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반가운 손님
“애니!”
미아는 멀리 보이는 애니의 모습에 더욱 힘을 내 달렸다.
애니는 그런 그녀에게 손을 마구 저어 보였다.
“뛰지 마세요! 다쳐요! 큰일나요.”
“애니, 정말 애니야? 정말 네가 온 거야?”
미아는 애니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애니는 혹여나 그녀 배 속의 아이가 다치거나 놀랄까 봐 몸을 뒤로 무르면서도 저를 끌어안는 미아를 마주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이는 애니의 눈에 고인 눈물이 미아의 어깨를 적셨다.
미아 역시 눈물을 흘렸다.
“흡, 왜, 끄흡, 우세요.”
“그야, 흐읍, 보고 싶었으니까…….”
‘눈물 겨운 상봉이군.’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두 여자를 보며 이안은 혀를 쯧 찼다.
저렇게 애틋할 수 있을까, 주인과 시중의 사이가.
따지고 보면 애니는 이안을 위해 일한 시간이 더 길었는데도 불구하고, 미아와 훨씬 가까웠다.
미아에게는 그런 힘이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고, 편하게 해주는 것.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것.
물론 그렇다고 지금 그녀의 품에 안긴 애니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미아가 기뻐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훗날 사용인을 불러들인 것을 윌리엄이 알면 또 얼마나 피곤하게 굴지, 그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애니가 미아 뒤로 보이는 이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안은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기어이 불러들였구나.”
“허락이 필요한 일입니까?”
“궁에 머무르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잖니.”
베아트리체는 품에 안고 있던 하얀 강아지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강아지가 이안을 올려다보며 헥헥거렸다.
마치 만져주라는 듯 애원하는 촉촉한 눈빛이 미아를 닮은 것만 같았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려던 것을 멈췄다.
“많이 변했네, 진짜로.”
찰나였지만, 그의 뜻을 알아챘는지 베아트리체가 기가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하필이면 그 모습을 보여서.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아지 같은 작고 약한 동물에게 눈길도 주지 않던 그였다.
그렇다고 큰 동물들을 좋아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안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무관심으로 대했다.
무심히 손을 뻗어 배를 쓰다듬는 행동 자체를 할 생각을 안 했다.
사냥감이거나, 그가 가는 길 앞 혹은 옆에 놓인 이물질.
그 정도로 치부해왔던 그였다.
그런 그가, 마음이 유해져 어린 짐승에게 손을 뻗을 정도라면.
어떤 감정은, 사랑은 사람을 바꾼다.
베아트리체는 이런 이안의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싫었다.
“약점이 생긴 기분은 어떠니.”
“제 약점은 늘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나, 나를 그렇게 사랑했니?”
이안은 베아트리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경멸을 베아트리체가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나, 확실히 전보다 태도는 유했다.
전에 그런 말을 했다면 당장 자리를 떴을 것이다, 더 들어볼 생각도 없이.
“무슨 생각이십니까.”
“무슨 생각이냐니.”
“왜 저와 미아가 여기 있는 것을 두고 보시는 겁니까.”
새삼, 이안이 베아트리체와 윌리엄이 대립하는 중이라는 것을 몰라 물은 것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아트리체의 선택이 왜 이안인지, 굳이 자신의 손으로 밀어내놓고 왜 이제 와 다시 취하려는지.
그 이유를 이안은 묻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 보이니까?”
“그런 대답은 사양합니다.”
“많이 유해졌네. 헛소리할 거면 입 다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물론 이안이 그 정도로 버릇과 예의가 없는 아들은 아니었다.
베아트리체도 그것을 알면서 과장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럴 때마다 약간 질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음에도 참았다.
미아가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아는 애니를 부른 것이 베아트리체의 도움이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베아트리체는 환히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손대지 마십시오.”
“왜.”
“…….”
그걸 꼭 말해야 아나.
이안은 아무 말 없이 베아트리체를 응시했다.
베아트리체는 그제야 원래 이야기로 돌아왔다.
“너희들이 잘 지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게 너희를 여기 두는 이유는 아니지만.”
“어머니, 저의 인내심을 자꾸 시험하지 마십시오.”
“레이디 데드를 만난다더구나.”
굳이 누가 그녀를 만난다는 건지 묻지 않아도 이안은 알 수 있었다.
레이디 데드, 선황제의 어머니.
베아트리체가 황후로 자리를 잡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존재.
겨우 황궁에서 먼 영지로 보냈으나, 틈이 날 때마다 귀족들과 접촉해 베아트리체의 흉을 봤던 사람.
“약점이라도 잡히셨습니까.”
“내게 약점이랄 게 뭐가 있겠니.”
“그럼 윌리엄이 레이디 데드를 만나든 말든,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내 약점은 없지. 하지만 네 약점은 있지.”
레이디 데드가 알만한 이안의 약점?
이안은 그제야 미아에게서 고개를 떼고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베아트리체는 이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윌리엄은 이제 너한테 늘 지던 동생이 아니란다.”
“저도 모르는 제 약점이 있습니까?”
이안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무심하고 태연히 물었다.
그가 모르는 그의 약점이라면,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것으로 당할 일이 없을 테니.
❀ ❀ ❀
“이걸 배에 바르면 좋대요.”
“이걸 배에?”
