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신의 뜻? (77/95)

77화. 신의 뜻?



 

“괜찮습니까.”

윌리엄은 휘청이는 미아에게 손을 뻗어 미아를 붙잡았다.

미아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미아, 너는 황후가 될 거야. 너는 내가 가르치고 키웠으니 누구도 그 역할을 잘 수행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너보다 더 황후에 걸맞는 사람은 없으니.’

오빠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환청처럼 울리는 것만 같았다.

가족들은 무사할까.

미아를 걱정하는 것으로 모자라 혹시 불이익이라도 당했다면.

미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윌리엄이 답지 않게 안타까운 표정을 해보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아무래도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이 나시는 모양입니다.”

“…….”

“듣자 하니, 미아 양이 카일렌 황태자를 원망하는 마음 때문에 달브에 저주가 내렸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인데요.”

윌리엄이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진심으로 미아를 걱정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의 그런 태도나 말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정말 달브 국민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녀의 가족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몇 차례 자신을 찾겠답시고 찾아갔겠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사람들에게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자신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게 할 수는 없었다.

“걱정되시겠습니다.”

“……저, 이 말을 하시려고 부르신 걸까요?”

때마침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시중이 들어왔다.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윌리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미아의 찻잔을 채워주었다.

푸르게 우러난 찻물이 평소라면 궁금하고 신기했을 미아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찻잔에 손조차 가져다 댈 수 없었다.

따라준 성의를 봐서 몇 모금이라도 삼켜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가 미아 양을 부른 건, 미아 양께 묻기 위해서입니다.”

“묻다뇨, 무엇을.”

시중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미아는 어떤 물음이 들려도 동요하지 말아야겠다 굳게 다짐을 하며, 창백한 낯빛으로 되물었다.

“제가 만약 달브에 연락을 취한다면. 그래서 미아 양의 가족들을 아이가로 보내 달라 청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저의 가족을 아이가로요?”

“네. 아이가가 싫다면 다른 곳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일단, 바트르 황국 내에 미아 양이 친숙할 만한 곳을 말한 것일 뿐이니까요.”

윌리엄의 물음은, 물음보다는 제안에 가까웠다.

미아는 제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선택지 앞에서 당황을 감추기 어려웠다.

태연하자고 굳게 한 노력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게 가능한 일일지…….”

미아의 집안은 세력이 약할지언정, 영지를 오래 지키고 버틴 가문이었다.

비록 전쟁으로 인해 미아의 가족 외에 모든 대가 끊겼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이 아이가로 옮겨온다면, 그건 곧 가문을 포기하는 것을 뜻했다.

윌리엄은 아마 이런 자세한 내막까지는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미아의 가족이 몹시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그녀가 원한다면 그 상황에서 가족을 꺼내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라 여길 테니까.

“미아 양은 한 황국의 황제의 힘을 우습게 아는군요.”

윌리엄이 쓰게 웃었다.

미아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윌리엄은 마음이 비틀어진 상태였다.

열등감은 쉽게 사람을 잡아먹었다.

“너무 꿈같은 얘기라서요.”

“미아 양께는 사랑받은 티가 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베풀어준 건 다른 누가 아닌 미아 양의 가족이겠지요.”

“…….”

“그러니, 잘 생각해보세요. 그 은혜에, 사랑해준 마음에 이런 곤란으로 답하는 것이 맞는지. 그건 아닐 겁니다.”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고선 몸을 일으켰다.

단칼에 거절해야 했다.

그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제안을 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가족을 언급하는 그의 말에 미아는 한 번 흔들렸다.

그리고 이런 한 번의 흔들림이 결국 그의 말을 끝내 이곳에 이르게 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

“모쪼록 친애하는 형이 괜한 오해를 받지 않는 것.”

“오해라면, 어떤.”

“행여 형이 관심도 없는 황제의 자리를 다시 탐내고 있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

윌리엄은 응접실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친히 문을 열어주었다.

자신은 할 말을 마쳤으니, 이제 미아가 고민하는 일만이 남았다는 뜻 같았다.

미아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저를 빤히 보며 다시 여유를 되찾고 웃는 윌리엄을 지나쳐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걸음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음이 뒤로 처졌다.

❀ ❀ ❀

‘친애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빠에게.

잘 지내시냐는 물음조차 무색하고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하냐는 물음을 할 수밖에 없는 저를 용서치 마세요.

저는 지금 바트르 황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죽을 뻔한 위기에서 다행히 소중한 사람의 도움을 받고,’

여기까지 쓴 미아는 펜을 내려두었다.

더 이어 쓸 수 없었다.

이어 쓴다고 해도 어떻게 편지를 무사히 전한단 말인가.

설령 이안에게 이 서신을 전해주기를 부탁한다고 해도, 그래서 이안이 그 청을 들어준다고 해도.

윌리엄의 시야를 벗어나 행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목표가 생긴 윌리엄이 자신의 행동을 내버려 둘 리도 없고.

“무엇을 하기에 들어오는 것도 모르지.”

