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제 지지 않아
“어떠세요?”
미아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드레스를 보았다.
미완의 드레스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제껏 보았던 어느 드레스와도 견줄 수 없을만큼.
“드레스는 너무 아름답지만…… 저와 어울릴지, 잘 모르겠어요.”
“어울릴 거예요.”
올리비아는 괜찮을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언제 여기 온 거지?
미아가 올리비아를 돌아보고 당황한 듯 입을 닫았다.
“자리 좀 잠시 비켜주시겠어요?”
재단사는 올리비아의 말에 미아를 바라보았다.
미아는 탐탁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재단사가 조심스럽게 드레스 자락을 들고 방을 빠져나가자, 올리비아는 미아에게 다가와 섰다.
그 덕에 올리비아와 미아가 한 거울 안에 같이 비쳤다.
누가 보아도 탐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올리비아였지만, 어쩐지 반짝이는 것은 미아였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숙여 미아를 내려 보았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두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름다워요, 미아 양. 역시 사랑받는 여자만이 내뿜는 싱그러움은 다르네요.”
“……올리비아 양도 여전히 아름다우신데요.”
“그런가요? 전 요새 고민이 많아서…… 영 얼굴이 상했어요. 그래도 그런 말 들으니 기쁘네요, 감사해요.”
올리비아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미아의 손을 끌어 소파로 향했다.
미아가 그런 올리비아에게서 손을 조심스레 빼내어 앉자, 올리비아는 텅 빈 손을 쥐었다가 놓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아니에요. 오늘은 얘기만요.”
사실 이곳에서 시중을 부려본 적이 없는 미아이기에, 차를 내어주려고 하면 난감한 차였다.
다행히 거절해준 올리비아 덕에 미아는 조금 자세를 편히 하고 앉을 수 있었다.
“이제 눈에 보이네요, 좀.”
아이를 가진 것이 눈에 보인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복부를 잠시 응시하던 올리비아가 미아와 눈을 맞췄다.
미아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보호하려는 듯 손을 들어 배를 가렸다.
“아, 그렇죠…….”
“좋으시겠어요. 아이를 만날 일이 무척 기대되시고요.”
다리도 붓고, 쉽게 지치고, 배가 당기고.
불편한 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올리비아의 말처럼 미아는 서서히 자신의 배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네, 좋아요.”
미아가 곧장 답하자,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잠시 굳었다.
좋겠지, 역시. 아이를 가진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갖는 것이 이제 올리비아의 바람이었다.
“비결이 뭐예요?”
“네? 비결이라니요?”
“아이를 가진 비결이요. 저도 시도하고 있는데, 잘 되지 않거든요.”
이런 대화는 친밀한 사이에서나 나눌 법한 대화였지, 두 사람이 나눌 대화는 아니었다.
무슨 말로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올리비아가 허리를 숙여 미아의 쪽으로 몸을 굽혔다.
“누구보다 열심히인데도 안 되니, 속상하지 뭐예요.”
“…….”
낯이 뜨거웠다.
아무리 카일렌에게 남은 감정은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전히 조금 거북했다.
그것을 모르는지, 알고서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올리비아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물론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올리비아가 아무리 유혹해도, 카일렌은 그 유혹에 한 번도 넘어와 준 적이 없었다.
마치 그들이 혼인한 것이 둘 사이의 종말인 것처럼.
“그래도 노력하다 보면 저도 미아 양처럼 아이를 가질 수 있겠죠?”
“……네.”
미아는 간신히 입을 열어 답했다.
올리비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코를 찡긋거려 웃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미아 양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선물이요?”
“네. 미아 양이 가장 궁금하고 걱정하실 이야기요. 가족분들의 이야기.”
“가족이라면…….”
“네. 미아 양의 가족분들요.”
미아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올리비아가 손을 뻗어 미아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서늘한 올리비아의 감촉이 불편했지만, 그녀는 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제 가족들을 어떻게…….”
“연락이 닿았어요. 아무래도 걱정이 많으실 것 같아서, 사람을 보냈거든요. 믿을만한 제 하인을 보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야기도 잘 전했어요. 미아 양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안 경과 함께 아이도 가지고 행복하다고.”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 이안을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물론 혼인을 올리기 전에 연락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걸 전하는 것은 미아의 일이어야 했다.
미아는 그제야 저에게 왔던 서신을 이해하게 되었다.
신이 노한 이유는, 자신이.
자신이 카일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자신이 죄인이었다.
부정한 사람이자, 남편의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었다.
“……그걸 왜, 올리비아 양이.”
“누구라도 전해줘야 하는 소식이잖아요. 곧 혼인도 올린다면서요? 혼인 사실을 갑자기 알면 놀라실 수도 있고, 소문이 퍼져 나가기 전에 대책도 세우셔야 하고.”
소문, 그래.
미아가 이안과 혼인했다는 소문이 돌면 카일렌에게 쏟아지던 비난의 화살은 모두 온전히 미아를 향할 것이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안과 혼인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가족에게 말할 용기를 내어서였다.
스스로 어떤 마음으로 달브를 떠났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가족을 위해서 자신이 나설 각오 역시 되어있었다.
