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얼굴 공격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미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부탁을 한 걸까.
예부터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귀한 일이었다.
특히 달브에서는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관습이었다.
물론 아이의 성별을 모르는 지금, 이름을 짓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미아의 아이라고 하니, 어떤 좋은 뜻을 가진 단어를 생각해내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아의 아이는 사랑스러울 것이다, 완벽할 것이다, 찬란할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미아는 그 아이를 몹시 사랑할 것이다.
미아의 사랑이 다른 곳을 향한다 생각하면 심사가 뒤틀리는 이안이었지만, 이 경우만큼은 달랐다.
미아는 좋은 어머니가 될 터였다, 그의 어머니와는 달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윌리엄의 물음에 이안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윌리엄은 아까부터 이안을 불러 앉혀두고는 시중이 보내준 서신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읽고 있었다.
평소라면 ‘할 말 없으면 가겠다’며 자리를 뜰 이안이 어쩐 일로 자리를 지키고 있자 윌리엄도 의아하던 참이었다.
“이름.”
“이름? 무슨 이름?”
“레이첼은 너무 성의가 없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했어.”
윌리엄의 표정이 구겨졌다.
어쩐 일로 좀 온순하게 나오는가 싶더니 곧장 공격이었다.
안 그래도 후회하고 있었다.
죽을병 걸린 영애야 찾으면 분명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그 영애의 이름이 레이첼일 가능성은 둘째치고, 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 사랑을 했다고 속여야 할지.
덥석 만나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그가 몇 번 거절의 의사를 비췄음에도 끈덕지게 황후감을 구해오는 베아트리체였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이안이 대단했다.
베아트리체가 골라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베아트리체의 뜻에 따라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의지를 빼앗긴 사람처럼 보였던 그가 이제는 그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니.
그가 선택한 여자와 함께, 그가 오르고 싶은 자리와 함께.
그는 찾으러 왔다, 빼앗겼던 것들을 찾기 위해서.
“사람 이름 가지고, 무례하긴.”
“그래.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그때 오늘의 무례를 사과하도록 하지.”
만날 일이 결코 없으리라 굳게 믿는 사람의 오만한 태도.
항상 그랬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지금 가진 것이라고는 남의 아이를 밴 나약한 여자 하나뿐이면서.
마치 대단한 수라도 가진 사람처럼 구는 이안이 재수 없었다.
“그나저나 미아 양 몸은 건강해?”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형의 자식이라면, 다르뷔 황족의 일원인데 당연히 신경 써야지.”
“윌리엄.”
이안이 나직이 윌리엄의 이름을 불렀다.
윌리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헛손질하지 말고 본론을 말해.”
“아, 맞아. 오늘 형을 이렇게 부른 건 혼인할 때 필요한 것을 미리 듣기 위함이야.”
“혼인할 때 필요한 것이라.”
성대한 혼인을 윌리엄 측에서 바랄 일은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이미 물러난, 그것도 강제로 물러나게 된 황제였다.
아무리 황족이었다고는 하나, 죽지 않은 것이 용한 황제의 혼인식을 황제가 성대하게 치러준다?
유래도, 근본도 없는 혼인식이었다.
역시 싹을 밟아 놔야 했다.
기사들이라도 풀어 목을 잘랐어야 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이 자리를 노리지 못하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건 순전히 베아트리체 탓이었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형이 가엽지, 윌리엄. 우리 그에게 마지막 선물로 아이가를 선물하자.’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윌리엄은 거절할 수도 없이 그 명령을 따랐다.
그래 놓고 연극을 벌였지, 마치 이안을 죽이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같은 아들이었지만, 어쩜 이렇게 달리 대할 수가 있을까.
베아트리체에게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아우의 마음을 형인 이안은 평생 모를 것이고, 알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다.
“기왕이면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히고 싶군.”
“뭐?”
“미아에게 잘 어울릴, 아름다운 드레스.”
지금 이안이 드레스라고 말한 게 맞나?
‘그런 건 필요 없다’라며 거절하거나, 좀 더 실리적인 토지나 재화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정작 이안이 말한 것은 미아가 입을 드레스였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제일 훌륭한 재단사를 붙여줘. 화려해도 좋겠군. 그녀는 그런 옷을 입을 기회가 많이 없었을 테니.”
“왜? 달브의 황태자비씩이나 돼서 화려한 드레스도 못 입어?”
“굳이 그런 것을 입지 않아도 빛났을 테니.”
물론 미아가 그런 옷을 입을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다는 게 더 답에 가까울 터였지만.
이안은 윌리엄 앞에서 미아를 낮춰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윌리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애정행각은 혼자서 하란 말이야, 엄한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그래, 그래. 어려운 부탁도 아니네. 근데 말이야, 초대할 하객은 있어?”
이안의 정치적 입지는 엉망이 됐다.
윌리엄이 질문을 던진 의도는 빤했다.
그를 비웃고 모욕하기 위한 질문에도 이안은 끄떡없었다.
“누구든 보러 와주면 하객이 되는 거지.”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바트르 광장의 시계탑 앞에서 혼인식을 할 생각이니까.”
