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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악몽 (72/95)

72화. 악몽



 

이안은 어려서부터 영리했다.

무엇이든 빨리 익히고 외웠다.

그런 그의 선생들은 하나 같이 그를 칭찬했지만, 황제는 그들의 태도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 탓일지도 모른다.

그는 태어나서 우는 법이 아니라, 누르는 법부터 배웠다. 숨을 죽이는 법부터 배웠다.

다른 애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도, 말을 거는 법도 없이 그는 조용히 숨을 낮췄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그런 이안을 아이들은 오만하다 손가락질하고 재수 없다고 욕했다.

욕을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참은 것은, 그 사실이 베아트리체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안은 어쩌면, 인내심이 아주 깊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어느 날이었다.

어린 이안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정물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언제나처럼 황제의 무릎에 앉아 무슨 말을 귀에 속삭였고 황제는 무심한 눈빛으로 이안을 보았다.

“영리하다더구나, 선생들이 너를 보고.”

“…….”

“그런데 어째서 내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는 거지?”

베아트리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안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목소리를 앗아간 것이 황제였다.

“저, 황후 폐하. 잠시 이쪽으로.”

귀빈이 온다는 소식에 궁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안의 불안한 시선이 베아트리체를 좇았다.

엄한 어머니였지만, 그에게 애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여주지 않은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다녀오세요.”

황제는 베아트리체에게 허락을 건넸다.

베아트리체가 못내 아쉬운 얼굴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튼짓을 하지 말라는 듯 낯빛을 굳혀 이안을 마주하더니 몸을 틀었다.

멀어지는 베아트리체의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를 훑는 시선이 탐탁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어리지만 알 것은 다 알 나이였다.

그가 황제를 닮지 않았다고 뒤에서 모두가 속삭이고 있다는 것을, 잠든 제 얼굴을 황제가 이따금 들어와 들여다보고 간다는 것을.

닮은 점을 찾고 싶은 걸까.

자신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필요한 걸까.

그는 황제처럼 오른손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처럼 빠르게 걷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가 키가 크지 않은데 아이가 너무 큰 게 아니냐고 들을 때마다 몸을 숙였다.

키가 너무 클까봐 일부러 먹은 것을 토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와 황제가 닮지 않았다 떠들어댔다.

“너는 누구지?”

황제의 물음이 어린 이안을 향했다.

돌연 무슨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누구냐니, 뻔히 아는 것을 묻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

머뭇거리는 동안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심기가 불편한 낯빛이었다.

이안은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입을 열어야 했다. 답을 해야만 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려야 했다.

그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이안 다르뷔입니다.”

이안이었다.

황태자였다.

‘다르뷔’ 라는 황족으로 태어난 신성하고 영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래, 너는 이안 다르뷔다.”

황제는 그제야 입을 열어 말했다.

그가 누군지 몰라 물은 것이 아닐 테니,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을 터.

그러니까 네 주제를 알라는 거라든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황태자로 지내라는 뜻이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나?”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이런 위압감 속에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을 것이었다.

황제는 손을 뻗어 이안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시간이 흐를 때마다 더욱 세게 이안의 어깨는 짓눌렸다.

이안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이를 악 물고 참았다.

눈에 눈물이 고일 때 즈음 황제는 웃었다.

“그래, 넌 참아야 해. 무슨 일이든 참아야 살아남을 수 있어.”

뒤늦게 놓이는 손에 이안의 몸이 흔들렸다.

이안이 숙였던 고개를 들자,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만 같은 얼굴로.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황제를 향해 걸었다.

이건, 꿈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건 꿈이야.

이안은 눈을 떴다.푸르스름한 새벽녘의 공기가 자신을 감싼 것이 보였다.

식은땀이 난 이마를 손으로 대충 문대자, 제 품에 파고든 미아의 모습이 보였다.

“……깼어요?”

미아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꿈에서 깨었다는 확신을 받고 싶었는지, 드물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미아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런 이안을 제 품으로 끌어안아 토닥였다.

아직 눈도 못 떴으면서, 사람을 가여워하고 아껴주는 버릇은 태생인 모양이었다.

“나쁜 꿈 꿨어요?”

“…….”

“내가 투정 부리려고 했는데. 이안 경 보니까 못 부리겠다.”

그래, 확실히.

신시아를 보고 난 뒤 미아는 조금 토라진 기색을 보였다.

왜 그러냐고 굳이 묻지 않은 것은 토라진 미아의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부려도 돼.”

“정말요? 나 신시아 양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차마 묻지 못했어요.”

“억울한가?”

“그럼요.”

“그럼 내가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줄 테니, 마음을 풀어.”

소원? 이안의 말에 미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졸음은 온데간데없이 가시고 똘망한 눈이 된 미아가 귀여운지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었다.

미아는 고민에 빠졌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다 못 들었으니 들려달라고 할까.

아이가가 너무 그리운데, 애니도 보고 싶고.

아이가에 가자는 약속을 해달라고 할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마음을 굳힌 미아가 이안을 보았다.

