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우리의 것
새벽녘, 이안은 아직 잠들어 있는 미아를 내려 보았다.
저를 돌보겠다는 것을 다그치고 얼래, 겨우 끌어안고 재웠는데 그새 깨어났는지 어디서 구해 온 물수건을 손에 쥐고 있다.
약병에 조금 남겨둔 약을 손에 묻힌 이안이 조심스럽게 미아의 다리를 들여다보았다.
마차에 굴러떨어지면서 보호하려 했어도, 상처가 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를 움켜쥔 그가 조심스럽게 상처 위로 약을 덧발랐다.
깨어있을 때 말해봤자, 분명 그에게 발라주어야 한다며 거절할 그녀였다.
상의를 벗은 그의 상처를 감싸 동여맨 천은 미아의 속치마였다.
이안이 괜히 마음을 쓸까 봐 일부러 등진 채로 속치마를 찢은 그녀는 그에게 누구도 보여주지 않았던 헌신을 보여주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일까.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이토록 마음 쓸 수 있는가, 단순히 상냥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니, 그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잠든 미아가 추운 듯 몸을 뒤척였다.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창문이 덜컹거리며 소리를 내자 이안이 슬쩍 손을 뻗어 미아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미아는 그의 것처럼 그의 품으로 얌전히 들어와 안겼다.
“왜 자꾸 떠나려 해?”
이안이 속삭이듯 그녀에게 물었다.
물론 꿈을 헤매는 그녀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으음…….”
뒤척이며 제 허리에 팔을 두르는 미아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 이안이 열린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새벽, 여명의 빛을 응시했다.
어디로 향할 수 있을까, 그들은.
목숨을 건 맹세를 지키려면, 살아서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야 했다.
어느덧 조금 튀어나온 그녀의 배는 아이의 존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이안이 둥그런 배를 쓸어 보았다.
이 안에 살아있는, 독립된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미아는 여전히 앳된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여전히 아이 같은데.
그런 그녀가 아이를 배었다니, 그것도 어느덧 사 개월 가까이 되었다니.
그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 투성이었다.
앞으로 반년, 그녀가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옆에서 누구보다 의지가 되어야 하는 사람은 그였다.
깜빡, 깜…… 빡.
미아가 눈을 얼핏 뜨는 것 같더니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을 하고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워주었다.
혹시나 그녀가 눈이 부실까 싶어서.
“이안?”
“깨었어?”
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얼핏 웃으며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웃는 얼굴의 이안이라니, 어쩐지 꿈만 같아서 미아는 자꾸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믿기지 않았다.
그가 이런 얼굴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게.
이곳이 폐가면 어떨까.
그와 있는 이 순간이 벅찬데, 그의 품이 이렇게 따뜻한데.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움켜쥐었다.
“꿈 같아요.”
“꿈이었으면 해?”
“아뇨, 그건 아니고.”
“꿈 아니야.”
이안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미아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가 뗐다.
눈썹에 닿는 간질간질한 느낌이 거짓이 아닌 듯 미아의 눈이 조금 더 크게 뜨였다.
“춥지 않아요?”
“아이가에선 이보다 더 추운 날도 많았다.”
“아이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미아는 문득 애니와 잭,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많은 반가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아이가를 떠나고 나서도 종종 꿈에 나오던 그 얼굴들을.
“그리워?”
“네?”
이안은 의외였다.
아이가에서 그녀가 몇 번이나 달브를 그리워했던 것을 알았다.
그녀의 가족들을, 그녀가 지내던 달브 황궁과 황제와 황후를.
사람 간의 정이나 그리움에 대해서는 무지한 이안이었다.
원래의 이안이었다면 그런 마음을 가진 미아를 보며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을 부술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갈 곳을 없앤다면, 그녀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될 터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미아가 원할까?
그런 그를 평생 원망하며 살지는 않을까.
누구를 원망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는, 이안도 알고 있었다.
“네. 그리워요.”
“아이가가?”
“네.”
“그 아무것도 없는 황량하고 추운 땅이.”
부정하기를 바라는 건가?
자꾸 딴지를 거는 듯한 이안의 태도에 미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미아는 실제로 아이가를 그리워했다.
“아이가가 그리웠어요.”
“……웃기는군. 떠났으면서.”
“그리워한 건, 아이가뿐이 아니에요.”
미아는 진지해진 제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이안의 양 뺨을 감싸쥐었다.
얼결에 미아의 손 안에 갇힌 그가 눈을 맞춰오자, 그녀가 곧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이가에서의 추억이, 이안 경과 나눴던 시간이 모두 그리웠어요.”
“왜 나를 떠났어?”
“나 때문에 다치는 게 싫어서요. 그뿐이에요, 이유는.”
“나를 믿지 못했군.”
“믿지 못한 게 아니라…… 봐요. 결국 다쳤잖아요.”
미아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그래서인가, 차마 그 말만은 이안도 부정하지 못했다.
이안은 벗어둔 옷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가자.”
“어딜요.”
“돌아가야지, 우리가 있을 곳으로.”
우리, 라고 했다.
이안은 미아와 그 자신을 묶어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표현이 썩 마음에 든 미아가 ‘우리’라고 중얼거렸다.
“거기가 어딘데요?”
그래서 하마터면 이안이 일어나는 것을 넋을 놓고 지켜보다가 따를 뻔했다.
이안은 제 옆에 내려둔 검을 매며 말을 이었다.
“바트르 황궁.”
“황궁이요? 아이가가 아니라……?”
