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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목숨을 바친 맹세 (63/95)

63화. 목숨을 바친 맹세



 

“저기, 저…… 이건 값이 얼마나 나갈까요?”

미아는 조심스럽게 머리에 꽂는 핀 하나를 내밀었다.

그 핀은 카일렌이 미아의 생일에 선물한 것으로 영롱한 보석이 다섯 알이나 박혀있는 것이었다.

미아가 내민 핀을 보던 보석상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렇게 귀한 건 황족이나 귀족 중에서도 극히 소수가 소유할만한 장신구였다.

미아가 뒤집어쓰고 있는 천 안쪽을 들여다보려는 보석상의 눈길에 그녀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어디서 훔쳤어요?”

척 보면 척이라는 듯 보석상이 물었다.

미아는 보석상의 말에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훔쳤다니?

설마, 그녀가 귀족의 것을 훔친 시종처럼 보이는 건가?

“훔치지 않았어요.”

“그럼 아가씨가 이런 곳에서 이런 물건을 팔 사람이 아니어야 맞는 건데, 지금 내 앞에 이걸 내밀고 있잖아?”

“…….”

꿀꺽.

긴장감이 미아의 몸을 맴돌았다.

벌써 소문이 돌고 있었다.

황태자와 함께 돌아왔던 황태자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고.

황궁 주위로 사병을 풀어 사라진 황태자비를 찾고 있다고.

“아, 알았다.”

보석상은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손뼉을 딱 쳤다.

‘여차하면 도망가자. 도망갈 땐 도망가더라도 꼭 이 머리핀은 챙겨서 도망가자.’

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잔뜩 경계심을 세우고 보석상을 바라보았다.

보석상의 입이 열렸다.

“남편 몰래 이거 했구나?”

보석상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도박을 뜻하는 것 같았다.

미아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오해였지만.

설령 자신을 그렇게 오해하더라도 보석의 값만 잘 쳐준다면, 견딜 수 있었다.

미아는 얼결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에, 어디 보자. 내가 특별히 곤란하시지 말라고 값 잘 쳐 드릴게.”

보석상은 돋보기를 들어 머리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햇빛이 둘의 머리 위로 쏟아 들자 보석의 빛 그림자가 사방으로 튀었다.

눈부심 때문에 미아는 손을 들어 제 눈 앞을 가렸다.

그 사이로 흰 얼굴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보석상이 힐긋 보더니 주머니 두둑이 돈을 꺼내주었다.

“이, 이렇게나 많이요?”

“가진 것 전부입니다.”

“그, 그 정도까지 필요한 건 아닌데.”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것인데 다음에 또 꼭 맡길 물건 있으면 가져오십시오. 또 값 잘 쳐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이걸 다 받아도 되는 건가?

카일렌은 그렇게 값비싼 걸 생일 선물로 사줬단 말이야?

이런 장신구 몇 개나 있는데, 차라리 그 돈으로 시중들에게 고기 한 번을 더 먹이지.

미아는 저도 모르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일단 감사하다며 돈이 든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러니까, 그랬는데.

당연히 보석상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 ❀ ❀

“여깁니다. 분명 여기 서서 저에게 이 장신구를 내밀었습니다.”

카일렌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머리핀을 보았다.

미아가 사라진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귀하게 자라온 사람이라서, 시중 없이는 바깥을 혼자 돌아다닐 일도 거의 없던 사람이라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버텨나가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맞습니까?”

카일렌은 저를 향한 물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미아의 은은한 검은빛 머리칼과 잘 어울릴 것 같아 고른 올리브색 머리핀이었다.

그걸 고를 때만 해도 미아를 이렇게 잃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값을 잘 쳐주었다니, 고맙군. 앞으로 다시 찾으면 알지?”

“예. 압니다. 당연히 알죠.”

보석상은 카일렌의 수하가 꺼내주는 은화 몇 닢을 황송하다는 듯 받아들었다.

카일렌은 보석상의 손에 들린 머리핀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틀었다.

전의 미아였다면, 감히 이것을 팔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카일렌이 준 것이라면 무엇이든 귀하게 여기는 여자였으니까.

“이제 어디로 갈까요? 아마 이곳에서 먼 곳으로 떠날 생각은 못 했을 겁니다.”

“이 주위를 샅샅이 뒤지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의 동태가 파악되면 곧장 연락해달라고 하라.”

카일렌은 그렇게 이르고 걸음을 옮겼다.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예년과 달리, 날이 점점 더 추워졌다.

사람들 사이에 돌던 소문은 불고 불어나서, 황국 내 사람들은 이맘때쯤 수확되어야 할 뿌리채소가 다 얼어붙어 흉작이 된 이유가 모두 그들의 황태자에게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아이가의 겨울이 그렇게 매섭고 춥다는데 그 추운 땅에 황태자비를 버리고 왔으니 황태자비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얘기였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카일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가 오해받는 것보다, 미아가 오해받는 것이 더 마음에 쓰였다.

