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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질투를 처음 (71/95)

71화. 질투를 처음



 

“이건 아이가에서도 잘 자랄 것 같은데…….”

달브 황궁과 비교하면 조금 수수했지만, 바트르 황궁의 정원 역시 충분히 아름다웠다.

아침 일찍부터 만날 사람이 있다며 이안이 자리를 비운 사이, 미아는 조용히 정원으로 나섰다.

아직 궁에 정식적으로 초대된 건 아니라서 모습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달브에서 보지 못한, 혹은 그림이나 찻잎으로만 간혹 접한 식물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정원 가꾸는 것을 좋아하는 미아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는 한편, 자꾸 황량했던 아이가의 정원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미아는 추운 땅에서도 잘 자라게 생긴 식물을 찾아 꽃씨를 살폈다.

“조금만 담아갈까?”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닌데, 그리 귀한 씨도 아닌데.

괜히 눈치를 보던 미아가 품에서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툭 아래로 떨어진 씨앗을 손수건 안에 싸서 넣었다.

“여기 계셨네요.”

“어머!”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미아가 손수건을 꼭 움켜쥐며 몸을 움찔거렸다.

그 덕에 그녀를 놀라게 만든 장본인도 놀란 듯 따라 몸을 떨었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의 심정으로, 미아가 제 앞에 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검게 그을린 건강한 피부, 아름다운 별을 박은 듯한 호박색의 눈동자, 파도처럼 구불거리며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보랏빛 머리칼까지.

건강한 아름다움이 넘쳐 흐르는 여자는 정복 차림이었다.

“누, 누구시죠?”

“인사 올립니다. 도슨 가문의 신시아입니다. 현재 바트르 황국의 교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황국의 교역을 담당하고 있다니.

도슨 가문은 미아 역시 얼핏 들어본 적이 있는 가문이었다.

바트르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유명한 가문이자, 유서가 깊은 가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아 전하, 아니. 미아 양이시죠?”

신시아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어떻게 나를 알지?

그새 소문이 돌았나, 아니면 누가 전해준 건가?

고개를 갸웃하는 미아에게서 경계하는 기색을 읽은 신시아가 자신은 안전한 사람이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저 이안 경에게 다 들었으니까요.”

“이안 경에게요?”

“네. 이안 경이 궁 안에서 유일하게 믿어도 되는 사람, 아니. 이제는 유일하게가 아니지. 어쨌든 믿어도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예요. 전에는 달브 황국과의 교역도 맡아서 진행했었고요. 이안 경이 자리에서 밀려나고, 저도 그쪽 일에서는 손을 떼게 되었지만.”

‘엄청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안 경이 믿고 의지한 신하라는 말이잖아. 그래서 이렇게 여유가 넘쳤구나.’

미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황궁 내에 정무를 보는 여인이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하나 같이 어딘가 빛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동경했다, 그 반짝임을.

그리고 신시아는 그런 반짝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어쩐지 정원에 계실 것 같았어요. 탐스러운 달브 황궁의 정원이 미아 양의 솜씨라는 걸 전해 들었거든요.”

“그런 소문도 돌았나요?”

“그럼요. 생각보다 그런 세세한 정보들이 도움이 된답니다. 황후가 되실 몸이었으니, 더욱 신경 썼죠.”

궁에 있는 동안은 줄곧 황태자비로 지내서인지, 현재의 황후인 메릴린이 너무 굳건해 보여서였는지.

미아는 제가 황후가 될 몸이라고는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막상 적국에서는 그런 미아를 의식하고 있었다.

“후회돼요?”

“네?”

“황후나 황제의 자리는 모든 여자들이 한 번쯤 상상해보는 자리잖아요.”

“아…… 아뇨, 후회되지 않아요.”

애초에 미아는 자신이 그 자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그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 편에 가까웠다.

“왜요? 잘 어울리시는데.”

신시아는 싱긋 웃으며 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아가 얼결에 손을 뻗어 신시아의 손 위에 얹자, 신시아가 손 위로 꽃씨 몇 알을 떨어뜨렸다.

그녀가 막 챙긴 꽃 옆에 핀 꽃의 꽃씨로, 다음으로 챙기고자 눈독 들이고 있던 꽃씨였다.

“저와 차 한잔하시겠어요?”

미아는 신시아의 미소에, 신시아가 건네주는 꽃씨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시아는 싱긋 웃어 보이고선 그녀를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정원 안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미아가 흥분하며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둥근 유리로 된 온실 안에는 색색의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만개한 꽃의 향이 은은히 맴돌았다.

“베아트리체 황태후 전하께서 유난히 좋아하시는 꽃이에요. 흰 튤립은 귀하잖아요.”

“저는 태어나서 처음 봐요.”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미아를 뿌듯한 눈길로 바라보던 신시아가 시중이 가져다주는 찻잔과 찻주전자를 받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미아를 끌어 앉힌 뒤 찻잔 위로 차를 부었다.

잘 우러난 차의 향이 향긋했다.

“드셔보세요.”

