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신은 누구의 편?
한창 아이의 아빠가 이안이라 오해받는 상황에, 베아트리체가 등장해준다니.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자꾸 씰룩거렸다.
어지간해서 직접 움직이지 않는 베아트리체가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미아가 그녀의 눈에 들었다는 것을 뜻했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미아가 그녀에게 필요하다는 뜻이었고.그렇다는 얘기는, 곧…….
“안 됩니다! 들어가시면 안 돼요! 아무리 바트르 황국의 황태후 전하시더라도 이렇게 멋대로 궁을 휘젓고 다니실 수는 없어요!”
시중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올리비아의 눈이 반짝였다, 하늘뿐 아니라 온 세상이 그녀를 돕는 것만 같았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베아트리체는 늘 그렇듯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고 곧은 자세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짙은 향이 바람에 실려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베아트리체는 곧장 고개를 깊이 숙여 메릴린에 대한 예를 갖췄다.
메릴린은 난감해졌다.
막 쳐들어온 불청객이지만, 어쨌든 상대국의 황태후였다.
예의 없이 대했다가는 또 무슨 분쟁이 벌어질지 몰랐다.
“…….”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미아는 베아트리체를 보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달브 황궁에 베아트리체가 찾아오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베아트리체의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이안은 괜찮냐고, 잘 지내고 있냐고.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맹렬한 충동이 그녀를 뒤덮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
그리고…….
미아의 시선이 카일렌에게 향했다.
카일렌은 베아트리체의 등장만으로도 압도당한 모양인지 조용히 미아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마치 누구에게도 그녀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황태후 전하를 뵙네요.”
메릴린은 마지못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제야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선 것이, 보통인 여자가 아님을 메릴린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응접실에서 기다리셨다면, 알아서 찾아뵈었을 텐데요.”
메릴린이 입을 뗐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엄중한 것이 베아트리체의 기를 초장에 꺾으려는 기색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꺾여줄 그녀가 아니었다.
“제 아들에게 칼을 겨눈 이가 있다기에, 발걸음이 급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들에게 칼을 겨누다뇨?”
메릴린의 물음에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카일렌을 향했다.
카일렌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그사이, 미아는 조심스럽게 그가 쥔 손을 빼내었다.
이런 상황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은 이상하고 어색했다.
어른들 앞에서 애정행각이라니, 사랑하는 사이에도 창피한 일인데 그와 그녀는 이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그 움직임은 베아트리체에게 기회가 되었다.
베아트리체는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곧장 미아에게 다가가 방금까지 카일렌의 손에 잡혀있던 그녀의 손을 찾아 쥐었다.
“미아!”
“황, 황태후 전하.”
“사라졌다기에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저를요?”
“그래. 아이가에 누군가 침입해 너를 데려갔다고 들었어. 그래서 이안이…….”
“이안 경이 다치셨어요?”
덥석.
미아가 베아트리체의 손을 움켜쥐었다.
베아트리체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겨우 끌어내렸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아들을 사랑한 여자는 미아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일 터였다.
“아니, 이안은 멀쩡하단다. 하지만 얘야, 너를 좀 보렴. 이렇게 야위었다니. 대체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니?”
움찔.
카일렌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모지리 같으니라고. 메릴린은 그런 카일렌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베아트리체에게 돌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베아트리체와 미아에게 다가갔다.
“지금 내 며느리에게 뭐 하는 겁니까?”
“며느리시라뇨? 황태자 전하와 미아 양의 사이는 이미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뭐라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증표로 저기, 서 있는 올리비아를 좀 보세요.”
모두의 시선이 올리비아를 향했다.
당연히 곱지 않은, 뾰족한 시선이었다.
올리비아는 억울했다. 이 모든 일에 중심에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 미아였다.
비난받아야 할 사람도 자신이 아닌 그녀였다.
“당신의 며느리잖아요?”
메릴린이 자신은 이런 며느리를 둔 적이 없다며 발뺌하듯 말했다.
물론 사실이었다.
올리비아는 베아트리체가 직접 고른, 그녀의 며느리였다.
“그렇죠. 한때 제 며느리라서 잘 아는데, 대체로 영리한 아이랍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좀 멍청하죠. 그 면을 제가 가장 좋아했어요. 앞으로 부리실 때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올리비아의 얼굴이 종잇장 구겨지듯 순식간에 구겨졌다.
처음 듣는 모욕이었다.
“아뇨. 제가 부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저에게는 이미 완벽한…….”
“며느리가 있으‘셨었’죠.”
“뭐라고요?”
“미아 양이 얼마나 참하고 반듯한 숙녀인지는 제가 잘 안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후 폐하의 아드님께서는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지금 무슨 말씀을…….”
“카일렌 전하께서는 미아 양을 버리고 올리비아와 밀애를 즐기신 것도 모자라 자신의 시신을 수습하러 온 미아 양을 차가운 땅 아이가에 그대로 두고 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찾으러 갔잖아요!”
“찾으러 갔다뇨?”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미아는 여전히 손목을 붙잡힌 채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지금 설마 아이가를 급습한 것이 카일렌 전하라는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
“아시죠? 저는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으로 아들이 황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들이 황위에서 내려온 이유는 오로지 카일렌 전하의 죽음 때문이었죠. 전쟁은 끝났고, 카일렌 전하는 살아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폐위된 황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드님이 황제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황태후 전하의 자리는 보존되었고, 이안 경 또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간 거라 생각하는데요. 희대의 폭군이라는 소문이 들렸던 것을 보면, 평소 행태를 알 수 있잖습니까.”