윌리엄이 간신히 걸치고 있던 웃음과 여유가 깨어졌다.
억지를 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성대하게 혼인을 올리겠다는 것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떳떳이 선 채 혼인을 올리겠다는 뜻인 줄은 미처 몰랐다.
“형은 형이 누구인지 자주 잊나봐?”
“…….”
“내가 상기시켜줘? 형은 폐위된 황제야, 그것도 폭군이라는 이유로 폐위된 황제. 모두 형의 이름만 들으면 학을 떼는 것도 잊었어?”
“…….”
“그러다 미아 양이 돌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안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뭐지, 설마 민망해라도 하는 건가.
윌리엄이 의아한 눈길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은 웃고 있었다.
아주 드물게, 키득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누가?”
“……어, 어?”
“누가.”
이안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윌리엄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윌리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이안이 천천히 어깨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가해지는 압력이 세질수록, 윌리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누가 미아에게 돌을 던져?”
“아니, 내 말은…….”
“네 말이 옳아. 사람들은 내 이름만 들으면 학을 떼.”
“…….”
“그 기저에 깔린 게 공포심이라는 건, 너도 알겠지.”
공포심.
윌리엄이 이안에게 가진 감정이자, 궁 안팎의 대다수가 이안에게 가진 감정.
어쩌면 베아트리체조차 가끔 이안이 두려울 터였다.
커헉.
윌리엄이 목이 졸린 듯 몸을 들썩였다.
이안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더욱 세게 그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공포심이야. 나를 두려워한다는 건, 여전히 나를 신경쓰고 있다는 거고.”
“……커억, 컥, 콜록.”
뒤늦게 이안은 윌리엄을 놓아주었다.
윌리엄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터뜨렸다.
붉어진 얼굴이 볼만 했다.
이안은 받은 건 꼭 돌려주어야 했다.
모욕에는, 모욕으로라도.
“걱정 마.”
“감히 황제한테 뭐 하는 짓이야!”
“난 아직 네 자리를 지켜줄 용의가 있어.”
씩씩거리며 쳐다보는 윌리엄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이안이 뒤로 물러났다.
시시한 용건은 끝났고, 더 말할 것은 없었다.
뒤로 돌아 방을 빠져나가는 이안에게 윌리엄이 외쳤다.
“그 속에 담긴 검은 속내를 누가 모를 줄 알아?”
“…….”
“오늘의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할 거야.”
쾅.
대답 대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돌아왔다.
윌리엄은 벌겋게 부어오른 제 목 부근의 단추를 뜯어내듯 풀어내며 분이 풀리지 않아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이미 읽은 서신들을 전부 찢어내는데, 한 서신이 눈에 띄었다.
“이건…….”
낯익고 불편한 이름이 그의 손에 잡혔다.
받은 대로 갚아주어야 하는 태생은 윌리엄도 마찬가지였고, 이제 막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의 패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 ❀ ❀
“미아, 여기서 무얼 하는 겁니까.”
“그냥, 뭘 좀 쓰고 있었어요.”
미아는 제가 쓰고 있던 종이를 급하게 가렸다.
이안은 그런 미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
아직은 그에게 보여줄 때가 아니었다, 미아는 완강했다.
“설마 서신을 쓰던 겁니까?”
“서신이요?”
“…….”
그리운 가족에게 서신을 쓴다거나, 달브 황국의 황제나 황후에게 쓴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물론 서신을 보내기 위해선 시종을 부려야 했고, 시종을 부린다면 곧장 윌리엄의 귀에 들어갈 테지만.
미아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누구에게 쓴 겁니까.”
“서신 아니에요.”
“그러면?”
“그냥…….”
미아는 우물쭈물했다.
지금껏 벌어진 일을 차분히 정리해보고자 겨우 종이와 펜을 구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원래 미아가 쓰던 일기장을 첫 만남에 불태웠던 이안인데.
“설마, 그놈…….”
이안은 말을 채 완성하지도 못했다.
미아가 카일렌에게 서신을 쓴다고 한들, 그 내용이 사랑을 담은 내용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 없잖아요. 할 말도 없다고요, 이제.”
“그러면 어째서 숨기는 거지? 내가 보아선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그야, 이건…… 이건.”
미아는 그를 향한 낯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는 이 일기를 그가 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를 만난 시점부터 돌아보기 시작한 일기는 이제 막 그가 그녀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에 대한 부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비밀이에요.”
“비밀?”
“네. 그러니까, 그런 줄 아세요.”
그런 줄 알라니.
언제부터 미아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왔단 말인가.
이안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쥐어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당돌해졌군?”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벌이라도 주시게요?”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있는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가 그녀에게 꼼짝도 못 한다는 사실을, 이제 더는 그녀를 해하겠다 말할 용기조차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아프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겠다면?”
미아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위험한 자리를 찾아보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양이 귀여워 이안은 피식 웃었다.
“뭐 하는 거지.”
“여기 어디 누르면 죽는 혈자리가 있다면서요.”
“거짓이다.”
“네?”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환하게 웃는 이안의 뒤로 눈이 부시도록 환한 햇살이 들어찼다.
“거짓이라고.”
미아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