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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혼인 (82/95)

82화. 혼인



 

“이렇게 갑자기 혼인을 하시겠다뇨!”

애니는 갑작스러운 미아의 말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물론 혼인을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미아는 애니에게 미안하다는 듯 민망스럽게 웃었다.

“미안해. 갑자기 일이 그렇게 됐어.”

“이안 님이 그러신 거죠?”

“……응.”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아무리 미아 님이 좋으셔도 그렇지. 신부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건데, 그것도 모르고.”

“내가 눈치가 없었나?”

“헤엡!”

이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애니가 너무 놀라 또다시 펄쩍 뛰자, 미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무서워할 것도 없는데, 아마 그렇게 말해도 와닿지 않겠지.

“아, 아니요. 이, 이안 님! 저는…….”

“눈치가 없다면 사과해야지.”

“아니, 그게 아니고. 죄, 죄송합니다!”

애니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미아의 뒤에 숨었다.

마치 미아가 자신의 방공호라도 되는 것마냥.

미아는 그런 애니가 귀여워 피식 웃으며 이안과 눈을 맞췄다.

“눈치 없는 건 사실이죠. 제일 예쁜 드레스를 주시기로 해놓고, 재단사만 고생시키셨잖아요.”

“밤을 새서라도 완성하겠다 내게 약조했는데.”

“전 요란스러운 혼인은 싫어요.”

“이미 해보아서?”

“네. 그건 허울뿐인 혼인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 둘만 있으면, 어디서든 성립되는 게 혼인인데. 신께만 약속하면 되잖아요.”

이, 이게.

이미 결혼해본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대화라는 건가?

애니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예사롭지 않은 대화에 눈이 핑글핑글 돌 정도였다.

미아가 괜찮다는 듯 애니를 돌아보고 웃었다.

그제야 슬금슬금 미아의 뒤에서 나온 애니가 힐긋 이안을 보았다.

“저, 이제. 미아 님은 혼인을 준비해야 해서.”

“씻기는 건 내가 해도 되는데.”

“이안 경! 그만 놀려요. 애니 놀라요.”

“…….”

주인님끼리 사이가 너무 좋아도, 그래도 문제구나.

너무 늦게 그 사실을 안 애니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은 미아에게 준비를 잘하라는 듯 눈짓하고는 몸을 돌려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언제부터 저렇게 주책이셨지…….”

“정말 귀엽지 않아?”

“네? 귀엽다고요?”

대체 어디가…….

애니는 그렇게 되묻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미아의 옷을 벗겼다.

오늘은 미아의 날이었다.

그러니까, 미아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야 했다.

❀ ❀ ❀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렇게 식을 당기다니. 네가 말한 휘황찬란한 혼인은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잖니.”

“어머니께서 판을 깔아주셨으니, 이제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신부에게 혼인은 평생 남을 기억인데.”

“어머니께서 선물하셨다면서요.”

미아는 오늘 루비 목걸이를 할 계획이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해본 적도 없는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안에게 가장 아름다워 보이고 싶고, 자신에게 그걸 건네주었던 베아트리체의 마음에 부응하고 싶다고 했다.

“응, 맞아.”

“왜 그러셨습니까.”

“예쁘잖니, 미아.”

“누군가를 예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시늉은 해볼 수 있잖니.”

베아트리체는 그렇게 말하며 시중을 손짓해 불렀다.

시중이 들고 있던 턱시도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급하게 준비해서 그런지, 내 마음에는 안 차는구나.”

“어머니 마음에 어디 기성복이 마음에 든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세상에 어떤 황족이 기성복을 입고 혼인을 올리니.”

“그래도 제가 입으면 좀 나을 겁니다.”

“내가 널 좀 잘나게 낳기는 했다.”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의 대화는 한결 편안했다.

이제 곧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이라 그런지, 아니면 미아 덕에 베아트리체마저 유해져서 그런지.

“아주 사이가 좋은 모자지간이네요.”

그러니 윌리엄에게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한 일임은 당연했다.

윌리엄은 평소에 잘 입지 않던 황제의 정복을 입었다.

마치 그들의 혼인을 허락하는 것이 자기 자신임을 과시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너와 내가 그렇듯이.”

“어머니와 제가요?”

“나는 언제든 준비됐다. 또 다른 며느리를 받아들일. 줄줄이 퇴짜를 놓은 건 너잖니.”

“형의 혼인마저 질투하는 사람은 아닌데요, 제가.”

윌리엄은 이전의 마찰은 기억도 안 난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이안을 보았다.

덕분에 불편을 느낀 것은 이안이었다.

그는 제 동생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형제의 우애 같은 것을 찾을 생각 역시 없었고.

“다행이구나. 가족의 우애는 무엇보다 중요하지.”

“예, 그렇죠. 형이 바라는 대로 요란한 혼인을 시켜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

“귀족들에게 초대장은 돌렸니?”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당일에 돌린 초대장이라 아마…….”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귀족 중 이 혼인에 참여하는 귀족은 드러내놓고 이안을 지지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안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지금이 아니어도 문제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시아에게 오지 말라 미리 당부할 것을.

신시아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쉽구나. 아니면, 오늘은 조용히 혼인을 올리고 돌아오면 성대하게 혼인을 치르자.”