두 여인의 기싸움은 팽팽했다.
메릴린은 다가와 미아의 다른 손을 찾아 쥐었다.
얼결에 미아는 예비 시어머니와 현 시어머니 두 사람의 손에 붙잡힌 모양새가 되었다.
“카일렌, 미아를 데리고 가라.”
“예?”
“황태후 전하와는 내가 대화를 나눌 테니, 어서.”
카일렌은 머뭇거렸다.
이렇게 기가 센 여자들의 사이에 입을 떼 한마디 하는 것조차 어려운데.
미아를 데려가라고? 베아트리체의 앞에서?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올리비아는 그 순간 벼락처럼 깨달았다.
카일렌이 이 방으로 들어오고 단 한순간도 자신을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을.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필지언정 올리비아에게는 한 끗의 관심조차 없었다.
그 사실을 안 올리비아는 화가 나 참을 수 없었다.
“베아트리체 전하! 그 아이는 이안 경의 아이예요.”
“뭐?”
“미아 양은 이안 경의 아이를 가졌음이 분명하다고요! 카일렌 전하가 임신 사실을 숨긴 것도 그 탓이고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베아트리체의 눈이 반짝였다.
처음으로 그녀의 며느리가 도리를 다 하고 있었다.
카일렌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미아의 뱃속에 든 아이는 내 아이입니다!”
“미아, 네 입으로 말해. 이 아이는 누구의 아이지?”
메릴린은 더 들어줄 수 없다는 듯 미아를 향해 물었다.
베아트리체의 기대에 찬 시선 역시 미아를 향했다.
미아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몇 번을 반복하다 끝내 내지르듯 말했다.
“이 아이는 제 아이예요!”
“……?”
“제가 낳을 거고, 제가 키울 겁니다. 그럼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왜 상관이 없니!”
“왜 상관이 없어!”
베아트리체와 메릴린이 약속이나 한 듯 크게 외쳤다.
미아는 더 이상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두 사람의 손을 내팽개쳤다.
이대로 있다가는 숨이 막혀서, 심장이 터져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 나가야 했다.
그 생각이 든 순간, 그녀는 걸음을 옮겨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로 달려나가 계단을 뛰어내렸다.
중간에 발을 헛디뎠지만, 멈출 수 없었다.
찬 바람이 양뺨을 스쳐 지나갔으나, 이안을 찾을 때 그녀의 뺨을 할퀴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궁 밖으로 나와 정원을 한참 달려 가로지르던 미아는 정원의 구석진 곳에 이르러서야 마음껏 헛구역질을 할 수 있었다.
황달이꽃 차의 냄새를 맡은 탓인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연거푸 일어난 탓인지 속이 좋지 않았다.
먹은 것이 별로 없어 쓴 물만 뱉어내던 그녀가 몸을 바닥에 눕혔다.
거칠게 심호흡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헛구역질을 하느라 눈에 맺힌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미안해…….”
미아는 배 위에 손을 올려 쓸어내렸다.
배 속에 든 아기가 놀랐을 거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 미아의 눈에 시퍼런 하늘이 들어왔다.
“너에게 물어볼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네가 누구의 아이로 자라고 싶은지, 네가 어떻게 자라고 싶은지.”
아이의 생부인 카일렌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 옳은 일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황제와 황후는 그들의 손주를 사랑으로 돌볼 것임을 미아는 알았다.
하지만, 카일렌의 곁에 남을 수 없었다.
‘그래, 너를 낳아서. 네가 선택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돌볼게.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는 떠나자, 아가야.’
미아가 눕혀있던 몸을 일으켰다.
멀리서 저를 찾는 소리가 들릴 때 미아는 정원의 담을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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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어머니를 움직이게 했구나?”
“어머니가 움직이신 게 내 덕이라는 얘기를 하는 건가?”
“늦게 붙은 불이 무서운 줄 모르고 탄다더니 형이 꼭 그 꼴이네. 대체 미아 양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전 형수님처럼 아름답기를 해, 무희들처럼 가녀리기를 해.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건데?”
“…….”
이안은 설명할 생각이 없다는 듯, 윌리엄을 가만히 응시했다.
윌리엄은 이안을 마주 보며 생각했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치게 생겼다.
어떻게 얻어낸 황제의 자리인데, 어떻게 얻어낸 권력인데.
겨우 베아트리체의 손아귀를 벗어나, 자신의 세력을 얻을 기회를 찾았다.
황후 문제로 대립각을 세운 덕택인지 귀족 중 몇이 그가 황태후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라며 기대를 내비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폐위된 폭군마저 관용하고 수용하는 너그러운 황제.
진정한 사랑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정략결혼을 하지 않고 운명을 기다리는 낭만적인 황제.그것이 윌리엄이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이미지였다.
이안의 등장 하나로 망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 여자는 그렇다고 쳐. 생전 관심 없던 여자에게 관심을 가졌으니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애는 뭐야.”
“뭐?”
“아이에게까지 관심 갖는 이유가 뭐냐고? 원래 아이 갖는 것을 끔찍이 기피하던 것 아니었어? 어지간하면 한 번쯤 눈 딱 감고 형수님과 아이를 가질 수도 있었지. 그치만 형은 그러지 않았어.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 두렵고 싫었던 거지. 내 말이 틀려?”
“…….”
“그건 형의 아이도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