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뺨을 석대라.”
“생각만 해도 내 뺨이 아리다.”
그래서였나, 베아트리체가 갑작스럽게 이안을 보러온 것은.
윌리엄을 통해 죽으란 말을 전할 때는 언제고, 당최 베아트리체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이안이 딱히 그녀의 마음을 면밀하게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베아트리체가 이안에게 우호적일지 아닐지 정도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가 여전히 나쁜가.”
“응. 그런 것처럼 보여. 공식적인 자리에선 다정하게 지내지만. 알잖아, 윌리엄 폐하가 그런 건 잘하시는 거. 누구와 달리 살갑지.”
“…….”
정보를 주러 왔으니 쫓아내지도 못하고.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신시아를 바라보았다.
신시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간절한가 보구나? 이런 말을 참는 것을 보니.”
“이제 본론을 말해. 내 얄팍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으니.”
“귀족들이 술렁이고 있어, 너의 환궁에.”
그 정도는 이안도 예상했다.
그는 평범한 황족이 아니라, 폐위된 폭군이었다.
“그걸 고작 정보랍시고 들고 와서 입 놀리는 건 아니겠지?”
“그들은 네가 베아트리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돌아왔다고 생각해.”
복수하기 위해 돌아왔다, 라.
이안은 흥미롭다는 듯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이안을 황제의 자리에 올린 것이 베아트리체였으나, 떨어뜨린 것 역시 베아트리체였다.
그러니 그의 귀환이 베아트리체를 향한 복수나 분노일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알잖아. 황태후 전하께는 적이 많다는 것.”
“윌리엄이 어머니에게 대립각을 세우는 것 또한, 그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윌리엄은 너와 달라. 귀족은 전혀 윌리엄을 신뢰하지 못해.”
어리숙한 황제 대신 폐위된 폭군이라도 믿을 셈인가.
그저 황태후를 증오한다는 이유만으로?
베아트리체는 황후 자리에 오를 때부터 사방이 적이었다.
어린 여자가 권력을 잡고 뒤흔드는 것을 보고 좋아할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그들의 원망과 분노는 오래 이어져온 것이니 차라리 이안에게 기대를 거는 것일지도 몰랐다.
“거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너는 반역자가 된다.”
이안은 신시아의 말을 멈추었다.
신시아도 더 나갈 생각은 없었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몸을 뒤로 물렀다.
이안은 시시한 권력 다툼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미아를 되찾는 것뿐이다.
미아만 찾을 수 있다면 황제가 누구든, 누가 권력을 쥐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물을게.”
“…….”
“네가 궁에 온 이유, 설마 여자 때문이야?”
신시아는 기나긴 이야기 끝에 드디어 본론을 말했다.
이안이 신시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미아가 떠난 이후로 유독 자주 갈증을 느끼는 이안은 식어빠진 찻잔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평소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찻잔을 들어 몇 모금 삼킨 이안이 입을 열었다.
“맞다면.”
“그렇다면 달브 황국의 황태자비를 데리고 있다는 소문도 사실이었구나.”
“소문이 빠르군.”
“황태자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그 아내가 아이가에 있대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신시아가 눈을 흘기듯 가늘게 뜨며 이안을 보았다.
이안은 그런 신시아의 말을 가볍게 넘겨버렸다.
“알아야 하나?”
“이 차갑고 냉정한, 여자라면 치를 떨었던 너를 홀린 대단하신 여자분은 어딨길래 이 성에 너 혼자 왔어.”
“……달브.”
“뭐?”
신시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이안을 봤다.
잘못 들은 줄 알았으나, 그의 반응을 보면 아니었다.
이안은 아무런 말이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안녕, 내 사랑.’
그 편지만 떠올리면 이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놓고, 어떻게 떠날 수가 있나.
어떻게 그 조금을 기다려주지 않고, 그 한 끗을 믿어주지 않고.
사랑한다는 이안을 두고 떠날 수가 있나.
그렇게 되풀이해 말했는데, 그녀는 그의 것이라고.
“그럼 다시 돌아간 거야? 너를 두고? 잠깐, 카일렌 황태자는 네 전 부인인 올리비아랑……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네.”
신시아는 황당했다.
생전 여자에 관심이라곤 없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스캔들을 몰고 오다니.
이쯤 되니 이안의 마음을 가져간 그 황태자비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어졌다.
대체 그녀의 어떤 점이 이안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설마 그 여자를 되찾기 위해서 여길 온 거야?”
“너는 외교 전담이니, 달브 황국에서 들은 소식이 있겠지?”
“나? 아니. 달브는 요새 잠잠했는데. 며칠 전만 해도 적국이었던 나라야, 이안. 그런 소소한 정보까지는 들어오지 않아.”
소소하다는 말에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신시아는 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어봤자 자신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들어오는 소식 있으면 전해줄게.”
“그래.”
“그리고 잘 생각해봐. 귀족들이 지금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어쨌든 윌리엄이 신뢰받지 못한 황제라는 것을 뜻해. 네가 황제였을 땐 모두가 너를 두려워하고 미워했어도, 어쨌든 믿긴 믿었어. 황제로서의 너를.”
신시아는 중요한 말을 별거 아닌 말처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안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신시아가 방을 빠져나갔다.
이안은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와 펜을 바라보았다.
달브로 서신을 보낼 수 있다면, 미아에게 말을 전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전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
그러나 역시 사람을 움직이는 건 말이 아닌 행동이다.