“혼인을 두 번씩이나요? 하긴, 이미 한 번 치른 사람들인데 또 못할 이유도 없죠.”

“윌리엄.”

“두십시오. 틀린 말도 아니고.”

이안은 별 타격 없는 말이라는 듯 시중이 들고 기다리던 옷을 든 채 가림막 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이안을 보다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전세가 기울었답니다.”

“들었다. 멜란 왕국이 우세하다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조 요청을 철회하지는 않네요.”

“철회해달라 말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고?”

베아트리체의 말에 뼈가 있었다.

물론 윌리엄은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잘하면 이안을 해치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섭하게.”

“급하게 치러지지만, 모자란 것이 없어야 한다.”

“안 그래도 둘의 혼인을 누구보다 축하할 귀빈이 있으니 걱정 마세요.”

“설마 그 귀빈이라는 게…….”

당연히, 카일렌과 올리비아였다.

윌리엄은 말을 끝맺지 않고 저를 노려보듯 눈을 힘주어 치켜뜨는 베아트리체에게 그저 웃어 보였다.

❀ ❀ ❀

“…….”

“……그렇게 이상해?”

“……미아 님.”

애니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재단사가 밤을 새웠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다고 몇 번이나 힘주어 말하더니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아의 몸을 감싼 흰 드레스는 흰 눈이 내려앉은 듯 작은 다이아몬드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었고, 주름 하나하나의 결이 살아있었다.

깨끗하고 흰 미아의 피부와 잘 어울리면서도, 미아의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드레스였다.

올림머리를 한 미아의 목에 빛나는 붉은 루비 목걸이는 또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이안의 눈동자를 닮아서일까, 처음부터 그녀를 위해 존재한 보석 같았다.

“왜 아무런 말이 없어.”

미아는 그런 애니의 반응이 불안한 듯 인상을 찌푸리다 거울을 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제 모습을 온전히 마주했다.

이렇게 빛나고 반짝이는 것이, 나라고?

억지로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지 않아도, 불편하게 높은 신을 신지 않아도.

자신이 이렇게 빛날 수 있음을 그녀는 몰랐다.

“……너무 아름다워요.”

애니는 그렇게 말하고선 미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조심스레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애니의 손을 미아가 꼭 쥐었다.

“모든 게 애니 덕분이야.”

“아니에요. 제가 뭘 했다고요.”

“애니가 곁에 있으면, 나는 용기가 나.”

“……미아 님.”

애틋하게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시간이 되었다 알리는 시중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둘의 혼인은 황궁 내 정원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미아가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가 떴다.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는 것, 영원을 약속하는 것.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의 모든 결말이 그러했다.

이번엔 그녀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차례였다.

천천히 방을 빠져나가 복도를 걷자,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특별히 초청한 음악대가 연주를 하는 모양이었다.

둘의 결혼을 하늘도 축복하는 듯 아름다운 황혼이 지고 있었다.

주황빛 햇빛이 황궁을 노랗게 물들였다.

“……세상에.”

미아의 입이 벌어졌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보는 얼굴들 틈으로 신시아의 얼굴이 보였다.

신시아 역시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혼인을 축복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걸음했다는 것은.

이안을 여전히 황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뜻했다.

“미아…….”

자리에 앉아있던 카일렌은 모습을 드러낸 미아에 놀라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신과 혼인하는 날에, 미아가 무슨 모습이었던가.

이토록 찬란하고 눈부셨던가.

아니었다.

그때 둘이 치른 혼인은 이런 조촐한 혼인식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성대했지만, 이런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카일렌의 중얼거림을 들은 올리비아의 얼굴이 굳었다.

‘재혼인 주제에. 저렇게 화려하게 꾸미고 등장하다니.’

그들의 혼인을 축복하는 이가 아무도 없으리라 믿었던 것은 올리비아의 착각인 듯했다.

귀족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비아를 향해있던 시선이 이제는 모두 미아를 향했다.

그들은 평범한 신부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망가진 신부를 상상했을 터였다.

폭군이 선택한 여자.

그 여자가 이리 정숙하고 우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를 바라보는 이안의 얼굴엔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날카로운 인상의 그가, 무심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쳐내던 그가.

저런 눈빛을 하고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못했다.

물론 그 역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으니, 모를 터였다.

그가 지금 아름다운 자신의 신부를 어떤 얼굴로 보고 있는지.

“아름다워, 미아.”

이안은 저를 향해 걸어오는 미아를 향해 속삭였다.

미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안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리 많은 분들이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나는 그대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 알고 있었어. 모두 그대의 아름다움에 말을 잃은 것 같군.”

“어색해요. 이런 시선을 받는 일.”

“그대는 좀 더 누려도 돼.”

“……이안 경, 약속해요.”

“무엇이든.”

“듣지도 않고요?”

“응.”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미아가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떠나지 마요. 죽음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어요.”

“언제부터 이리 성격이 급했지. 우린 곧 영원을 맹세할 거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약속하고 싶지 않아요.”

그들의 앞에 선 성자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안은 신을 믿지 않았으니, 어쩌면 미아에게 대고 맹세하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맹세해.”

“영원히?”

“영원히. 너를 사랑할 것이다, 미아.”

이안이 고개를 숙여 미아의 입술을 물었다.

그들의 낯뜨거운 애정행각에 손님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부끄러움은 늘 남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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