그리고 이안에게 팔을 벌려 보였다.

갑작스러운 미아의 몸짓에 이안이 의아한 표정이 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안아줘요.”

“그게 소원인가?”

“아뇨, 일단 안아주면 말할게요.”

이안은 팔을 벌린 미아를 바라보다 이내 팔을 벌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타도록 바싹 끌어안자, 미아가 본심을 말했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뭐?”

“이 아이요. 이안 경의 아이.”

이안은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 칭하는 미아가 믿기지 않아 몸을 들어올리려 힘을 줬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미아가 자신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미아는 눈을 꼭 감고 기도하고 있었다.

이안과 자신의 앞날이 평안하기를.

그리고 이 아이를 사랑하며, 이 아이에게 이안이 사랑받으며 치유 받을 수 있기를.

그게 이안을 떠날 수 없는 미아가 내린 결론이었다.

❀ ❀ ❀

“들어오거라.”

달브 황국의 황후, 메릴린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중이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안으로 올리비아가 걸어들어왔다.

며칠 굶었다고 얼굴이 더 갸름해진 올리비아는 금세 기운을 되찾고 아름다움 역시 되찾았다.

전과 다를 바 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새삼 원망이라도 담겨 있나 꼼꼼히 얼굴을 살폈으나, 메릴린을 향한 원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메릴린은 여러모로 영감이 좋은 편이었다.

누군가 다른 마음을 품으면 곧장 알아보았다.

“올리비아.”

“네, 폐하.”

올리비아는 고개를 숙여 메릴린에게 예를 갖췄다.

자리를 찾아 앉는 올리비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메릴린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부터 꼭두각시다.”

“…….”

“네가 할 일은 오직 카일렌을 보필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아니, 그마저도 네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황태자의 곁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니까.”

“……네.”

“잠자리를 가져도 상관없지만, 아이를 가져서도 낳아서도 안 된다. 그 아이는 부정한 아이다.”

올리비아는 아이를 가진 사람 특유의 달콤한 향기를 내던 미아를 떠올렸다.

미아에게는 있었다, 카일렌의 아이가.

미아에게는 있었다, 카일렌의 마음이.

그런데 올리비아는 여기 남아서 그녀의 대역이 되어야 했다.

대체 뭐 때문에, 자신이 뭐가 모자라서.

죄가 있다면, 그녀에게 구애하던 그 수많은 남자들을 제치고 이안과 혼인한 것뿐이었다.

황후란 자리에 눈이 멀어 제가 가려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선택한 죄, 그것이 전부였다.

“네가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면 지금 쳐 죽여도 시원찮음을 알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달브의 성스러운 황세손을 해하려 들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더, 더 숙였다.

원하는 것이 있을수록 몸을 낮춰야 하는 법이다.

자존심 같은 것은 버린지 오래였다.

그녀는 그녀의 욕망만 바라봤다.

언제든, 그녀가 가지고 싶은 것만 생각했다.

가질 수 없으면 망가뜨려서 남들도 못 가지게 해야 했다.

그게 카일렌의 마음이라면 카일렌의 마음을, 카일렌의 아이라면 그 아이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뉘우치는 건가.”

“예.”

“나는 네가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

메릴린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한참 올리비아를 살피다가 이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시중이 들어왔다.

붉은색 천을 들고 온 시중은 올리비아를 일으켰다.

“이게 무슨…….”

“혼인을 하려면 혼례복이 있어야지.”

‘혼인, 정말이구나. 정말로 혼인을 시켜주는 거였어.’

올리비아의 낯빛이 조금 환해졌다.

그마저도 메릴린의 눈에는 못마땅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메릴린도 원하는 바를 위해 숙일 때였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게 해라.”

“네, 알겠습니다.”

치수를 재는 시중이 얌전히 답을 했다.

올리비아는 비죽비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돌고 돌아, 결국 그녀의 계획대로 되었다.

만약 둘이 혼인을 하게 된다면, 황태자비 자리는 그녀의 차지가 된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계획의 절반을 이룬 셈이다.

남은 절반은…….

“훌륭하시네요.”

시중이 낮게 중얼거렸다.

올리비아는 그제야 조금 웃어 보이며 고개를 숙여 보일 수 있었다.

메릴린이 그런 그녀의 모습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검은 구렁이 같은 속내에 뭐가 들었는지 알고 싶은데.

좀체 속을 드러내지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황제인 노아의 속 역시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따랐지만, 메릴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아를 되찾아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 앞으로 목숨을 바쳐 폐하를 보필하겠습니다.”

시중이 나가자마자 올리비아는 고개를 숙였다.

메릴린은 그런 올리비아가 지겹다는 듯 나가라 손짓했다.

등을 돌려 걷는 올리비아의 어깨가 천천히 들썩이는가 싶더니, 복도를 돌아 응접실이 아주 멀어지자 결국 웃음이 터졌다.

남은 절반의 계획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미아를 없애는 것.

그러면 아이도 자연히 사라질 테니, 모든 것이 해결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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