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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네 것을 가져야겠어 (62/95)

62화. 네 것을 가져야겠어



 

윌리엄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이안의 아이가 아닌, 카일렌의 아이라고.

이안이 돌연 자신의 아이를 갖고자 했을 리도 없고, 바보가 아닌 이상 여자를 임신시키지 않는 방법에 대해선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아는 임신을 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는 카일렌이었다.

“…….”

이안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이 되려 윌리엄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를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와 행복할 것은 그였다.

그는 원하지 않았고, 윌리엄은 원했다.

그러나 원하지 않았던 그는 황제가 되었고 원했던 윌리엄은 황제가 되지 못했다.

평생 형의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다.

그게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는지, 이안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톡, 톡.

이안의 기다랗고 매끈한 손가락의 끝이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무언가를 고심하고 있을 때, 중요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 그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설마, 정말 미아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그걸 윌리엄은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조바심은 실수를 부른다.

“왜? 형도 아버지가 다른 자식이라서, 형의 자식도 그렇게 키울 셈인가 보지?”

그래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이안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위험을 감지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이안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윌리엄을 응시하였다.

윌리엄은 그 눈빛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천것의 아들이다.

베아트리체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는 황제가 아니다.

이 소문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쭉 이어졌다.

물론 황제는 그 소문을 입에 담는 이를 찾아 즉시 벌을 주었으나, 그렇다고 사그라들 소문이 아니었다.

‘시끄러우니 이제 그만 내보내지.’

어리다는 이유로 필연적으로 울 수밖에 없는 아이를 향해 선황제는 늘 차게 말했었다.

베아트리체는 이안이 선황제의 심기를 거스를까 늘 전전긍긍했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하려 들었다.

이안은 엄격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니 그라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황제와 닮은 구석이라곤 한 구석도 없잖아. 제 어미만을 빼닮았지. 어떤 남자가 자기가 황태자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다니던걸?’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이안은 차게 웃었다.

만약 이 소문 속의 남자가 진짜 이안의 아버지라면, 거렁뱅이도 그런 거렁뱅이가 없었다.

어리석은지고.

아들의 출세를 막고 있는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의 안위마저 잃은 사람이었다.

더 이상 그런 소문이 들리지 않을 즈음 어렴풋이 이안은 알았다.

그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든 아니든, 더 이상 혀를 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거라고.

“……우리 아버지가 좀 엄격했어?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잖아. 제대로 된 방식으로 사랑해주지 못한 건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그런 환경에서 자란 우리가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뜻이지.”

윌리엄은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안은 물끄러미 윌리엄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그래, 확실히.

이런 내가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건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내 자식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자식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법을 몰라, 형.”

“…….”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 알더라. 나는 그걸 다른 귀족 영애를 보고 알았어. 좀 우습지만, 그 영애는 무척이나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더라? 행동 하나하나가 미치게 사랑스러웠어. 그 영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라도 어머니께선 그 영애도 신붓감 후보 중에 하나로 올렸었지. 뭐, 나쁘지 않았어. 예의가 바르고 마음씨가 따뜻하고.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분명 훌륭한 어머니로 자식들을 키워내리라 확신했지.”

“…….”

솔직히 윌리엄의 이야기 따위 이안은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듣는 시늉은 했다,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서.

“그치만 그래서 그 여자가 끔찍하게도 싫었어. 우린 이런 사람이야, 형.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법도 모른다고. 어차피 형이 지금 미아 양에게 갖는 것도 잠깐의 흔들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윌리엄.”

이안은 입을 뗐다.

다른 것은 모두 괜찮았다.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어쩌면 윌리엄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든 일이 방법을 안다고 시작되지는 않는다.

어떤 것들은 오히려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빨려든다.

“형이 지금 하려는 건 사랑이 아니야. 형은 지금 미쳤어! 여자 하나에 미쳐서 온 나라를 위험에 빠트리려는 거라고. 거기에 멍청한 어머니는 동조나 하고 있고…….”

격양된 윌리엄의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한 듯했다.

그런 윌리엄을 차게 바라보던 이안이 조소하듯 입을 열었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뭐?”

“내가 처음으로 무엇을 탐낸다는 게, 욕망한다는 게 너는 두렵지.”

“…….”

“내 것이라면 뭐든 갖고 싶어 했던 너잖아. 내가 가진 것들이 부당하다고 네가 생각해왔던 건 안 그래도 익히 알고 있었어.”

“……형.”

“내가 그동안 움직이지 않은 건, 욕망이 없었던 탓이야.”

“형, 그건 그냥 조금 지나면 사그라들 감정이야. 바트르를, 황제의 직위를, 어머니를 끔찍하게 여겼던 건 형이었어.”

