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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아이는 누구의 (60/95)

60화. 아이는 누구의



 

미아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거렸다.

메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메릴린도 알고 있을 터였다.

일전에 미아가 메릴린을 위해 몇 번이나 이 차를 우렸는지를.

그런 미아가 갑자기 이 차를 거부라도 한다면…….

‘아아, 이안. 어쩌면 좋아요.’

미아는 속으로 이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럴 때마다 그가 생각나는 것은 야속한 일이었다.

그를 이제 찾을 수도 없는데,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일인 줄,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잘 아는데.

달브에 온 후로 그녀는 자주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아이가에 남았다면, 이기적인 마음으로라도 이안의 곁에 남기로 했다면.

다른 누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안에게 기꺼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달라 부탁했다면.

그랬다면, 지금 행복했을까?

“미아 양?”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미아가 생각에서 깨어났다.

이안은 여기 없었고, 여기는 아이가가 아닌 달브의 황궁이었다.

“……저어.”

미아는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심장이 불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 있을까?

임신을 했다고, 카일렌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이렇게 두려울 수 있을까?

그 고백을 한다면 미아는 아마 두 번 다시는 아이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안을 떠나올 때만 해도 당장 아이가와 그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뒤늦은 실감이 몰려왔다.

‘단단히 이안에게 마음을 빼앗겼군.’

올리비아로서는 이런 미아의 모습이 반갑기만 했다.

모든 패를 건 마지막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카일렌의 아이라고 미아가 먼저 고백해버린다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빛이, 말투와 행동이 감추어지던가?

올리비아는 이안과 함께 있는 미아를 보고 확신했었다.

미아 비잘린은 이안 다르뷔를 사랑한다.

이안 다르뷔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가를 떠나오는 것조차 피하려고 했다.

어쩌면 이건 올리비아의 적선이었다.

미아에게 아이가로 돌아갈 구실을 만들어줄.

그리고 사랑받는, 깨끗하고 순결하고 우아한 황태자비로서의 미아를 짓밟아줄.

“어머, 맞다. 내 정신 좀 봐.”

침묵이 길어지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메릴린을 향해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자아, 어리석고 순진한 황태자비여.

내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의 품으로 다시 처박아줄게.

“미아 양은 이 차를 못 마시죠?”

“미아가 이 차를 못 마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미아는 나와 이 차를 자주 즐겼다. 그쯤을 네가 모르고 준비한 건 아닐 텐데.”

메릴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아와 올리비아를 번갈아 보았다.

분명 올리비아가 무슨 수를 써 미아를 곤란하게 만든 것인데 그 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필이면 왜 황달이꽃 차일까.

‘설마?’

메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제 정말 숨길 수 없다.

메릴린이 눈치채기 전에 직접 말해야만 했다.

“저,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이?”

“네.”

메릴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보기엔 평소 카일렌 밖에 모르던 미아가 너무 냉정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아이를 가진 채로 카일렌에게 버림받은 미아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무리 메릴린이 카일렌의 어미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용납하기 어려울 뿐이랴, 천인공노할 노릇이었다.

메릴린은 곧장 손을 뻗어 미아를 끌어안았다.

메릴린이 감격에 찬 얼굴이 되자,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둘 사이가 가까워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안 경의 아이를 가지신 것을, 제가 잊었네요. 죄송해요. 그것도 모르고 차를 권하다니…… 저의 뺨을 내리치셔도 좋아요. 저는 할 말 없어요.”

‘이안?’

예상치 못한 이의 이름이 올리비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미아는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이 수까지, 내다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올리비아와 카일렌은 이 아이가 이안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올리비아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알리려고 할 것이라는 사실도.

“이안이라니? 그자라면, 바트르 황국의 폐위된 폭군이 아니더냐? 달브를 침략하고 카일렌을 …….”

죽였단 혐의를 받았던.

메릴린의 몸이 굳는 것이 미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아는 고통스러웠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었다.

순리대로 고백해야만 했다, 이 아이가 카일렌의 아이라고.

“올리비아,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탐욕에 눈이 멀어 순결한 미아를 우롱해?”

“아닙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는 제 전남편 이안 경의 아이가 맞습니다. 이안 경이 몇 번이고 카일렌 전하와 저에게 말했어요. 미아 양, 맞죠? 어서 대답해줘요.”

올리비아는 미아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그늘이 진 미아의 얼굴 위로 절망이 피어올랐다.

