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약속을 위해
“전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카일렌은 올리비아의 물음에도 별 대답이 없었다.
윌리엄이 그들을 바트르 황궁으로 초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든 생각은, 미아를 볼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미아를 보고 싶었다.
단순히 그거 하나였다, 목표는.
올리비아와 함께하는 삶은 벌에 가까웠다.
한때의 어리석음을 올리비아를 볼 때마다 곱씹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올리비아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껍데기라도 움켜쥐는 것이 좋았다.
“듣자 하니, 어제 황제 폐하와 이안 경이 다퉜다더라고요.”
“그냥 다툼 정도가 아니던데요.”
“그렇죠. 아무래도 다투긴 어렵죠. 황제와 다투는 이가 어딨어요, 세상에. 이안 경이 워낙 안하무인이라 안 그래도 그간 많이 참았을 거예요. 윌리엄 폐하가 벼르고 있어도 한참을 벼르고 있었을 텐데 거기에 기름을 끼얹은 겪이라니. 들불처럼 분노가 퍼져 나가도 별수 없죠.”
‘굳이 가겠다면 말리지 않으마. 아이가 무사한지 보고 오렴.’
메릴린은 그렇게 말하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지만, 그런 날도 살다 보면 찾아오는 것이었다.
카일렌은 부모의 신임을 모두 잃었다.
그럼에도 황태자의 자리에 두는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기뻐 보이네요, 올리비아.”
카일렌은 중얼거리듯 나직이 말하며 올리비아를 보았다.
신이 나서 말을 잇던 올리비아가 멈칫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기뻐 보이지 않은 탓이다.
어째서일까?
누구보다 즐거워해야 할 사람이 카일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제껏 혐오했던, 싫어했던 이안의 입지가 드디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인데.
게다가 이안과 미아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기까지 했다.
이안이 전쟁터를 향해 출정한다면, 그사이에 미아를 다시 노려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카일렌은 그런 기회보다 다른 것을 더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무엇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시죠?”
“……올리비아 양이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우리는 부부잖아요, 그러니 제게 털어놓으면…….”
올리비아의 말을 끊은 것은 카일렌의 헛웃음 소리였다.
그의 이런 냉소적인 웃음을 이제껏 맞이할 일이 없었던 그녀이기에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카일렌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리비아를 보았다.
“부부?”
“저희는 부부죠! 누가 뭐래도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
“그래, 그대와 나는 부부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대와 부부가 되기를 조금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올리비아의 표정이 종잇장 구겨지듯 순식간에 구겨졌다.
그럼에도 카일렌은 타격 하나 입지 않은 사람처럼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대와 나는 부부의 연을 맺기는 했으나, 이가 도리에 어긋났다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죠? 어쨌든 우리는 혼인했고, 당신은 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해요.”
“그래, 그놈의 약속!”
카일렌이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둘의 사이는 누가 보아도 혼인을 막 마친 행복한 부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카일렌의 분노에 올리비아도 지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주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안 보입니까?”
“그냥 껍데기를 데리고 살기 위해서 전하와 혼인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껍데기라도 그럴싸한 사람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겁니다, 그대는.”
“뭐라고요?”
카일렌이 손을 뻗어 올리비아의 턱을 쥐어 올렸다.
올리비아가 날 선 눈빛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렇지 않고선 누가 그대를 받아주겠습니까. 질투심과 욕망에 눈이 멀어, 남의 아이까지 함부로 죽이려든 여자를.”
“정말 먹일 생각까지는 없었다고 몇 번을 말해요! 대체 언제까지 그 잘못을 붙들고 나를 탓하실 겁니까?”
“그게 지겨우면 당장이라도 도망가세요. 언제나 길은 열려 있습니다.”
카일렌은 더는 한 공간에 있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를 떴다.
빠져나가는 카일렌의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던 올리비아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숄을 추켜 올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카일렌은 이런 상황에서 미아를 걱정하는 듯 보였다.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는데도 고작 미아를 걱정하여 약한 모습을 보이는 꼴이라니.
뭐, 괜찮았다.
그럴수록, 제 계획만 더 완벽해지는 꼴이었다.
똑똑.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비아는 누군가 저를 찾고 있다는 시중의 말에 씩 웃었다.
❀ ❀ ❀
“언제까지 날 안 볼 셈이지.”
“…….”
“미아.”
미아는 몸을 돌아누웠다.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안을 어떻게 이 상황에서 구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안 되겠어요. 제가 제 불경을 사과드려야겠어요.”
“애초에 너는 불경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무엇을 사과하겠다는 거지.”
“황제의 신체에 위해를 가한 건 충분한 불경이에요.”
“후회해?”
이안이 손을 뻗어 미아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미아는 제 뒤로 다가오는 이안의 숨결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내 손을 뻗어 제 어깨를 감싼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후회하진 않아요. 아무리 황제라도, 당신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으니까.”
“그럼 무엇이 문제지. 그대가 사과할 불경은 역시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사과를 하면 어쩌면, 벌을 내리겠단 말을 철회해주실지도 모르잖아요.”
