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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그의 욕망 (70/95)

70화. 그의 욕망



 

“…….”

“…….”

무겁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올리비아의 창백한 얼굴이 그간 그녀가 겪었던 수모를 전부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황달이꽃 차를 임신한 황태자비인 미아에게 먹이려 했다는 죄목으로 황후 메릴린은 그녀를 감옥이나 다름없는 차디찬 다락에 가두었다.

“이제야 저를 찾을 생각이 드셨나요?”

카일렌은 저를 향한 원망의 눈길을 그대로 받아내었다.

올리비아가 미아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카일렌을 원망할 자격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믿고 이곳에 왔다.

그는 그런 그녀를 외면했다.

“식사를 영 안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제게 주는 것은 먹을만한 것이 아닙니다.”

“올리비아.”

카일렌은 손을 뻗어 올리비아의 뺨을 짚었다.

볼썽사납게 마른 어깨 부분이나, 어떤 열망의 불꽃이 사그라든 그녀의 눈빛이 애달팠다.

아름다움은 티끌 한 점 훼손되지 않았으면서도 예전처럼 빛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달라진 점이었다.

“식사를 신경 쓰라고 전하겠습니다.”

“저를 황후로 만들어주신다고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

“제가 전하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하시는 겁니까.”

사랑이라.

카일렌은 그 말을 듣고 몸이 굳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올리비아에게는 너무나 거창한 말이었다.

그동안 미아가 보여줬던 사랑에 비하면 올리비아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볼품없는 것인지 카일렌은 이제 알았다.

“올리비아는 내 아이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건 전하의 아이가 아니라…….”

“나를 언제까지 속일 셈입니까.”

카일렌은 차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카일렌에게서 보았다.

이미 사라져버린 그녀를 향한 호의와 사랑을.

고작 이만큼 지속되고 버려질 거였다면 애초에 왜 이런 일을 벌인 걸까.

“사랑하세요?”

“예?”

“미아 양을 사랑하시냐고요.”

모든 게 다 그녀 때문이다.

올리비아의 계획은 완벽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허울뿐인 황제를 버리고 새로운 황태자에게로 향한다.

순하고, 착하고, 저를 위할 줄 아는 황태자에게로.

황태자를 최선을 다해 도와 황후의 자리로 오르면, 사랑하는 자를 배반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사라질 터였다.

그깟 멸시와 천대는 잠시일 것이라고, 그녀는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잠시 참는 것일 뿐이라고.

그렇게 믿고 버틴 세월이었다.

다 거짓이었다.

모두 미아만을 생각했다.

모두 미아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 여자가 뭐라고, 대체 무엇이 특별하다고.

“……그렇습니다.”

한참 만에 복잡한 낯빛을 한 카일렌의 답이 들려왔다.

투욱, 올리비아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알고 있었다.

미아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이안에게 빼앗기고 나서야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풀 수 없는 문제는 바로 ‘어째서’였다.

어째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하던 바트르로 돌아와 굳이 그녀를 되찾는 것일까.

그는 제게 자신의 의무가 모두 버겁고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남편으로서의 의무 역시 그렇다고, 자신만 바라보는 미아가 무섭다고까지 했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새삼스레 미아가 그립다고 말하는 꼴이라니.

그 꼴이 우습고 보기 싫어 올리비아는 손을 들어 카일렌의 어깨를 밀어냈다.

“가세요.”

“올리비아.”

“이런 상황이 될 때까지 혼자 내버려 두고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찾아온 거예요!”

“그대는 내 아내가 될 것입니다.”

무겁게, 카일렌의 말이 떨어졌다.

그제야 올리비아의 시선이 카일렌을 향했다.

아내가 된다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대와 혼인하라는 명령, 아니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명령?

그럼 미아를 끝내 찾지 못한 건가.

그렇게 미아를 찾으러 사방팔방을 헤매었으면서 결국 못 찾은 거야?

황세손을 품은 몸이란 것을 알면 이렇게 쉽게 놓아줄 리가 없는데.

“그렇다는 건.”

“맞습니다. 그대와 나는 혼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약속대로 황태자비가 될 것이고, 훗날 황후가 될 수도 있겠죠.”

올리비아의 눈이 그제야 번득였다.

순식간에 생기가 돋아나는 그녀가 카일렌은 두려웠다.

결국 이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어리석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 그였다.

“그럼 저,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가요.”

“예. 시중이 도울 겁니다. 들어와라.”

올리비아가 뻗은 손을 카일렌은 외면했다.

뒤이어 들어온 제인이 올리비아를 애틋한 표정으로 보며 손을 뻗었다.

저를 신경써 제인을 데려와 준 것은 고마웠지만, 이미 저만치 앞서 가버린 카일렌의 뒷모습을 보며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이건 어쩌면 둘도 없을 기회라고.

자신이 잃은 것을 전부 되찾을 수 있는, 신이 주신 기회.

❀ ❀ ❀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가?”

이안은 창백한 얼굴로 연신 식은땀을 흘리는 미아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아무래도 식사 자리가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사실상 식사를 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베아트리체 다르뷔, 이안 다르뷔, 윌리엄 다르뷔로 이루어진 이 세 가족이 정상적인 가족이 아님은 이안도 알았다.

이안에게 그 시간은 익숙한 대화, 아니 정확히는 서로가 서로의 패를 훔쳐보는 위태로운 게임의 시간이었다.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냈을 미아로서는 본 적 없는 식사 자리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괜찮아요.”

“괜찮은 얼굴이 아니다. 약을 구해오라 이르겠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정말요.”