미아는 돌연 들린 이안의 목소리에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이안의 시선은 그녀가 쓰고 있던 서신에 가 닿았다.

뒤늦게 손을 들어 조금 가려보려 했지만, 이미 이안은 서신을 읽은 듯 미아의 옆에 앉았다.

“서신을 쓰고 있었군.”

“그게, 아무래도…….”

“소식을 들었어?”

이안이 말하는 소식이라는 건, 역시 카일렌과 올리비아의 결혼 소식일까.

미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과 나눈 대화를 이안에게 전해야 한단 생각은 들었지만, 괜히 이안이 곤란하거나 속상해하는 것은 싫었다.

이안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미아는 이 이야기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전달해야만 했다.

“누가 전했지?”

“……그게, 황제 폐하께서.”

“윌리엄이 감히 널 불러서, 그 소식을 전했다는 건가.”

“…….”

괜히 부른 건 아닐 테고.

분명 전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것일 텐데, 그건 무엇이었을까.

이안은 가늠해 보았다.

그동안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던 미아가 가족에게 연락을 하기로 결심한 것과 무관하지 않겠지.

윌리엄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상대의 나쁜 패도 스스럼없이 꺼내는 남자였다.

미아가 가장 마음을 쓸 문제를 건드렸겠지, 안 봐도 뻔했다.

“무어라 했군.”

“……네.”

“가족을 들먹이며 협박이라도 했나?”

근심 어린 미아의 얼굴에 당장이라도 이안은 윌리엄을 당장 찾아가 죽이고픈 마음이 들었다.

미아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가족임을 이안도 모르지 않았다.

“협박한 것은 아니고…… 제안하셨어요.”

“무엇을.”

“가족들을, 아이가로…… 데려오는 게 어떻겠냐고.”

“아이가?”

왜 하필이면 아이가일까.

다른 바트르의 좋은 땅도 있는데.

그건 더 내어주지는 않겠다는, 더 내어줄 수는 없다는 일종의 알림이자 경고였다.

굳이 이안이 자리를 비운 사이, 미아를 불러 그런 제안을 한 것이 괘씸했다.

물론 조건도 붙였겠지, 구해주는 대신 무언가를 받으려 했을 것이다.

“그대의 가족들은 그 영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네, 그랬어요.”

“그럼 그 자리를 떠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이안은 역시 달랐다.

곤란할 미아의 가족부터 생각해 주었다.

그것이 고마워 미아는 입술을 깨물고 터지려는 눈물을 참았다.

“표정이 왜 그러지.”

“그냥…….”

하지만 이안은 미아의 울음을 오해했다.

미아가 처한 상황이 그녀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그를 무능하다 여기는 것보다, 그가 당장 그녀를 위해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 더 그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미아.”

“……죄송해요.”

“왜 도움을 청하지 않지?”

이안이 손을 뻗어 고개를 숙이는 미아의 뺨을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미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에겐 왜 도움을 청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야…….”

“도와달라고 해.”

이안이 미아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를 유혹하듯 입꼬리를 나른히 올렸다.

“나에게 도와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나는 움직일 준비가 되었는데.”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말이, 허세가 아님을 알았다.

그는 정말 도와달라고 한다면 그녀를 돕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터였다.

하지만 미아가 걱정하는 점이 바로 그거였다.

괜히 미아를 도우려다가 무리라도 하는 것.

그래서 이안이 위험에 처하는 것.

미아는 그것이 두려워 도와달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알아요, 알지만.”

“도와달라고, 해.”

“…….”

“못하겠으면 입이라도 맞춰.”

“이안 경.”

“어머니와 아버지, 오빠 모두 무사하니까.”

“……그걸 이안 경이 어떻게.”

“서신이 왔다.”

이안이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미아에게 내밀었다.

미아의 손이 떨렸다.

저 글씨체, 서신의 위에 쓰여있는 저 글씨체는 그녀에게는 너무도 낯익은 글씨체였다.

오빠인 대니의 글씨체.

“서신이 여기 왔다는 건.”

“그들이 서신이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뜻이지.”

여기서 이안이 말한 그들은, 아마도 미아 집 주위를 지키고 있을, 감시하고 있을 달브 황궁의 사람들일 터였다.

그들이 막지 않는 건, 미아를 찾지 않는다는 뜻.

올리비아와 카일렌의 혼인을 인정한 것처럼, 미아에 대해 완전히 포기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쉬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서신은 나도 아직 읽지 않았어. 그저 네가 무사히 있다는 소식만 전했을 뿐이니까.”

“…….”

미아는 읽어보라는 듯 자신을 보고 눈을 맞추는 이안에 천천히 편지 봉투를 열었다.

‘미아에게.’

급히 휘갈겨 쓴 듯,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편지는 건조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들에 미아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그 모습을 살피고 있던 이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지는 미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휘청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아?”

“…….”

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편지를 든 손을 떨구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신이 너 때문에 노하셨다.

다른 생각을 품지 마.

그냥 죽어서 신께 갚아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