이안은 미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품으로 당겨 안자, 그녀가 이안의 품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미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대가 저지른 불경 때문에 내린 벌이 아니니, 그대가 사과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안 경…….”
“그대는 나를 너무 사랑하는군, 잠시도 떨어져 있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니.”
미아는 이안의 말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곧 전쟁터로 떠나게 생겼는데 속이 너무 좋은 소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안이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실제로 미아는 이안을 그만큼이나 사랑했다.
“왜 아무 말이 없지?”
“정말 꼭 가셔야겠어요?”
미아가 몸을 틀어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이 자연스레 그녀의 고개 아래로 팔을 넣어주며 팔베개를 해주었다.
밤새 뒤척거리느라 잠을 못 잔 미아의 까칠해진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가 뗀 이안이 말했다.
“돌아올 땐 모든 것이 변해 있을 거야.”
“같이 가요, 그럼.”
“전쟁터에 아이를 가진 여자를 데려가는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나를 무능한 남편으로 만들고 싶다고 해도, 그것은 안 될 일이다.”
“그럼 혼인해요.”
미아가 말했다.
미아가 먼저 혼인하자는 말을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
“적어도 저와 혼인하신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살아 돌아오시겠죠. 멀쩡히, 살아서. 저는 기다릴게요. 이안 경을 기다리겠다는 약조를 꼭 해야겠어요. 그리고 가족에게도 알리겠어요.”
“가족에게 무엇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있다고. 그것이 염려스럽거나, 싫다면 나를 찾아오라고.”
“…….”
“아이가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안 경을.”
아이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은, 그와 지냈던 삶의 터전에서 그를 기다리겠다는 말이었다.
그가 찾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춥고 시린 땅에서 버티겠다는 것을 뜻했다.
이안은 미아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참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그러쥐었다.
“그대는 정말이지, 내 예상을 늘 뛰어넘어.”
“……무엇을 예상하셨는데요.”
“그러게, 내가 무엇을 예상했더라.”
그가 그녀의 입술을 찾아 고개를 숙일 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다.”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이어 들리자 미아가 이불을 들쳤다.
드러난 맨살이 민망해 이불 안으로 고개를 숙이자, 이안이 몸을 일으켜 대충 벗어두었던 제 옷가지를 걸쳤다.
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향해 씩 웃어본 그가 문을 열었다.
“뭐 하길래 이제야 문을…… 어머.”
“어머니, 이른 아침부터 찾아주시는 것은 곤란하지 않습니까.”
“혼인도 안 한 남녀가 한 방에서 잘하는 짓이구나.”
“저희를 더 애달프게 만든 사람은 어머닙니다.”
미아는 이미 상황을 다 아는 것 같은 베아트리체의 말에 그대로 사라지고 싶다 생각하며 이불 안으로 고개를 쏙 숨겼다.
이안은 그런 미아를 배려한 듯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무엇 때문에 찾아온 겁니까.”
“네가 바라는 것이 있을 것 아니냐, 전쟁터로 떠나기 전. 미리 듣고 준비하기 위해 왔다.”
“필요 이상으로 신경 써 주시네요, 평소답지 않으시게.”
이안이 팔짱을 낀 채 베아트리체를 내려봤다.
베아트리체는 그런 이안 보고 따르라는 듯 걸음을 옮겼다.
복도 옆에 난 창밖의 풍경은 비가 그친 뒤 더욱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마치, 그들의 앞길에 축복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안은 이 길을, 이 날씨를 미아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죽으러 가는 아들을 위해 무엇을 못 하겠니.”
“바라시던 숙원이 이뤄지리라 기대라도 하신 모양입니다.”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베아트리체는 걸음을 멈추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찬란한 햇빛이 베아트리체 위로 쏟아 내렸다.
“내가 너에게 가르치지 못한 것, 아니 누구도 누구에게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있지.”
“…….”
“그게 바로 욕망이자, 꿈이었다.”
“꿈?”
돌연 감상에 젖은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낯선 듯 이안이 되물었다.
베아트리체는 이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리를 빼앗기면 생길 줄 알았다. 네가 평생 지켜온 그 자리마저 빼앗긴다면, 적어도 그걸 되찾으려 욕심을 부릴 줄 알았어. 옆에 욕망에 눈이 먼 아름다운 여자도 앉혀 보았고, 너를 일부러 자극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넌 늘 텅 빈 눈을 하고 있었지. 차가운 인상 때문에 모두 너를 겁냈지만, 네가 두려운 것은 그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
“아무래도 좋다는, 사랑한 것이 없는 사람의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라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고 벌을 줄 수 있지.”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그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왔고, 가진 것을 지켰다.
가졌던 것을 잃었다고 후회하지도 않았다.
왜 사는가,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런데 미아가 오고 나서, 미아를 보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너에게 미아 양은 구원이야.”
“……그래서 구원을 찾자마자, 떠나보내시는 겁니까?”
“이게 내 마지막 시험이다. 살아오거라, 이안.”
베아트리체가 말을 이었다.
그녀는 가장 다정하고도 잔인하게 그를 낭떠러지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