미아가 이안을 붙잡았다.

이안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침대에 누운 미아의 옆에 앉았다.

그러곤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미열이 있는 이마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낸 그가 다정히 속삭였다.

“손을 주무르면 좀 낫는다던데.”

“주물러 주시게요?”

“못할 것도 없지.”

이안이 작게 웃으며 미아의 손을 찾아 쥐었다.

미아는 저의 손을 꼼꼼히 주물러주는 이안의 다정한 손길에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덥석 혼인을 하겠다는 그의 말에 당황한 윌리엄을 뒤로 한 채 이안은 미아의 손을 잡고 빠져나왔다.

‘자세한 혼인 이야기는 차차 나누자꾸나.’

베아트리체는 우선 그렇게 일단락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창백히 질린 얼굴의 미아가 신경쓰였는지 미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형의 방, 그쪽이 아니지 않아?’

굳이 거리가 떨어진 방을 준 것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윌리엄의 말을 이안이 받아들일 만큼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안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미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미아만 고개를 뒤로 돌려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황태후 전하는 무슨 생각이실까요.”

달브로 그녀를 찾으러 왔을 때 느꼈다.

베아트리체는 이유가 무엇이든 미아를 이안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게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든, 아니면 그녀의 계획에 필요한 수단이든.

“무슨 생각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러면요?”

“우리가 혼인한다는 게 중요하지.”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미아의 뺨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가 뗐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안 경, 정말 저와 혼인해도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무슨 질문이지.”

이안은 미아의 질문에 낯빛을 굳혔다,

곧장 저렇게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이안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아 미아는 진지한 얘기를 하려다가도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왜 웃는가.”

“아이 같아서요.”

“아이?”

“네, 이안 경이요.”

“달브에는 이리 큰 아이가 있나 보군.”

이안의 목소리가 뚱했다.

살짝 들린 윗입술이 귀여워 미아는 고개를 숙여 이안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가 놓았다.

쪽, 소리와 함께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이 애달팠다.

기어이 다시 입을 맞췄다가 떼어내는 이안에게 미아가 속삭였다.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로 정말, 굳은 마음을 먹으신 거예요?”

“마음을 먹기 전부터, 그 아이는 내 아이였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일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겠지.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이안이 이렇게 진심으로 나와주는 만큼 미아도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진심으로 맞서야 했다.

그가 건네주는 진심에, 진심으로.

“윌리엄은 분명 아이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길 거예요.”

“괜찮아. 어차피, 그 애는 너나 아이에게 티끌 하나 손댈 수 없으니까.”

“하지만 황제잖아요, 이안 경. 아무리 우리가 강경하게 나간다고 해도…….”

“어머니가 우리의 편을 드는 이유를 모르겠어?”

베아트리체가 그들의 편을 드는 이유?

미아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까 결혼을 두고 대립각을 세우던 두 사람의 모습이 스치듯 떠올랐다.

둘의 사이가 덜컹거린다면, 그건 기회라면 기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아트리체가 덥석 이안을 믿을까.

이안을 황제의 자리에서 손수 끌어내린 것이 그녀인데 새삼 다시 그 자리에 올려둘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는 말은, 그녀가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거란 기대는 섣부르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알아.”

“황태후 전하가 이안 경을 안다고요?”

“정확히는 내 욕망을 알지.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한 인간을 귀신같이 알아, 그녀는.”

이안은 미아의 몸을 뒤로 밀어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듯 침대를 짚어 몸을 지탱했다.

순식간에 이안의 아래로 향하게 된 미아가 놀라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봤다.

“말해봐.”

“……말?”

그녀의 어리둥절한 반응이 제법 우습고 귀여운지 이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무엇이 갖고 싶어?”

“갖고 싶은 건, 없는데…….”

“무엇이 하고 싶어?”

“그것도 아직 생각을 안 해 봤는데.”

“이제부터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미아는 갑자기 이안이 왜 이런 것을 묻는지 알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녀는 충만했는데.

더 바랄 것이 없이 행복하고, 좋았는데.

그런데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묻는 걸까.

“왜냐면 난 네가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에 쥐여줄 생각이거든. 설령 그것이, 누군가의 목이라 해도.”

“목이요?”

미아는 순간 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손을 들어 제 목을 감쌌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손 위로 손을 포개며 달래듯 손을 두드려 주었다.

“그러니까, 그런 나를 어머니가 이용하려는 마음을 가진 건 당연하지. 내가 어머니의 손에 놀아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면, 그녀의 계획은 거의 완벽해.”

“저, 이안 경. 제가 이해가 느린 건지는 몰라도…….”

“다시 황제가 될 거야.”

황제?

미아의 눈이 커졌다.

황제가 된다는 말은, 윌리엄의 자리를 빼앗겠다는 말이고, 그 말은 곧 반역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말을 황궁에서 해도 되나?

둘 뿐인 방임을 알면서도 미아는 고개를 들어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어도 쉽게 말을 전할 수 없을 거야. 이런 말을 전했다가, 황제에게 무슨 미움을 살 줄 알고.”

“괜히 저 때문에 무리하시는 거라면…….”

“미아.”

“……네.”

“난 이때껏 아무것도 바라는 법을 몰랐어. 바라지도 않았고. 그런 나에게 바람이 생겼어. 그대를 지킬 힘을, 그대의 아이를 지킬 힘을 갖게 되는 거야.”

“…….”

“그러니 날 믿어.”

이번에는, 꼭. 나를 믿어.

이안의 말에 하는 수 없다는 듯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들의 속삭임을 엿듣는 귀가 있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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