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폭풍우와 벌
“아무리 그렇다고 황제의 방에…….”
“그래.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방에 들어오는 건 실례지.”
“그걸 알면서 여기 들어온 거야? 넌 대체 누구의 명으로 이불을 갈고 있는 거지?”
매서운 물음은 애꿎은 시중을 향했다.
시중이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바들바들 떨자, 윌리엄이 헛웃음을 지었다.
“두렵긴 한가 보지, 이제 와서?”
“네가?”
이안이 끼어들었다.
윌리엄의 시선이 날카롭게 이안을 향했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아랫사람 앞에서 이렇게 구는 것은 도리에 어긋날뿐더러, 윌리엄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저 시중이 두려워하는 게 너인 것 같아, 네 눈에는?”
“이안 다르뷔.”
노여움이 가득 담긴 윌리엄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이안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기서 설령 정말 호위병이라도 부르면, 그래서 싸움이라도 붙으면 누가 봐도 불리한 것은 이안이었다.
물론 이제껏 불리해 보인 모든 싸움에서 지지 않았던 이안이지만, 이번은 달랐다.
황제가 죽이고 싶다면, 언제든 이안에게 칼을 빼어들 사람이 수 백이었다.
“그쯤 해, 정말 목숨을 잃고 싶지 않으면. 내가 형을 살려둔 건 관용이자 자비야.”
“그 관용은 이제 필요 없어.”
이안은 천천히 윌리엄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윌리엄의 어깨를 쥐어 채듯 세게 쥐며 눈을 맞췄다.
“네가 내 것을 탐내기 시작한 이상. 나도 더 이상 너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거든.”
“호위병!”
윌리엄은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큰 소리를 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이안은 검을 빼 들었다.
“미아, 뒤로 물러.”
“이안 경, 그만 하세요. 윌리엄 폐하,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세요.”
“미아 양께서 끼어드실 문제가 아닙니다.”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형제가 다투는 모습을 보이면…….”
“황제의 권위만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지.”
요란스러운 소리에 걸음을 옮긴 것이 기사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베아트리체는 뭐 하는 짓이냐는 듯 그들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어머니, 황제의 권위를 떨어뜨린 것은 제가 아닙니다.”
윌리엄이 항변하듯 말했다.
“아까는 형이 황제의 권위를 바닥에 떨어뜨려 짓밟더니, 이제는 어머니께서 황제의 말에 반하고 계시는군요.”
“그럼 내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이는 것을 보아야겠니?”
“못 보시겠습니까? 새삼스러우시네요.”
새삼스럽다.
그 말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한 윌리엄이 기사가 들고 있는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안에게 겨누었다.
“불경의 죄를 무슨 벌로 받을 거지, 형?”
“네가 나를 벌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는데.”
“황제의 권위에 의문을 품는 거야? 그것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형이? 형이 앗아간 목숨만 해도 수백 명이야. 그러면서 이제 와, 황제가 누굴 해칠 수 없다 믿는 것은 아니겠지.”
윌리엄의 말에 이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윌리엄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그래, 그럼 해봐.”
“이안 경!”
미아가 비명을 지르며 이안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번쩍하고 번개가 치는가 싶더니, 곧이어 우람한 천둥소리가 들렸다.
미아는 몸을 떨며 귀를 틀어막았다.
이안이 그녀의 고개를 끌어안으며 윌리엄을 마주 보았다.
“그래,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숙이고 들어와야 하는 법이지.”
“…….”
“빌어봐.”
“윌리엄.”
그만하라는 듯 베아트리체가 목소리를 높였으나, 윌리엄은 이미 이성을 잃은지 오래였다.
이안은 그런 윌리엄의 눈을 올곧게 들여다보았다.
빤히 읽히는 느낌, 온몸을 훑는 차디찬 느낌에 윌리엄은 사력을 다해 이를 물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정말 아무것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가만히 윌리엄을 응시하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
“무엇을.”
“네 불청객들. 그렇다면 나도 이쯤하고 물러날 테니까.”
“내 손님들이야. 뭣도 아닌 형보다 적어도 더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형은 대체 뭐야? 쥐뿔 가진 것도 없으면서, 고작 폐위된 폭군인 주제에 나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 나는 황제야. 대 바트르 황국의 황제라고.”
“그만해, 윌리엄.”
“어머니도 그만 좀 하세요! 순수한 피를 타고난 나랑 저 저열한 인간이랑 같아?”
윌리엄의 날카로운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탓이다.
이안의 앞에서, 또 베아트리체의 앞에서.
이안의 출생에 관한 말을 대놓고 던진 사람은 윌리엄이 처음이었다.
“…….”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거대한 빗소리만이 무겁게 실내를 적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압박감을 내치고 정적을 깬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미아였다.
짝!
제법 큰소리와 함께 윌리엄의 고개가 돌아갔다.
미아는 뜨겁고 얼얼한 통증이 이는 제 손을 저도 모르게 움켜쥐며 입을 벌렸다.
이렇게 큰 소리가 날 줄, 이렇게 세게 때릴 줄은 미처 자기 자신도 몰랐다는 듯이.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지금 뭐 하신 겁니까, 감히 황제한테! 남자에게 버림이나 받은 여자가!”
“그렇죠, 그게 당신의 본심이죠.”
“당신?”
