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탁상공론
“멜란 왕국은 우리와 오래 우호적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니 원조를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수석이 주장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멜란 왕국과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 주를 이뤘으나.
그 기저엔 지원을 요청했을 때 딱 집어 이안만을 불러들인 것이 이상하다는 주장 역시 들어있었다.
수석의 의견에 동의하는 몇몇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은 무심히 그런 수석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멜란 왕국이 불리한 상황에 지원군을 보내었다, 황국의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라도 하면요.”
“원성이라뇨.”
“불리한 전세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우리까지 공격을 받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멜란 왕국을 거쳐 여기까지 전선이 밀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윌리엄은 몸을 일으켰다.
정무회의에 참여한 모든 귀족의 시선이 윌리엄을 향했다.
물론 그 안에는 급하게 환궁한 신시아와 내내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베아트리체도 있었다.
“명분이 있습니까.”
“명분이라면, 무슨…….”
“우리에게 이안 다르뷔를 구해야 할 명분이 있냔 말입니다.”
“그야 당연히 폐하의 형님,”
“형이기 이전에 폐위된 황제죠. 그것도 전쟁으로.”
“…….”
“이미 폐위된 폭군을 구하러 지원군을 보낸다?”
윌리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베아트리체는 그런 윌리엄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위된 황제를 궁에 들인 것은 황제 폐하십니다.”
“그야, 아우된 도리로 혼인까지 도운 것일 뿐입니다.”
“아우된 도리로 목숨은 구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이건 단순히 혼인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원군을 보낸다는 건, 병사들의 목숨을 건다는 겁니다.”
윌리엄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울상을 지어 보였다.
그 역시, 이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유감이라 생각한다는 듯.
베아트리체는 그런 윌리엄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노려보았다.
제 배 아파 나았다지만, 윌리엄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이안은 속이 빤히 보여 마음에 걸렸다면, 윌리엄은 이안이 가진 것을 탐내고 또 탐내면서도 겉으론 안 그런 척 해보였다.
그것이 언젠가 화를 부를 줄 알면서도 내버려둔 건 그녀의 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석은 입을 벙긋거렸다.
이안에게 붙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이안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정말 이안이 죽기라도 했다면, 그는 화를 피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안 다르뷔를 구하러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 주장할 겁니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신시아는 조바심이 나 자꾸만 움찔거렸다.
손을 들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뜻을 전해야 제대로 전달될지 알 수 없었다.
“……폐하께서는 멜란 왕국과의 화친을 포기하시겠다는 겁니까? 전세는 다시 역전될 수 있습니다. 행여 멜란에서 우리의 뜻을 곡해하고 적대감을 품는다면 훗날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대 바트르 황국과 국경을 맞댄 것은 멜란입니다.”
신시아가 겨우 입을 열어 말을 잇자, 윌리엄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래, 네가 있었지.’
윌리엄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신시아를 노려보다 입꼬리를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겨우 이 정도의 반발도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뭐, 언제든 우호 관계는 바뀔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국경을 마주한 달브 황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멜란 왕국도 쉬이 침략할 생각은 못 할 겁니다.”
“달브 황국과 우호적인 관계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야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혼인 기념 여행으로 이곳을 찾을 지경이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카일렌 황태자가 떠났습니다.”
“예?”
“그것도 멜란 왕국에 지원병을 보내자는 요청을 하러 돌아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황태자가 왜…….”
윌리엄은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굳이 왜 멜란 왕국을 돕겠다고 국경을 맞대지도 않은 달브에서 지원군을 보낸단 말인가.
평소 그렇게 우호적인 관계도 아니었으면서.
‘설마 미아 때문에?’
카일렌의 해묵은 감정이 미아에게 남아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안이 사라져서 득을 본 것이 그라 생각했다.
미아만 중간에 낚아채 데려갈 것이지, 뭐 하러 일을 크게 벌인단 말인가.
“그게 정말입니까.”
“네. 올리비아 황태자비도 남겨두고 떠났으니, 분명 급한 일일 겁니다.”
신시아의 말에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창밖을 보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쯤이면 도착할 때가 됐는데.
똑똑.
그의 바람대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손님이 정무회의실의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레이디 데드의 위용은 상당했다.
모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레, 레이디 데드 전하?”
“여긴 어쩐 일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레이디 데드는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들이 앉아있는 기나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수석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열었다.
서신을 읽어내려가던 수석의 얼굴이 굳었다.
‘어머니, 저는 조만간 죽을 겁니다.
제 아들 이안의 손에.’
선황제의 글씨체였다.
❀ ❀ ❀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자.”
미아는 말을 멈추었다.
마을은 조용했다.
한나절을 꼬박 달리자, 어느덧 멜란 왕국의 국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산만 넘으면 지도에 표시된 지점이 나왔다.
“너도 배가 고프지?”
달리느라 고생한 말의 갈기를 쓸어준 미아가 호숫가로 말을 끌고 갔다.
말이 물을 마시는 것을 보며 애니가 싸준 음식을 꺼냈다.
입맛이 없어도 먹어야 했다.
그래야 힘을 내 갈 수 있을 테니.
“저기, 아가씨.”