“감사합니다, 신시아 양.”

미아는 고마움의 인사를 올린 뒤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신시아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미아 양,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이안 경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아요.”

“아는 거요?”

“네, 어린 시절부터 같이 공부를 하고, 대련을 한 사이거든요.”

이안이 믿을만한 사람, 믿은 사람.

그 사람이라면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음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처음 미아를 대할 때의 태도 역시 미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한 태도였으니, 어쩌면 이안이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눌 수 있는 사람일지도.

“그, 그러셨구나.”

“저 지금 기회 드리는 거예요.”

“기회요?”

“이안 경이 워낙 자기 속 얘기를 안 하잖아요?”

헉.

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맞다, 이안은 그랬다.

좀체 자기 속 얘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어린 시절 얘기도 안 하죠? 그 녀석.”

“네, 그래서 너무 궁금하고…….”

말을 잇던 미아가 문득 멈췄다.

신시아의 말을 되새김질 해보면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 녀석.’

신시아는 이안을 분명 그렇게 불렀다.

이제껏 누구도 이안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라니.

대체 얼마나 친하기에 그런 애칭을 가져다 붙인 것일까.

당황한 듯 눈빛이 흔들리는 미아를 눈치채지 못한 듯 신시아가 말을 이었다.

“다 물어봐요. 대답해 줄게요.”

“다요?”

“네.”

“……뭐든 다?”

“그럼요.”

왜, 뭐든 다 아는 건데?

미아는 가슴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끓는 이 억울함과 속상함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질투라는 걸 태어나서 해본 적도, 해본 일도 없던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저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소중한 기회를 날리겠는가.

이안이 말해주지 않는 것 중에서,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생각해서 말해주지 못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를 테니.

“이안 경은 아이를 좋아하나요?”

“아이요? 이안 경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만큼은 이안이 밝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덕에 신시아의 솔직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좋아할 리 없을걸요. 특히 남자 아이라면.”

“……역시 그럴까요.”

“아무래도, 자식은 부모의 영향을 받잖아요? 선황제 님이 워낙 엄하시기로 유명해서. 가끔 대련을 보러 오셔서도 잘했다 칭찬 한 번을 안 하시더라고요.”

선황제가 이안에게 엄하게 굴었다는 것은 이전에도 들은 적 있었다.

베아트리체 역시 아들에게 따뜻한 어머니는 아니라고 했으니, 역시 이안은 어린 시절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겠지.

아이를 꺼리는 것도 이상할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올리비아랑 결혼 생활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었던 것을 보면.

그럼 역시, 그냥 미아를 위해서 괜찮은 척을 한…….

“미아!”

어디선가 다급히 미아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미아는 이안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나비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신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아를 발견한 이안은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와 이곳저곳을 살폈다.

마치 신시아가 그녀를 위협이라도 한 듯이.

덕분에 억울해진 신시아만 무결함을 주장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안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저는 보이지도 않으시나 보죠?”

“네가 왜, 감히, 미아를 만나.”

“그야,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쳤으니 인사를 건넬 수밖에요.”

급히 달려와 그녀를 찾은 듯한 이안의 모습에 미아는 염려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녀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보자, 이안이 미아를 안심시키듯 어깨를 쓸어내렸다.

“무슨 이상한 말은 안 하던가.”

“이상한 말이요?”

“그래, 예컨대 내가 어렸을 때…….”

어떻게 알았지, 어린 시절 얘기하던 것을?

미아가 제발 저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신시아는 둘만의 비밀로 하자는 듯 미아에게 슬쩍 눈짓을 해 보였다.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헛소리를 했다면 네 혀를 뽑겠다.”

“아이고, 무서워라.”

신시아는 다정하게 붙어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인지 은밀히 웃어 보였다.

그리고선 단정하게 매무새를 가다듬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두 분이 만나셨으니, 저는 이만 빠져드릴게요.”

“벌써 가시게요?”

“네. 저도 일정이 있어서요.”

신시아는 이안과 미아에게 차례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유리 온실을 빠져나갔다.

그 덕에 흰 튤립 사이 이안과 미아만이 서 있게 되었다.

이안은 미아가 마시던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다행히 위험한 차는 아니군.”

“신시아 양은 믿어도 되는 사람이잖아요.”

“누가 그래.”

이안은 무심하게 되물었다.

아닌가?

미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안이 말을 이었다.

“내가 믿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다.”

“나를 믿어요?”

“또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나?”

이안이 손을 끌어 전과 같이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미아가 손끝을 반사적으로 움츠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또, 위험하게!”

“그대 손에라면…….”

“죽어도 좋다는 말씀 하시지 마세요. 힘들게 살려놨으니까.”

미아가 말을 툭 내뱉자, 이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어느새 이런 장난스러운 모습도 보이고, 아이가에 버려져 삶을 포기하던 미아는 이제 없다.

드디어 카일렌의 그늘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그래, 이제 난 죽을 수도 없다.”

“오래 오래 살아요.”

“그대와?”

“네, 저랑.”

미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안은 웃으며 미아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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