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불편한 식사자리
“이렇게 마주 앉으니 반갑기 그지없구나.”
베아트리체는 새삼 감회에 젖어 말했다.
시선의 끝에는 미아가 있었다.
미아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저를 받아주셔서.”
“고맙긴. 내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인데, 어미 된 도리로 이 정도도 못 해주겠니.”
이안은 베아트리체의 말이 마뜩잖은지 시선을 돌리며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아는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를 토닥였다.
이안에게 이 식사 자리의 흥밋거리라고는 옆에 앉은 미아밖에 없었다.
궁에 돌아온 그들을 표면적으로나마 반긴 윌리엄은 의사를 불러 미아와 이안을 치료하게 했다.
이안은 빠른 속도로 회복했고, 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에 띄는 점이라면 이안과 미아를 굳이 다른 방에서 지내게 했는데, 황실에 말이 도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명분이었다.
‘이미 우리의 존재 자체가 가십거리인데,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이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회복을 위해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물러났다.
물론 그의 회복이 아닌 그녀의 회복을 위해서였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자꾸만 마음이 들끓고 욕정이 이는 것이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충동을 누르기 어려웠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지?”
“네. 이제는 피로감도 없고, 괜찮아요.”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다. 이안, 너도 그렇고.”
“새삼스럽네요, 어머니. 제가 독을 먹고 사나흘을 앓았을 때도 이런 태도를 보여주시진 않으셨는데.”
이안은 이 자리가 우스웠다.
그는 화목한 가족인 척 연기를 하는 그들 틈에 기꺼이 낄 만큼 성정이 좋지 못했다.
미아가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그들을 받아준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줄은 몰라도, 그녀는 고맙다는 말은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얘, 너는 며느리가 될 사람 앞에서 어머니의 위신을 세워주진 못할망정, 무정한 어머니라고 평판을 깎아야겠니.”
“미아 양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실 겁니다. 그렇죠?”
한참 그들이 주고받는 말의 동태만 살피고 있던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미아는 윌리엄의 웃는 낯이 어쩐지 음흉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거기에 이안이 협조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럼요! 어디까지나 저는 감사할 뿐이에요. 물론 저뿐 아니라 이안 경도 몹시 감사하고 있어요.”
“내가?”
쿡, 쿡.
미아는 보다못해 이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안은 입바른 소리를 절대 못 했으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베아트리체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 흐뭇하게 웃었다.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고.”
“…….”
“그 말을 바꿔 생각하면 남자는 여자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뭐 그쯤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겠니.”
베아트리체는 이안을 힐긋 보며 말했다.
이안은 슬슬 이 자리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윌리엄이 제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시니까 신빙성이 있네요. 아버지, 어머니의 말이라면 꼼짝도 못 하셨잖아요.”
“어머, 그랬나?”
베아트리체는 그제야 윌리엄을 잠시 보며 웃어 보이곤 와인을 가져가 우아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미아는 자리가 자리인지라 식욕이 돌진 않아 비스킷을 몇 개 주워 먹었다.
“당근은?”
“당근 좋아요.”
잘 익힌 당근을 미아의 접시에 덜어준 이안이 제가 썰어둔 스테이크 조각 하나를 그녀의 입가로 내밀었다.
미아는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윌리엄과 베아트리체의 시선 모두, 자신을 향해 있었다.
이건 좀…….
예비 시어머니와 도련님 앞에서 보일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미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손길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아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어 고기를 받아먹었다.
“봐, 윌리엄. 사랑에 빠진 남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머니가 굳이 짚어 말하시지 않아도 얼마나 둘이 끔찍한 사이인 줄은 잘 알겠네요.”
윌리엄의 굳은 얼굴이 꼭 못볼 꼴을 본 사람과 같았다.
하긴, 형제의 연애행각을 보고도 태연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저번에 보니 바드 가문의 여식 에바 양이 너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구나.”
“…….”
“너는 어떠니?”
결국 대화는 이런 흐름으로 흐를 예정이었다.
두 사람이 혼인 문제로 꾸준히 대립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달브에 가있던 미아만은 그 문제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였다, 순수하게 호기심을 내비친 것은.
“정말요? 혼인을 준비하시는 거예요, 윌리엄 폐하?”
윌리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이번에는 이안이 미아의 손을 찾아 쥐었다.
말리는 듯한 투였으나, 영문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할 뿐이었다.
“아하하, 미아 양이 물으시니 대답을 해드려야겠네요. 저는 혼인 생각이 없습니다.”
“혼인 생각이 없으시다고요?”
“윌리엄.”
베아트리체는 윌리엄이 더 나가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 엄중한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미 입을 연 윌리엄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저에게도 형처럼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정말요?”
미아는 놀랐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 여인과 결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베아트리체는 막 다른 사람과의 혼인을 권했으니 답은 하나였다.
“예. 그치만 그 여자와는 혼인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죠.”
베아트리체의 표정이 굳었다.
미아는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윌리엄은 여유롭게 빙글빙글 웃으며 미아를 응시했다.