“네. 살이 트는 걸 막아주고, 좋은 향이 나서 기분도 좋아진대요.”
애니는 달브로 오는 길에 무엇을 그렇게 바리바리 사왔는지, 자신이 가져온 짐을 하나둘 꺼내 보였다.
아이를 가진 미아를 챙기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애니는 아쉽고 서러웠다.
“제가 옆에 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와주었잖아. 네가 있어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
“정말이에요?”
“그럼, 애니. 애니가 보고 싶었는걸, 몹시도.”
이안은 아이 이름을 지어달라는 미아의 말에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미아를 위해 애니를 불러주었다.
그에게는 뜻이 다 있을 거라고, 생각이 다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미아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이 괜히 그에게 부담이 된 것은 아닐까.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신시아의 말이 괜히 마음에 걸려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색한 자식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마음만 앞서 강요한 건 아닐까.
“좀 차가울 수 있어요. 아, 그런데…… 원래 이런 건 애 아버지가 발라주는 건데.”
“응?”
“이안 님이 발라주시는 게 좋겠네요.”
후다닥, 애니는 손에 들고 있던 미끈거리는 액체가 담긴 통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미아가 전에 좋아했던 비스킷을 꺼내 미아에게 건넸다.
“이건 지금 드셔도 돼요!”
“애니, 천천히 해. 우리 같이 있을 거잖아.”
“그래도요. 미아 님이 안 계시는 동안 얼마나 미아 님 생각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보고 싶어서 혼났어요.”
고작 몇 달 만에 이렇게 정이 들 수가 있는 걸까.
애니는 떨어져 있던 시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듯 눈물을 훔쳤다.
미아는 그런 애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껴안았다.
똑똑.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몸을 씻고 나온 듯 머리칼에서 물기가 떨어지는 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애니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
아까의 극적인 상봉을 보고 이안이 지었던 표정이 생각났다.
애니는 아무리 미아가 좋아도, 이안의 질투까지 감내할 자신은 없었다.
“왜 그래, 애니? 왔어요?”
미아는 방으로 들어오는 이안을 보고 웃어 보였다.
이안은 저 순진한 여자를 어찌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그저 따라 조금 웃고 마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직도 회포를 다 풀지 못한 모양이군.”
“애니가 필요할 거라면서, 이것저것 챙겨왔더라고요, 고맙게도.”
“그 비스킷은 그대가 즐겨 먹던 게 아닌가?”
“아시네요?”
미아는 신기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이안이 미아에 대해 아는 것은 그것 말고도 충분히 많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저 이상하게 생긴 건 뭐지?”
“아, 이거요!”
애니는 마침 각종 꽃잎과 찻잎을 섞어 만든 비법의 연고를 이안에게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기나긴 설명의 끝에 이안이 인식한 말은 ‘미아의 배에 발라달라’는 말뿐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럼 두 분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애니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종종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왜 저렇게 황급히 나가버리지?’
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이안은 애니가 눈치가 없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미아의 손을 쥐어 끌었다.
그녀가 다가서자,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곧장 탐했다.
“이, 이안 경!”
미아는 드물게 소유욕을 드러내며 아프지 않게 입술을 깨무는 그에게 순순히 입술을 벌려 주었다.
붉은 살덩이 두 개가 맞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한참을 그렇게 혀를 섞던 두 사람의 입술이 애틋하게 떨어지자, 미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야 그대의 입술을 찾을 수 있나?”
“그건 아니지만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어서요.”
“나는 늘 아쉬워, 그대가.”
그런 말을 낯빛 하나 안 바꾼 채 얘기할 수 있다니.
그게 너무 신기해서, 미아는 멍하니 손을 뻗어 이안의 얼굴을 쓸었다.
“언제 봐도 똑같이 느끼는 거지만…….”
“응.”
“참 비현실적이세요.”
“비현실적이라? 무엇이.”
얼굴이.
미아는 그 말을 내뱉지 않고 삼켰다.
며칠 전 그에게서 보았던 환한 미소가 다시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벅찼는지, 새삼 반했는지.
이렇게 멋진 남자가 제 눈앞에 있다는 게 얼마나 믿기지 않았는지.
그런 감정을 다 얘기할 수는 없어서 미아는 대답 대신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가 뗐다.
“응? 갑자기 왜.”
또, 쪽.
입술이 이번엔 반대편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안은 연거푸 입을 맞추는 미아의 모습이 낯설어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미아는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이안의 그런 환한 미소를.
그것만 볼 수 있다면 입술이 닳도록 뽀뽀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고가 틀렸다면?
입을 맞추는 걸로는 미소를 이끌 수 없다면?
그렇다면 이번엔 다른 방법을 써야지.
미아가 이안과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안 경.”
“듣고 있다.”
“따라해보세요, 치즈.”
“……치즈.”
“케이크.”
“케이크.”
이안은 갑작스럽게 던져진 미아의 요구에도, 그녀가 환히 짓고 있는 미소 때문에 홀린 듯 따라 말했다.
미아는 마지막이라는 듯 활짝 웃으며 외쳤다.
“초콜릿!”
그러나 미아의 예상과는 달리, 이안은 그녀를 따라 말을 뱉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그저 미아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을 뿐이었다.
이안의 큰 손이 미아의 허벅지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