“네?”
미아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미아가 몸을 일으켰다.
“보아 하니, 먼길 떠나는 것 같은데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어, 아니에요. 그런 폐를 끼칠 순…….”
“아이 뱄죠?”
“아…….”
“내가 이 마을에서 받은 아이만 수십이야. 이젠 배만 봐도 알아요. 딸인지, 아들인지.”
순간 미아의 눈이 저도 모르게 번뜩였다.
그럼 혹시 이 아이의 성별도 알 수 있는 걸까?
물론 성별이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녀는 가끔 궁금했다.
제 배 속에 든 아이가 어떤 아이일지.
만나기 전엔 알 수 없는 법이니까.
“궁금하구나?”
“네, 솔직히……. 근데 말씀해주지 마세요!”
“그래. 나중 되면 어차피 알게 될 건데.”
“……엄마.”
한 아이가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자의 아이인 듯 여자의 다리를 푹 붙잡으며 잠이 묻은 얼굴로 미아를 보았다.
아이는 미아의 옆에 매인 말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다가 조심스럽게 미아에게 물었다.
“타 봐도 돼요?”
“음, 그래. 대신 언니가 꼭 안아줄 테니까 언니 꽉 잡아야 해.”
“네.”
“고마워요. 우리 애가 어려서부터 워낙 말을 좋아했거든.”
여자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미아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이를 품에 조심스럽게 안고 말 위에 올랐다.
말은 아이를 인지한 듯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품에 안긴 아이의 온기를 느껴서인가, 미아는 내내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어땠어?”
“좋았어요!”
아이는 신이 난 듯 미아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제 엄마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마치 미아를 재워달라는 것처럼.
“자고 가요. 아이 아빠 찾으러 가는 거죠?”
“그걸 어떻게…….”
“전쟁이 났다고 들었어요. 애타는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이 무슨 사정일지는 안 물어도 알지.”
미아는 차마 그 친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집안의 훈훈한 열기가 그녀의 몸을 녹여주었다.
미아는 자신이 가져온 비스킷을 아이에게 나눠주고 자리에 앉았다.
곧 차가 그녀의 앞에 놓였다.
“정말 감사해요, 신경 써주셔서.”
“서로 돕고 사는 거지. 나도 애 가졌을 때, 애 아빠 전쟁터에 보내고 매일을 마음 졸였어. 그래도 찾아갈 용기는 못 냈는데, 애 엄마가 대단하네.”
‘엄마’
미아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엄마가 되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몇 개월 후면 엄마가 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낯설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애 아빠도 그래요?”
“음, 그렇게 나이 먹진 않았어요.”
“그래도 아내 밥 굶기진 않나 보네. 드레스가 고급스러워 보여. 아니면 귀한집 영애?”
미아는 쓰게 웃었다.
그녀는 귀한 집의 영애였다, 한때.
이제는 아니지만.
말없이 웃는 그녀를 보던 여자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쓸었다.
“걱정 마요. 애 아빠는 잘 있을 테니.”
“그럴 거라고 믿어요, 저도. 그래서 이렇게 찾으러 왔고요.”
“씩씩하니 좋네. 배는 안 고파요?”
“네.”
“엄마, 이 안에 아이가 있어요?”
비스킷 가루를 입에 묻힌 채 오물거리던 아이가 미아의 배 위에 대뜸 손을 올렸다.
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그래. 그 안에 아이가 있어.”
“신기하다. 나도 그럼 엄마 배 속에 있었어요?”
“그래. 너도 이 안에 있다가 펑하고 나왔지.”
“펑?”
아이가 엄마의 소리를 따라하는가 싶더니 미아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 봤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겠지.
미아는 새삼 벅차 제 배를 연신 손으로 쓸어보았다.
이안도 보았으면 좋을 텐데, 이 아이를.
그리고 제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움직임을 같이 느껴보면 좋았을 텐데.
“너는 이름이 뭐야?”
“저는 리지예요.”
“리지?”
“네. 어, 어떻게 쓰더라…….”
테이블 위로 꼬물꼬물 손을 움직여 보려던 리지의 손을 미아가 잡았다.
그리고 찬찬히 글씨를 써주었다.
다행히 바트르 황국의 글자는 달브 황국의 그것과 비슷했다.
“우와. 이거 맞아요?”
리지는 다시 한 번 글자를 써보였다.
미아가 잘했다는 듯 리지의 머리를 쓸어주자,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역시. 귀한 집 딸이시구나.”
“리지도 그런 걸요. 사랑받는 자식은 누구나 귀하죠.”
“말도 예쁘게 하네. 리지, 언니 그만 귀찮게 해라. 언니도 쉬어야지. 자, 여기 누워요.”
“고맙습니다.”
폭신한 새 이불을 꺼내 준 여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미아가 몸을 눕혔다.
리지는 미아와 같이 자고 싶다며 투정을 부렸다.
미아는 리지를 끌어안았다.
“리지, 잘 자.”
“언니도 잘 자요. 아기도 잘 자.”
리지가 미아의 배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미아는 리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잠이 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따뜻한 이불을 뒤집어쓰자 기다렸다는 듯 잠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