미아는 어떤 상황이 와도 누구를 저주할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그 대상이 카일렌이라면, 절대로 저주할 수 없는 여자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아를 데려와. 그렇지 않으면 너를 황위에 올릴 수 없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카일렌은 황위가 아니라 미아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사랑과 아이를 찾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황위 따위는 처음부터,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 ❀ ❀

“……그래서 이안 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수석이라는 자는 그동안 베아트리체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에 지쳤다는 말을 길고 완연하게도 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 번도 흥미의 기색을 보이지 않던 이안은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알겠네.”

“……?”

“……안 나가고 뭐 하는 거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수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안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안이 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베아트리체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알았다고 대답했는데.”

“하지만, 저…… 그러니까…….”

수석은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목숨을 바쳐서 성사시킨 이 만남의 대가가 고작 이 심상한 한 마디의 대답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답을 주지.”

그렇게 이안이 말의 포문을 닫아버리자, 수석은 더 말하지 못하고 빠져나갔다.

수석이 이용하는 응접실에서 수석이 쫓겨나는 꼴이라니.

뒤에 선 채로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신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도무지 사람의 마음 사는 법을 모른다.

불안함을 느낀 수석이 베아트리체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이실직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물론 베아트리체야, 지금은 윌리엄보다 이안의 편을 들 확률이 높았지만.

“달브에서 연락이 왔어.”

“네 소식통은 거리에 떠도는 소문보다도 느리군.”

“새로운 소식인데? 황태자비가 다녀간 보석상이 있대.”

이안의 시선이 그제야 신시아를 향했다.

신시아는 믿을만한 정보통에게 얻은 정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방을 빠져나가려는 이안을 신시아가 붙잡았다.

“지금 직접 가기라도 하게?”

“놔.”

“이안, 아무리 네게 그 여자가, 아니…… 미아 양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아직 달브와 우리는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고. 황태후 전하도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이안은 신시아에게 이 상황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는 결정했고, 결정한 대로 행동했다.

그것이 이안이 행동하고 사고하는 방식이었다.

“너 진짜 내 말 안 들을 거야?”

신시아는 제 말에 답도 없이 걸음을 옮기는 이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뒤따르는 신시아가 귀찮은지 걸음을 빨리했다.

하는 수 없이 뒤처진 신시아가 이안의 등에 대고 외쳤다.

“네가 뭐에 홀린 건지는 몰라도, 현명하게 행동해!”

그래, 홀린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신시아는 모르고 있다.

애초에 그는 현명함이라고는 모르는 사내였다.

미아가 사라진 후로, 미아가 떠난 뒤로 일 분 일 초가 아까웠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녀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있는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

그런 생각을 하면, 그는…….

“어디 가?”

이안을 불러세운 것은 윌리엄이었다.

‘정복 차림인 것을 보니 관료를 만날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짧게 생각하며, 이안은 윌리엄을 지나쳐 걸었다.

윌리엄은 그런 이안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황제에 대한 예우를 차리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어? 아아, 맞아. 형은 막돼먹은 자식이었지?”

“…….”

“저번에 말했던 그건 잘 진행되고 있나?”

“…….”

“그녀를 찾았다더군.”

덜컥.

그제야 이안의 걸음이 멈췄다.

윌리엄의 쓸모없는 도발에 넘어가는 법이 없었는데, 그도 어지간히 물러진 모양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흔들릴 여지가 있다는 것은 윌리엄에게는 희망이었다.

“내가 전에 잘못 말한 걸 사과하고 싶어, 형.”

이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윌리엄을 눈으로 좇았다.

미사여구를 뺀 본심만을 말하라 종용하는 눈빛이었다.

“형의 아이, 그래. 그 아이까지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네가?”

“아이는 죄가 없잖아? 남부러운 것 없는 황족으로 키워줄게. 내가 양자로 들이겠다는 소리야.”

“…….”

이번엔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해올까 싶었더니, 고작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것이 그거다.

아이를 처리할 방법을 만들어주면서도, 미아를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구실을 만들어주겠다는 뜻이겠지.

“윌리엄.”

“응, 형. 말해. 내 친절함에 감탄했다고 해도…….”

빡.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윌리엄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이안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윌리엄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이안의 주먹 위로 솟은 뼈의 굴곡에 멍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윌리엄이 바닥에 피를 뱉었다.

“미쳤어?”

윌리엄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한쪽만 기울인, 표정 없는 얼굴을 보면 당장이라도 윌리엄의 목을 벨 것만 같았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다.

미아를 만난 후로, 사랑에 빠진 후로 달라졌다는 것은 그저 착각에 불과했다.

“지금부터 확인해 봐.”

이안은 윌리엄을 지나쳐 복도를 걸었다.

마침 얘기를 끝내고 나오는 귀족들이 여럿 정무실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이안은 그 안으로 들어서서 입을 열었다.

“달브의 황태자, 카일렌이 버린 여자. 달브에 저주를 내렸다는 그 여자를 데려올 테니, 허락해주시죠.”

이안의 시선은 올곧게 베아트리체를 향해 있었다.

귀족들이 술렁이는 것이 들렸다.

“그, 그렇게 되면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거 아니야?”

“저번에 이미 우린 한 차례 밀렸는데…….”

베아트리체는 그들의 걱정을 잠식시키듯 입을 열었다.

“그 여자를 데려오지 못한다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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