“이제 아이가로는 부족해.”
“부족하다는 건…….”
“넌 다 가져야 해, 미아. 내가 다 줄 테니.”
다 준다는 말에 설레기만 하면 좋으련만.
미아의 마음은 불안으로 술렁였다.
사방이 적인 이 상황에서, 달브도 바트르도 그들을 반기지 않는 이 상황에서.
잡을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손뿐이었다.
❀ ❀ ❀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바트르 황국의 황제 윌리엄은 그의 아름답고 지독한 어머니 베아트리체를 향해 물었다.
베아트리체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뒤 냅킨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닦았다.
핏물 같은 붉은빛이 묻어났다.
“무슨 생각이냐니?”
“형이 미아 양을 찾아오기라도 하면요. 그럼 나라가 불안해질 거라는 생각은 못 하십니까?”
“형은 이미 황위를 네게 빼앗겼어. 가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네 불쌍한 형에게, 사랑하는 여자 정도는 줄 수 있지 않니.”
윌리엄은 고작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형제간의 정이라고 부를 것도 없다는 것을 베아트리체가 모를 리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베아트리체가 제 진심을 숨기기 위해 빙빙 에두른 말장난이나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여자 정도가 아닙니다. 적국의 황태자비입니다.”
“이젠 아니야.”
“정식으로 둘이 이혼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쯤 되면 그 황제가 무엇이라 생각할 것 같니?”
돌연 베아트리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황제?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
윌리엄은 베아트리체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일전에 보았던 달브 황국의 황제, 노아를 떠올렸다.
“소문이 돌고 있다더구나.”
소문이라면, 윌리엄도 알고 있었다.
원한을 품은 황태자비 때문에 달브에 이례 없는 추위가 이어지고 있다고.
물론 대대로 신성한 땅이라 불리며 굳건한 세력과 풍요를 지켜온 달브의 국민으로서는 동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그런 때에 나라를 뒤흔들만한 황태자의 스캔들이 터졌으니.
사고가 자연히 그쪽으로 흐르는 것 역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더 이상 그들은 미아를 포용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죠? 미아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이제 그들도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그 아이가…….”
윌리엄의 눈매 또한 변했다.
설마 그 아이의 아버지가 이안이라면, 그건 가만히 두고 지켜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안의 눈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이미 한 차례 목격한 그였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다, 변한 이안은.
“아니.”
“……예?”
“아니다. 그 아이는 이안의 아이가 아니야.”
“그렇다면 그쪽에서 두 손 놓고 황세손마저 포기했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니? 제발, 머리를 좀 써!”
베아트리체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아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는 답을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 그녀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스스로 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한심했다.
“아이를 챙길 거다.”
“아이요?”
“그래. 그 아이만 있으면 된다고 할 거야.”
“그렇다는 건…….”
“네 뜻대로 될 수 있다는 거다.”
아이도 치우고, 여자에 눈이 먼 형도 치우고.
나라끼리는 우호 관계를 유지한 채로, 잃은 것 하나 없는 장사를 할 수 있단 소리잖아.
베아트리체의 뜻을 그제야 알아차린 윌리엄의 눈이 반짝였다.
“형은 미아 양을 찾았을까요?”
순진하고 투명하긴.
티가 다 나는 윌리엄의 행동을 보며 베아트리체는 제 아들이 멍청한 것이 다행인 것인지 불행인 것인지 생각했다.
순한 아들이라는 모두의 생각과 달리 윌리엄은 자신의 권력과 자리를 호시탐탐 위협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이안을 두었을 것이다.
이안에 대한 소문이 사그라들질 않으니, 그 목을 다 베어둘 수가 없어 내린 것뿐인데.
그게 오히려 그녀의 목을 겨누는 칼날이 되었다.
“네 형이 뜻한 것 중 되지 않은 것이 있니?”
“형이 뜻한 게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이제껏 뜻한 게 없었잖니.”
그제야 윌리엄은 이안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동안 이안이 그를 내버려 둔 것은 바라는 게 없어서였다는 그 말이.
미아를 원하게 되었으니, 지금과 달라진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의 자리 역시 위험해지는 것인가?
“저기, 그…….”
그때였다.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베아트리체가 몸을 일으켰다.
“들어라.”
황제 대신 답하는 것이 마뜩잖았으나, 윌리엄 역시 뜻이 같았다.
윌리엄이 시중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문이 열리고 기사가 뛰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기사는 윌리엄과 베아트리체에게 차례로 인사를 해보이곤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다.”
“누가.”
“그, 그게…….”
“누군데 이 난리야!”
설마. 베아트리체가 걸음을 문밖으로 옮겼다.
기나긴 복도의 끝에 들어오는 두 인영이 보였다.
윌리엄이 한발 늦게 방을 빠져나와 베아트리체의 뒤로 섰다.
“형이 어떻게…….”
윌리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입을 틀어막았다.
베아트리체가 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다가섰다.
큰 창으로 들어차는 햇볕 아래 드러난 그들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드레스 자락이 죄 찢어진 채 활짝 웃는 미아나, 그런 미아의 옆에서 등이 훤히 뚫린 사이로 상처를 드러낸 채 선 이안이나.
이런 게 천생연분이라면, 천생연분이지.
베아트리체가 미아를 끌어안을 때, 이안은 비로소 나른히 숨을 내뱉었다.
이안의 시선이 잔뜩 불안한 얼굴이 되어 저를 경계하는 윌리엄을 향했다.
“돌아왔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