“저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다 느껴졌어요. 저를 무시하는 눈빛, 그리고 형을 경멸하는 눈빛. 하지만 그거, 열등감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열등감? 내가 고작 너 따위에게…….”
“그래요. 고작 우리에게요. 고작 폐위된 황제와 황태자에게 버림받은 여자에게요. 특출날 것도 없는 두 사람을 왜 그렇게 두려워하죠? 진짜 마음을 주고받은 적도 없고, 황위에 오른 후로 한 번도 제대로 황제다워 본 적도 없으시겠죠.”
“한마디만 더 하면 그 목을 자르겠다.”
윌리엄이 진심이라는 듯 미아의 목에 칼을 댔다.
기사들도 바짝 긴장해 그녀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안이 미아를 제지하려는 듯 품으로 그녀를 당겼으나, 미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실 수 있겠어요?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긍지, 형과 다르다는 마지막 명분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그거 아니겠어요? 여기서 제 목을 베신다면, 명분마저 사라지실 테죠.”
미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저를 향한 것이 보였다.
“똑똑히 보세요. 이게 당신들의 황제입니다. 그저 황제의 자리라는 욕심만 탐내고 황제다운 게 무엇인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 사람.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하면 언제든 목을 베겠다 칼을 겨누는 사람. 그게 바로…….”
“그만!”
베아트리체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듯 말했다.
미아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베아트리체가 손을 뻗어 미아를 제 쪽으로 끌었다.
“윌리엄의 말이 맞아.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
“어머니가 끼어드실 일이 아니라고…….”
“이안은 저의 목숨을 담보로 미아 양을 구하러 다녀왔다. 달브에선 새로운 황태자비를 들였고, 그게 바로 이안의 아내이자 전 황후였던 올리비아지. 확실히 황실의 명예를 실추시킨 건, 이안이다.”
“…….”
“그 벌로 이안을 전쟁터로 보내라.”
“전쟁터라면…….”
“원조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어디서요.”
“멜란에서.”
멜란 왕국은 아이가와 인접한 국가로, 바트르 황국과 현재 교역이 활발한 시기였다.
그런 멜란 왕국에서 원조 요청이 왔다니.
전쟁터로 보내 달라니.
미아는 불안한 시선으로 이안을 보았다.
“지금 제게 출정 명령을 내리시라는 겁니까.”
“그래.”
베아트리체의 말에 윌리엄은 할 말을 잃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은 그가 말했다.
“대신, 미아 양은 궁에 두겠습니다.”
“이안 경!”
“그래. 그럼 이렇게 대화는 갈무리 짓도록 하지. 방은 다른 방으로 바꿔주라 이르겠다. 그리고 식사 자리를 갖자꾸나. 손님이 왔으니 인사는 해야지.”
베아트리체는 윌리엄에게 이만 칼을 거두라는 듯 눈짓했다.
마지못해 윌리엄이 칼을 거두자, 베아트리체의 손이 미아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이안에게도 걸음을 옮기라는 듯 눈짓했다.
“전쟁이라뇨, 잠시만요. 폐하!”
미아는 이대로 나갈 수 없어 몸을 틀었으나, 베아트리체가 잡아채는 힘이 더 셌다.
이안은 괜찮다는 듯 미아의 어깨를 감쌌다.
천둥소리가 다시 그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 ❀ ❀
“…….”
“좀 더 불을 올려달라 이르겠다.”
미아의 몸이 떨리는 것은 추위 탓이 아니었음에도 이안은 그렇게 말했다.
한참을 되짚어 생각해 봐도 자신이 나선 것이 잘못인 것만 같았다.
자신이 나섰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안을 모욕하는 말은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이안이 먼저 윌리엄의 권위를 욕보였다 하더라도, 이안의 출생을 부정하는 말을 모두의 앞에서 한 윌리엄을 미아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이 평생 이안이 품어왔을 약점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던 탓이다.
“이안 경.”
“원조를 청했다지만, 전쟁이 길어질 기미는 없다. 원조로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저 두 나라 간 우애의 형식을 갖추는 거니 위험할 리도 없고.”
“그래도 전쟁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 리가…….”
불안한 듯 연신 입술을 물어뜯는 미아의 옆으로 이안이 걸어왔다.
자리를 잡고 앉은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 미아의 배 위에 얹었다.
“어머니가 놀라면, 아이도 놀란다는데.”
“…….”
“아이가 놀랐겠군.”
“…….”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는 손길이 따뜻했다.
이안은 드물게 애정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곧 고개를 숙여 미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댔던 이안이 가볍게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 걱정되는가.”
“…….”
당연한 걸 뭘 물어.
미아가 답을 못하고 입술을 씰룩이자 이안이 웃었다.
“어머니는 나를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 벌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다르다.”
“다르다뇨?”
돌연 전쟁터로 이안을 보내버린 베아트리체를 안 그래도 원망하고 있던 차였는데.
마치 그 속을 빤히 들여다본 듯 이안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면, 아무도 나의 존재를 더 부정하지는 못하겠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위험한 게 변하지는 않잖아요. 전쟁이라고요, 이안 경. 전쟁은…….”
미아는 카일렌의 전사 소식을 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차라리 정신을 까무룩 잃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만큼 고통스러웠던 그 밤을.
내내 울며 지새우던 며칠을, 미아는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이안이 그런 미아의 마음을 눈치챈 듯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나에게는 행운이 있어.”
“…….”
“널 만난 게 내 행운이야. 그러니 난 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