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카일렌의 추궁 (87/95)

87화. 카일렌의 추궁



 

미아는 오랜만에 펜을 쥐었다.

펜을 쥐는 감촉이 생경했다.

사고가 난 이후, 손에 힘이 한동안 돌아오지 않아 숟가락 드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녀였다.

그래도 며칠 동안 열심히 먹었더니, 기운이 좀 돌아온 것 같았다.

기운이 돌아온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애니에게 종이와 펜을 구해달라 부탁한 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에게.’

전에 쓰다가 포기했던 서신을 떠올렸다.

이번에야 말로, 진심을 전할 때였다.

혼인까지 치렀으니, 자신이 폐위된 폭군인 이안과 혼인했다 소문이 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제일 먼저 알리는 사람이 되지 못할지언정,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족을 버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해야 했다.

‘미아예요. 너무 오래 소식을 전하지 못해, 죄송해요.

하고픈 말이 많았는데, 전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미아는 떨리는 손 끝에 힘을 주었다.

처음 이안의 부탁으로 서신을 쓰던 때가 생각났다.

그가 제 글씨를 보고 ’악필‘이라 놀렸는데.

지금 보니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이안을 생각하니 또 왈칵 눈물이 치밀었지만, 미아는 입술을 꾹 물어 참았다.

‘면목 없게도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가 저로 인해 곤란해지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저만 행복하려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강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가 저인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고 있어요.

그러니 부디 저를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를 용서하지도 마세요.

아버지, 저를 파문해주세요.

가문에서 버린다면, 지금 처하신 고초를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가족의 뜻을 져버렸다고, 제가 사랑에 눈이 멀어 가족을 버렸다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멸문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투둑.

참았지만, 끝내 눈물방울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미아는 손을 들어 아무렇지 않게 눈물을 훔쳐냈다.

슬펐지만, 이게 도리였다.

가족들이 고통받지 않으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저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해요.

주신 사랑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사랑을 담아,

미아 다르뷔가.’

이안이 마치 뒤에 선 것처럼,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움직여주는 것처럼.

미아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목소리를 환청처럼 들으며 서신을 마무리했다.

“애니, 이걸 전해줘. 베아트리체 전하께 부탁드려놨으니.”

“네. 시중에게 전해주고 올게요.”

“고마워.”

“별말씀을요.”

애니가 종종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간 것을 보던 미아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 걸음을 옮길 때면 조금 현기증이 일었으나,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서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방을 빠져나오자, 열린 창문으로 밀려 들어온 바깥의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회복에 전념하느라 오래 침실에만 머물렀던 터라, 낯설고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미아는 자신이 떨어졌던 정원으로, 그와 혼인했던 정원으로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그곳으로 향하면 이안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이 그녀를 휘감았다.

“…….”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미아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따르고 있는 것은 카일렌이었다.

매일 같이 찾아오던 카일렌이 발길을 끊은 지 며칠이나 지났더라.

안 그래도, 카일렌에게 말을 전하려던 차였다.

미아는 카일렌을 말리지 않고서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마련된 벤치에 앉고서야, 미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일렌은 숨지 않고 그녀를 마주했다.

“차를 가져다 주겠어요?”

“알겠습니다.”

시중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멀어졌다.

미아는 잠시 어지럼증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 그녀가 걱정되는지 얼굴을 살피던 카일렌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신경 써주셨다 들었어요. 깨어나는 것을 기다려주셨다죠. 매일 같이 저를 찾아주시고, 제 입에 맞는 음식을 준비해달라 주방에 이르기도 하고요.”

“…….”

“감사합니다, 카일렌 전하.”

곧 따뜻한 차가 두 사람 앞에 놓였다.

자연스레 침묵이 찾아들었다.

한가로운 바람이 미아와 카일렌을 훑고 지나갔다.

문득 카일렌은 한 번도 지금처럼 미아와 단둘이 한가롭게 티타임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불성실한 남편이었나, 그는.

“……미아.”

“네.”

“미안합니다.”

“……?”

돌연 사과하는 카일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아가 눈을 치켜떴다.

카일렌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마주보았다.

“당신을 아낀다면서, 정작 당신이 아파 쓰러져 있을 땐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야, 여기는 달브가 아니잖아요. 게다가 저는 멀쩡해졌으니 괜찮습니다.”

“…….”

“그러나 여기까집니다.”

미아는 단호했다.

그가 그녀를 매일 찾는 것을 보고 시중들이 속닥거리는 것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앞으로는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관심 갖지 않으셔도…….”

“미아.”

“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오직 당신만을 생각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카일렌의 시선이 미아의 배를 향했다.

