자체가, 왕자 하나 묻는 자리였고. 너는 그 자리에 네 형을 보냈다는 거구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인정하자니 어감이 그랬다.

이 순간까지도 윌리엄은 깨끗한 사람이고 싶었다.

“……뭐, 네가 황제인 것이 가장 나으니 내버려 뒀다만. 너 역시 천한 피가 섞인 건 여전하군.”

“죄송합니다.”

“어머니를 부정하거라, 닮지 마. 너는 어디까지나 우리 아들의 고귀한 피를 남긴 자손이어야 한다.”

“네, 할머님.”

윌리엄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디 데드의 말은 이어졌다.

‘한 여자가 가니 다른 여자가 와서 난리군.’

윌리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끊을 시기만 노릴 때 즈음, 밖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반가운 얼굴이 된 윌리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시중이 무언가를 들고 뛰어들어왔다.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누구로부터?”

“이안 경입니다.”

“뭐?”

❀ ❀ ❀

“조심해서 가.”

“네, 조심할게요. 고마워요.”

“언니, 우리 또 볼 수 있는 거죠?”

“못 오더라도 서신을 보낼게. 글자 공부 열심히 해?”

한결 가벼워진 몸이 된 미아는 아쉽다는 듯 연신 제 다리에 엉겨붙는 리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리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망울을 하고서도 꾹꾹 눈물을 참아냈다.

리지의 엄마가 리지가 울면 슬퍼할 언니를 생각해달라 신신당부를 해서였다.

“신세만 지고 가네요.”

“신세는 무슨. 덕분에 나도 새로운 사람과 얘기도 나누고 좋았어.”

“정말 또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아이 무사히 낳고.”

미아는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말에 올라탔다.

멀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 날의 기억도 언젠가 이안에게 들려줄 수 있겠지.

이안에게 사랑스러운 리지를 보여주고 싶다, 이안도 분명히 이 아이라면 좋아할 테니까.

‘힘을 내자.’

그런 생각을 하자, 자연히 힘이 솟았다.

몇 시간을 말을 타고 달려도 피곤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확실히 푹 쉰 덕을 보는 것 같았다.

“응? 이게 무슨 냄새지.”

한참 산을 타던 미아가 말의 걸음을 늦췄다.

무언가가 타는 냄새가 코를 울렸다.

누가 있나?

혹여 위험한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미아는 발소리를 줄이려 말에서 내렸다.

말의 머리를 이끌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누군가 방금 피운듯한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불 옆에 놓인 물건들 중 하나는…….

“이안!”

미아의 입에서 탄성처럼 그의 이름이 샜다.

분명 그의 단추였다.

다르뷔 가문의 문장이 붙어있는 단추가 여기서 발견된다면, 그건 그의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단추는 금으로 된 단추로, 오직 황족만이 달 수 있는 단추였다.

“이안, 어딨어요. 이안!”

미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안이 여기 불을 피우고 근처에 쓸만한 것이 있나 둘러보러 간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드니 이안이 아닌 다른 사람일 거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안 경을 찾습니까.”

낮게 깔리는 비열한 목소리에 한참 이안을 찾아 헤매던 미아의 몸이 굳었다.

천천히 돌아보자, 피로한 얼굴을 하고 해진 옷을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얼핏 보아도 귀족이나 황족이었다.

입고 있는 옷에 그려진 문장은 …….

“멜란 왕국?”

“용케 알아보시는군요. 제가 이꼴이 됐는데도 알아보시는 걸 보니, 성스러운 자끼리는 통하는 모양입니다.”

닐슨이었다.

미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닐슨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희망이었다.

“닐슨 왕자님, 이안 경은요?”

“이안 경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어디요? 지금 근처에 있어요?”

“예. 저랑 함께 기다리시죠.”

“아뇨, 찾겠어요. 어느 방향으로 가셨는지 알아요?”

“그러다 엇갈릴까 겁이 납니다. 원래 산에서는 해가 일찍 지는 법이지요. 잠시만 여기 머무시면 올 텐데, 기다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닐슨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으나, 미아는 닐슨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엇갈린다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급습 당해 도망치다 보니 여기까지 밀려왔습니다.”

“혹시 다친 건…….”

“죽고 못 사는 사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아아,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걱정 마세요. 이안 경은 저보다도 멀쩡하니까.”

“정말 다행이네요. 감사해요. 이안 경과 함께 살아남아 주셔서.”

“별말씀을요. 이안 경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고 좋았습니다.”

불을 쬐며 연신 주위를 살피는 미아를 가만히 응시하던 닐슨이 헛웃음을 짓듯 숨을 내쉬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금빛 단추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햇빛에 비춰보듯 하늘에 들어 보였다.

“이거 때문입니까?”

“네?”

“이안 경이 여기 있는 줄 안 거 말입니다.”

“아, 네. 반짝거리는 게 보이길래…….”

“사랑의 힘이라는 게 참 대단하네요.”

어쩐지 묘하게 비틀린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아는 닐슨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이안이 근처에 있다면,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야 옳았다.

닐슨은 이안이 어디로 향했는지도 말해주지 않았고, 정말 이안이 여기 있다면 적어도.

적어도, 미아의 목소리를 들었을 터였다.

“……저, 닐슨 전하?”

“예. 말하시죠.”

“그, 이안 경을 아무래도 제가 직접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러세요?”

“네. 저 금방 다녀올게요.”

미아가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불을 응시하던 닐슨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미아와 눈을 맞췄다.

“이래서 똑똑한 여자는 귀찮아.”

“……네?”

“돈이 될 것 같아 혹시 몰라 훔쳤는데, 그걸로 용케 걸려드네.”

“저, 닐슨 전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잖아, 너도. 내가 무슨 말하는 건지.”

“네?”

순식간이었다.

닐슨이 미아가 메고 있던 가방을 빼앗으려 손을 뻗은 것은.

미아는 가까스로 몸을 돌려 피했다.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닐슨에게는 검이 있었다.

미아는 닐슨에게서 도망치려 걸음을 옮겼다.

말을 매어둔 호숫가까지 뛰어가면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거기서, 미아!”

닐슨이 그런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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