“원하는 것이 생긴 지금의 나는, 막을 도리가 없어.”

윌리엄은 침묵했다.

두려움과 긴장감에 익숙지 않은 전율이 일었다.

이안은 지금 이 순간, 윌리엄의 실수 때문인지 그가 품게 된 욕망 때문인지는 몰라도.

결심을 하고 있었다.

“너의 것을, 내가 갖겠다.”

이안은 짧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리엄은 이안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피가 맺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불안할 때만 보이는 그의 습관이었다.

❀ ❀ ❀

“미아! 어딨습니까, 미아!”

카일렌은 미아가 뛰어갔다는 방향으로 달려가 정원을 샅샅이 뒤졌다.

미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급하게 쫓아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이곳에서 꽃과 나무를 가꾸며 시중들과 즐겁게 대화하던 그녀의 모습이 카일렌의 눈에 아른거렸다.

상처받았겠지.

어쩌면 그녀는 카일렌이 곧장 자신의 아이라고 말해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무엇이든 미아가 바라면 들어주었어야 했는데.

그녀에게는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미아를 보지 못했느냐?”

“다급히 뛰쳐나온 걸 목격했다는 이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 주위를 전부 뒤지라 일러.”

카일렌은 짧게 말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성벽을 따라 샅샅이 정원을 뒤지던 카일렌의 눈에 탐스럽게 핀 꽃송이가 들어왔다.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어요. 꽃은 개화시기라는 게 있잖아요. 먼저 피지 않더라도, 나중에라도 반드시 피니까. 피울 수 있으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저 꽃의 씨앗을 심으며 미아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형들과의 대련에서 크게 지고 난 뒤 시무룩한 카일렌에게 일부러 건네준 위로였다.

가만 보면 그녀는 늘 분주했다.

그녀가 이 궁 안에서 사랑 받은 것도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살뜰히 굴고 다정히 굴었으니까.

사람의 마음을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꽈악.

카일렌의 손 안에서 장갑이 볼품없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미아의 소중함을 모른 것은 둘째치고, 미아를 한 번 사랑할 마음조차 내지 않았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빼앗기고 나서야, 그녀의 마음이 변하고 나서야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이안의 말처럼 그는 형편없는 사내였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이제 잡은 것을 놓치지 않는 사내로 바뀔 것이었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 미아의 모습에 카일렌은 성안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쩌면 뛰쳐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촥!

물소리가 났다.

올리비아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아직 온기를 품은 찻물 때문인지 모멸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카일렌은 찻잔을 든 베아트리체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 들어 올리비아의 뺨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괜찮습니까?”

카일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올리비아의 뺨을 살폈다.

그래, 이 다정함이었다. 올리비아가 마음을 빼앗긴 것은.

아무리 황후 자리가 귀하다고는 했어도 이안의 옆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이안은 자신을 전혀 생각지 않는 사람이어서였다.

반면에 카일렌은 올리비아를 어찌 됐든 받아주고, 다정하게 보살펴주었다.

올리비아의 청이라면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받아주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걸까.

올리비아는 원망이 담긴, 울먹이는 얼굴을 한 채 카일렌을 마주 보았다.

그런 카일렌을 바꾼 것이, 바로 자신임을 자각하지는 못한 채로.

“좀, 체통을 지키지 못하겠니?”

메릴린은 이 상황이 답답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말했다.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분노가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이를 가진 줄 알면서도 황달이꽃 차를 먹이려고 하다니. 미아 양이 왜 아이가에서 달브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는지, 안 봐도 알겠습니다.”

“그건 오해십니다. 만약 알았다면…… 너!”

메릴린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이 모든 판을 깐 것은 저 간사한, 그녀의 아들을 홀린 여우, 올리비아였다.

올리비아는 금방이라도 제게 달려들 듯한 메릴린의 태도에 위축되며 카일렌의 품에 안겼다.

카일렌이 진정하라는 듯 메릴린의 앞에 손을 뻗었다.

“모르겠어? 이 계집이 다 꾸민 거야! 미아가 네 아이를 가졌다면 지금 네 태도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는지, 생각은 하는 거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아를 데리고 오겠다던 네 맹세는 다 무엇이냐? 어?”

“어머니, 그건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도…….”

순간 카일렌의 말이 멎었다.

자신에게 그 아이가 이안의 아이라고 확신에 차 말했었던 건 올리비아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 말을 덜컥 믿고.

카일렌의 시선이 무겁게 올리비아에게로 향했다.

올리비아의 눈빛이 그제야 흔들렸다.

속고 또 속았다.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미아가 이안을 신경 쓰고, 사랑한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서. 그 질투심에 미쳐서.

눈앞에 빤한 진실을 두고도 몰랐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카일렌은 알고도 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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