미아가 손을 들어 제 배를 감쌌다.

카일렌의 시선이 닿자, 배가 당겼다.

마치 아이가 움직이는 태동이 느껴진 것처럼.

“그 아이, 나의 아이이지 않습니까.”

“…….”

카일렌이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미아의 손을 찾아 쥐었다.

미아는 당황해 그의 손 안에서 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카일렌은 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

“당신의 입으로, 직접 듣겠습니다.”

“……카일렌.”

“그 아이, 제 아이입니까.”

미아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이안이 아이를 받아들여 주기로 했다고 한들, 카일렌은 알 권리가 있지 않나.

적어도 자신이 카일렌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아야지 않나.

그게 도리가 아닌가.

미아는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했다.

말을 하지 않겠다, 말을 해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짐했지만, 막상 이 순간이 오니 마음이 요동쳤다.

“당신이 혼인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혼인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

“그날도, 당신은 아름다웠습니다. 나를 보고 수줍게 웃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

“그건…….”

그땐, 당신을 좋아했으니까.

당신과 혼인하게 된 것이 마냥 기쁘고 신기했으니까.

잘 살아봐야겠다는 다짐을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으니까.

앞으로 펼쳐질 날들이 기대되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미아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늦었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어.”

“……전하.”

“당신을 고른 것은 납니다.”

“…….”

“수많은 영애 중에서 당신을 고른 건 나야. 그러니까, 당신을 알아본 것도 나고, 당신을 먼저 사랑했던 것도 나야.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 설렘이 아니라 착각한 것은 내 죄야. 그건 확실해. 그렇지만, 그 익숙함에 속아서 내가 당신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카일렌은 아득한 표정이 되었다.

미아는 불편한 마음에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는 미아를 가만히 보던 카일렌이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힘들게 해서.”

“……이제 와, 이러셔도 제가 드릴 맗씀은 없습니다. 전하, 이만 돌아가겠…….”

“하지만 아이는 다릅니다.”

카일렌의 목소리가 돌연 차가워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아가 찬찬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아이는 모든 것을 누려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더구나 내 아이라면, 달브 황국의 황세손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

“아무리 당신이 나를 거부한다고 해도, 아이마저 내 손에서 앗아갈 순 없어.”

카일렌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이 카일렌의 손 안에서 움찔거렸다.

거센 그의 악력에 통증이 밀려오는 것도 잠시, 다시금 미아의 마음에 불안함이 차올랐다.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도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야지.”

“……이, 이 아이는.”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생각은 해본 거야? 폐위된 폭군의 아이로, 아무것도 없는 차디찬 북방의 땅에서 아이가 무엇을 배우고 자라겠어. 적어도 달브에선 그 아이가 많은 것을 누리고 자랄 거야.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그 아이를 내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미아, 그게 무슨 말인 줄 알아?”

미아는 안광을 번뜩이며 저를 바라보는 카일렌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당신이 설령 다른 사내를 사랑한다고 해도, 다른 사내 품에 안겼다고 해도. 당신을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안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어.”

“이러지 마세요, 전하. 이건 아니에요.”

“아이를 생각해, 미아.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알게 될 거야. 그에 대한 사랑은 잠깐이지만, 우리의 아이가 커가며 겪게 될 많은 것들을 생각해. 아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해.”

“…….”

미쳤어. 단단히 미쳤어.

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더 들을 수 없다는 듯 몸을 거세게 뒤트는 그녀를 억지로 카일렌이 끌어안았다.

“미아. 만약 이안 경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

“그럼 그땐 나에게 올 겁니까.”

카일렌의 말은 미아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미아가 끝까지 외면하는 말이었다.

그런 저에게 감히, 그가. 그 따위가.

이안의 안위를 들먹이다니.

짝.

미아는 손을 들어 카일렌의 뺨을 내리쳤다.

반사적으로 손을 놓은 카일렌의 품에서 빠져나온 미아가 몸을 떨며 소리 질렀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이안 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 거니까! 감히 그 입으로, 감히.”

미아는 몸을 틀었다.

빠르게 정원을 빠져나가는 그녀에게 누군가 손을 뻗어왔다.

그리고 쓰러지듯 기우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미아.”

“베아트리체, 전하.”

“…….”

평소라면 곧장 무슨 일이냐 물어왔을 베아트리체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니지, 아닐 거야.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베아트리체가 이런 얼굴로 저를 볼 일은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여기 계셨군요.”

윌리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미아가 그를 올려보자, 윌리엄은 말을 이었다.

“멜란 왕국으로부터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