“안 그렇습니까, 미아 양?”
대답을 종용하는 태도는 짓궂은 장난이었다.
거기다 대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감히.
빤히 베아트리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
“안 그래, 형? 미아 양이 내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에 말을 잃으셨네.”
윌리엄은 이번엔 이안을 향해 말했다.
이안은 스스로 덫에 걸려든 미아가 가여운지 웬일로 입을 열었다.
“혼인할 수 없는 이유라는 게 어머니의 반대는 아니겠지.”
“그야…….”
“그럴 리 있니?”
윌리엄의 말을 끊고 들어온 베아트리체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한 입 크게 씹자, 핏물이 입술 새로 배어 나왔다.
꼭 그녀의 붉은 입술과도 닮았다.
그 모습을 보자 미아는 저도 모르게 고기의 비린 맛을 느껴 속이 좋지 않아졌다.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아낸 베아트리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기를 삼킨 뒤의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고 우아하기만 했다.
“네가 사랑한다는 그 여인, 데려오렴.”
“예?”
“그동안 넌 성실히 내가 권하는 여인들을 만나주었잖니. 이젠 내가 그 성실함을 보일 차례인 것 같구나.”
베아트리체의 말에 윌리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그의 그런 빈틈을 놓칠 생각이 없는 듯 이어 말했다.
“기왕이면 이안과 미아도 같이 만나면 좋지 않겠니?”
“그건…….”
“네가 그렇게 절절히 사랑한다는 여인, 이름이 뭐더라. 그래. 레이첼이었지? 레이첼을 만나고 싶다, 나도.”
레이첼.
미아는 입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어떤 여인이기에 마음을 빼앗긴 걸까, 게다가 이렇게 절절히 사랑하는 것일까.
“저도 보여주고 싶습니다만, 보일 수 없습니다.”
“어째서지?”
“……그녀는 죽을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윌리엄은 그렇게 말을 이었다.
베아트리체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비화가 있었다니,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라고 생각하던 미아가 어안이 벙벙해져 베아트리체를 보았다.
이안은 정말이지 이토록 순진한 제 여인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작게 도리질했다.
“그럼 내가 보러 가겠다.”
“어머니가 직접요?”
“그래. 내가 이안과 미아 양을 보고 느낀 게 있어. 진정한 사랑은 어떤 사람도 막을 수 없다는 거.”
움찔, 미아의 몸이 들썩이자 이안이 괜찮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미아는 얼굴이 화끈하고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진정한 사랑’ 이라니, 아직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제대로 고백한 적도 없었는데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으니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러시죠.”
윌리엄은 잔뜩 굳은 낯빛으로 결국 베아트리체의 말을 수용했다.
베아트리체는 그런 윌리엄을 보고 그제야 만족한 듯 작게 웃었다.
제 무덤을 파는 것이 미아만은 아니구나, 이안은 차게 생각했다.
“그럼 다음으론 두 사람의 혼인 얘기를 해볼까.”
“혼인이요?”
미아의 포크에 꽂혀 있던 브로콜리가 아래로 툭하고 떨어졌다.
혼인을 하자는 말은 자주 나왔었지만, 막상 이렇게 진짜로 혼인을 하란 얘기를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그래, 두 사람은 혼인해야지.”
“하지만, 아직 준비가…….”
“준비랄 게 뭐가 필요하니. 두 사람의 몸만 있으면 되지.”
미아는 반사적으로 제 배 위로 손을 얹었다.
만약 두 사람이 혼인을 해 공식적인 부부가 된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아이의 아버지가 이안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윌리엄이 이안을 위험하다 생각하지는 않을까.
“어머니, 아직 혼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른 것 같습니다.”
윌리엄이 이안 대신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인지 ‘우리끼리 알아서 하겠다’며 말을 이어야 할 이안은 정작 조용하기만 했다.
조용한 이안을 불안하게 느낀 미아가 시선을 돌렸으나, 그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이르긴 뭐가. 배도 점점 더 불러올 텐데.”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니까요.”
“곤란해?”
“예. 그리고 폐위된 황제의 혼인을 이곳, 황궁에서 하는 것도 좀 우스워 보이지 않겠습니까.”
윌리엄은 단호하고 명확하게 제 뜻을 전달했다.
여기서는 결혼 못 시켜준다는, 그리고 바트르 황궁에서는 두 사람을 반길 생각이 없다는.
베아트리체는 그런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눈썹을 들썩였다.
“그래?”
되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미아는 먹은 것들이 고스란히 위장에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안은 어떻게 생각하니.”
“형 생각이야, 들을 것도 없이…….”
“하고 싶습니다.”
“뭐?”
윌리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미아 역시 놀란 눈이긴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혼인을 한다고 해도 아이가에서 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이안은 바트르 황궁에서 그것도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겠다 선언했다.
“여기서 하겠습니다, 혼인.”
쨍그랑.
날 선 소리를 내며 윌리엄이 들고 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