미아를 되찾기 위해서 그가 할 일은 편지 따위를 쓰는 일이 아니었다.
종이가 그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 ❀ ❀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미아는 고개를 숙였다.
카일렌이 정무 회의를 참석하러 간 사이, 메릴린은 미아를 불렀다.
미아가 인사를 올리자, 메릴린은 인사를 받아주고는 곧장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미아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어젯밤은 어땠니?”
“네?”
“아주 즐거웠지? 우리 카일렌이 생긴 곳도 바로 그 방이란다.”
“아…….”
눈을 반짝이며 잔뜩 기대한 기색을 내비치는 메릴린을 실망시키는 일은, 미아에게 있어서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미아는 메릴린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아가 부끄러워하는 것이라 생각한 메릴린이 그녀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우리 카일렌이 숫기가 없어서 그렇지, 막상 하면 또 잘해. 저번에도 너를 구하러 가야 한다며, 얼마나 박력 있게 말했는데.”
“……전하가요?”
“그럼. 미아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얼마나 간절하게 읍소를 했는지 몰라.”
메릴린은 이번엔 미아의 등을 어루만졌다.
할 수만 있다며 그동안 미아가 했던 고생을 전부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미아는 카일렌의 전사 소식을 듣고도 의연하게, 자신이 직접 시신을 수습해오겠노라고 자청했었다.
그런 사람이 흔치 않다는 건, 누구보다 메릴린이 잘 알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지킬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킨다고?’
미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문이 열렸다.
올리비아였다.
올리비아는 예를 갖춰 두 사람에게 인사를 올렸다.
메릴린은 그런 올리비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돌렸고, 미아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말을 잃었다.
올리비아의 뒤로 보석이 박힌 영롱한 붉은 드레스와 꽃잎의 모양을 한 레이스가 수놓아진 노란 드레스가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공을 들인, 궁 안에서 제일 솜씨 좋은 재단사가 만든 드레스였다.
가장 귀한 옷감을 썼고, 가장 화려한 장신구를 달았다.
“두 분에게 어울릴만한 드레스를 직접 만들어 보았어요.”
“직접이요?”
미아는 당황했다.
어려서부터 사교 파티나 예식에 참여할 일이 많았던 그녀는 적지 않은 드레스를 입어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건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다.
“미아 님과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드레스 아닌가요?”
올리비아가 사근하게 웃으며 미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중을 시켜 미아에게 옷을 대보았다.
미아는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정숙한 옷, 우아한 옷, 가끔 대범한 시도를 해도 가슴 부분에 큰 장미꽃 모양 코르사주를 다는 등의 귀여운 옷을 입었던 미아는 거기 없었다.
“……나쁘지 않구나.”
오죽하면 콧대 높은 메릴린마저 이런 말을 할까.
미아는 환하게 웃는 올리비아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았다.
정성은 고맙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황후 폐하도 한 번 대보시겠어요?”
황후의 몫의 붉은 드레스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황후에게 잘 어울렸다.
황실의 사람만이 입을 수 있는 붉은색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이었다.
메릴린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 거울을 통해 미아를 응시했다.
미아는 어쩐지 불안스러운 마음이 들어 표정이 굳었다.
“됐으니, 이제 그만 치우지.”
“마음에 안 드세요?”
올리비아가 곧장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메릴린에게 물었다.
메릴린은 거울 속 비친 그녀의 모습에 혹했던 것도 사실이라,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썩 든다.”
“다행이에요, 정말. 어울리시는 장식과 디자인을 생각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는지 몰라요. 깜짝 선물로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러니까 나를 찾아오기 전부터 계획해왔다는 것이지.’
메릴린은 올리비아의 가증스러움을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드레스에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것도 자신의 것이었지만, 미아의 드레스가 정말 걸작이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미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드레스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옷은 이쪽에 두고, 차를 가져오너라.”
올리비아는 시중에게 그렇게 일렀다.
그리고 미아의 손을 찾아 쥐었다.
미아가 몸을 굳히며 손을 빼려고 할 때 올리비아는 웃는 낯을 한 채로 미아를 끌어 메릴린에게 다가갔다.
“황달이꽃 차 괜찮으시죠? 이번에 아주 향이 좋은 것이 들어왔더라고요. 요새 미아 님이 잠을 못 주무셔서인지 얼굴이 조금 푸석해 보이셔서 마시면 좋으실 것 같아요.”
“내 눈엔 예쁘기만 하다.”
메릴린은 미아를 달래듯 말했으나, 올리비아의 제안이 나쁘지 않은지 자리를 찾아 앉았다.
무심코 올리비아의 손길을 따라 앉은 미아는 시중들이 내어오는 다과를 보았다.
미아가 예전에 직접 만들었던 것과 제법 비슷한 파이도 그중에 있었다.
시중 중 하나가 미아를 보고 웃어 보였다.
예전에 함께 만들었던 것을 기억하는 듯했다.
미아도 잠시 따라 웃었으나, 곧 그 표정은 사라졌다.
“피부에는 그렇게 좋으면서, 임산부에게는 위험한 차라니. 임산부는 여인도 아닌가. 정말 정 없는 차예요, 그렇지 않나요?”
미아는 그제야 올리비아가 자신을 이 자리에 초대한 이유를, 그리고 내내 자신에게 살갑게 굴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달맞이꽃 차, 미아는 이 차를 마실 수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올리비아가 가장 잘 알 터였다.
“미아? 왜 그러니.”
메릴린이 미아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