달브 황국민들이 돌을 던진다면 그 비난 역시도 온전히 저를 향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파문을.
파문을 시켜달라 빌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을 올리비아가 망쳤다.
그 결심을, 올리비아가 감히 망쳤다.
그것을 안 이상 미아는 가슴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켜 넘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올리비아 양이 전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야, 미아 양은 할 수 없고 나는 할 수 있었으니까요?”
미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끌어내듯 올리비아의 어깨를 쥐어 일으켰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맞부딪혀 오는 미아의 태도가 흥미로웠다.
그래야지.
그 가면 속에 항상 숨기고 있던 그 날서고 비틀린 마음을 언젠간 드러낼 줄 알았다.
미아라고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말도 안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어리석게 속은 거다.
순진한 여자라고, 순한 여자라고.
올리비아는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치명적이도록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건가요, 미아 양.”
“내 가족들을 건드리는 건 못 참습니다.”
“건드리다뇨. 그들도 진실을 알아야지 않나요? 맞잖아요.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올리비아 양은 자격이 없습니다. 올리비아 양은 카일렌과 간통한 것도 모자라…….”
“그렇죠, 이게 당신의 본 모습이지.”
올리비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아는 그 모습에 당황했다.
마치 올리비아가 자신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즐겁게 웃고 있었으니까.
미아가 올리비아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떼려고 하자, 올리비아가 그 손을 붙잡았다.
“좀 더 해봐요.”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뭐 하긴요. 미아 양의 본모습을 보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다 봐야 할 텐데. 미아 양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 상냥한 낯빛에, 온갖 고난과 역경은 다 자기 것인 마냥 구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가련해서. 내가 남자라도 한 번쯤은 돌아보겠어요.”
“…….”
올리비아의 눈빛이 번뜩였다.
미아는 그제야 위협을 인지했다.
올리비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잖아요. 그게 전부일 뿐이잖아.”
“그만해요.”
“최소한의 아름다움도 갖추지 못하고, 가진 것도 없는 여자. 그런 여자를 카일렌 전하가 고른 건 다 만만하기 때문이죠. 지금이야 이안 경의 사랑을 받고 있다지만, 마음이 얼마나 갈까요. 미아 양, 가족들의 말을 뼈에 새기세요. 그들은 미아 양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미아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거칠게 올리비아를 뿌리치는 손길에 일부러 올리비아가 과장되게 넘어졌다.
쨍그랑, 하고 촛대가 바닥을 굴렀다.
“무슨 일이, 어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중이 놀라 들어와 올리비아를 일으켰다.
올리비아는 기절한 것처럼 몸에 힘을 쭉 뺐다.
눈을 감은 올리비아를 보고 미아는 제 손을 감싼 채 몸을 물렀다.
“웬 소란이지.”
이안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과 함께 걷고 있었던 듯 그의 뒤에 서 있던 카일렌이 시중들이 일으키고 있는 올리비아를 보고 걸음을 옮겼다.
“저, 그러니까. 이 상황은…….”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카일렌은 일말의 의심이나 경계조차 없이 쓰러진 올리비아를 둘러업었다.
둘의 사이가 행복하다거나, 따뜻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남편이 된 도리를 다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괜찮나.”
이안은 미아를 살폈다.
미아는 떨리는 손으로 이안의 손을 찾아 쥐었다.
이안이 그녀를 다독이듯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일렌이 입을 열었다.
“제 아내가 무례를 범한 모양이군요.”
“…….”
“안타까울 지경이군. 쓰러진 사람은 당신의 아내인데, 남의 여인을 걱정하다니.”
“남의 여인인지 아닌지는, 지켜봐야겠죠.”
카일렌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보던 미아는 온몸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안이 그녀를 따라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가족들이 다 알았어요.”
‘역시 올리비아의 짓이었군.’
이안은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가족이 돌연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였는데, 역시나.
“가족에겐 내가…….”
“이제 돌이킬 수 없어요.”
“돌이킬 수 없다니.”
“직접 전하겠어요.”
“무엇을.”
“혼인 소식과 함께, 파문시켜달라는 말을요.”
“파문?”
미아는 가족에게 그녀를 버려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오직 그를 위해서.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후회는 항상 늦어요. 지금은 지금만 생각할래요. 나는 내 가족도 포기할 수 없고, 이안 경도 포기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당신, 스스로를 포기하는 건가.”
“아뇨.”
미아는 이안에게 손을 뻗었다.
이안이 미아의 손을 쥐어 일으켰다.
“저는 당신을 선택한 거예요.”
“나를.”
“네, 이안 경을요. 그리고…… 전에 하지 못했던 말이 있는데. 혹시 아이의 이름 짓는 게 부담스러우면…….”
이안은 미아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부담스럽지 않아. 나도 내내 말하고 싶었어, 그대에게.”
“…….”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할게. 살아 돌아와서, 아이의 이름을 주겠다고. 그러니까.”
“…….”
“나와 내일 혼인하자.”
“내일요?”
미아가 놀라 되묻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돌아와야 하니까, 한시라도 빨리 그대를 보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