‘자, 어서 고백해. 고백하고 이제 그만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차고 시린,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그 땅으로.’

올리비아가 속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미아?”

메릴린이 미아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이토록 무거운 중력을 느낀 적이 있을까?

미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난 당최 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이안 경이 너에게 집착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순결을 내어줬을 리 없잖니? 게다가 너는 카일렌과 부부로서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잠자리도 가졌고. 내 말이 틀려?”

“……맞습니다.”

“거봐. 감히 달브 황국의 신성한 황태자비를 모욕하고 모함하다니. 이 죄를…….”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릴린은 한창 내지르려던 호통의 호흡이 깨지자 신경질적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시중 하나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바, 바트르 황국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바트르 황국에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만히 빼앗기고 참을 이안이 아니지.

이안이라면, 그라면 분명 무슨 수를 써서든 미아를 되찾으려 움직일 것이다.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이제 이안의 말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미아를 돌려달라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미아를 돌려달라는!

“바트르 황국에서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 뵙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뭐? 갑자기 왜.”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싶으시답니다.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그리고 향후 우호국과 동맹국으로서 화친하기를 청한다고 합니다.”

메릴린은 한창 중요한 얘기 중이었다가 산통을 깬 시중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고작 국제 정세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그게 이렇게 뛰어와 전할 일이냐?”

“그게 말이죠……. 이 소식을 전하러 온 자가…….”

“누군데.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불같은 메릴린의 성격이 확 타올랐다.

시중은 미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바, 바트르 황국의 황태후입니다.”

“황태후라면, 그…… 악명 높은 베아트리체?”

“맞습니다.”

“허, 참. 그 여자가 직접 찾아왔단 말이야?”

“네. 그리고 오시자마자, 미아 황태자비 전하를 찾으셨습니다.”

메릴린의 시선이 미아를 향했다.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이었지만, 올리비아의 낭설에 힘을 실어주기에 충분했다.

❀ ❀ ❀

베아트리체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그녀가 왜 직접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사람을 보내지 않고?

황당하다는 듯 메릴린이 입을 쩍 벌릴 때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정무 회의에 참석 중이었어야 할 카일렌이었다.

“카일렌!”

카일렌은 자신을 부르는 메릴린을 뒤로 한 채 곧장 미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미아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습니까, 미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지금 나갑시다.”

“네? 어디로…….”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분명 그대를 찾으러 온 걸 겁니다. 나는 미아를 내어줄 수 없습니다.”

“카일렌,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메릴린은 이 정신 사나운 상황을 이해해야겠다는 듯 카일렌을 붙잡고 물었다.

카일렌의 상기된 얼굴과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 보통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베아트리체가 오다니? 이안의 엄마가?

“너, 알고 있었니?”

“무엇을요.”

“미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말이다!”

“…….”

미아는 차라리 그냥 정신을 잃고 싶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모든 일이 그저 악몽이라 믿는 것뿐이니까.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카일렌의 반응에 베아트리체는 더욱 미심쩍어졌다.

“알았어?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우리에게 숨긴 거야? 대체 왜? 네가 누구인지 잊은 거야? 너는 달브 황국의 황태자다. 황제 폐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이란 말이다. 네 자식이라면 그것이 황자든, 황녀든 대를 이을 황손임을 잊은 것이냐?”

“그게 아닙니다, 어머니.”

“그게 아니면.”

미아는 메릴린의 생각이 어디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지 알 수 있었다.

카일렌은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 줄 모른다.

아이를 책임지겠단 다짐은 이안과 동일했지만, 이안과 달리 아무런 호소력도 지니지 못했다.

그건 자신이 이미 카일렌에 대한 신뢰를 모조리 잃었기 때문이겠지.

아니, 아니야.

미아는 다시 생각했다.

이건 신뢰의 문제가 아니었다.

카일렌이 한 차례 배신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절절히 자신에게 매달리는 마음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떠나놓고 보니 아깝고 아쉬울 수 있을 것이다.

원하지 않았다.

카일렌이 자신을 원하는 것을, 아이를 책임져주는 것을, 속박하는 것을.

미아는 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원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오로지 이안을 원했다.

이안만을 원했고, 그의 속박만을 원했다.

“설마, 설마…….”

메릴린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고 불경스러워 물음을 완성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메릴린의 상상이 어디까지 뻗어 나갔는지 알 수 있었다.

하늘이 도왔다.

역시 신은 그녀의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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