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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두 여자의 기싸움 (58/95)

58화. 두 여자의 기싸움



 

“뭐?”

“저는 카일렌 전하의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상관없어요.”

메릴린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단순히 메릴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지금 황후의 자리를 포기하는 척하다, 나중에 미아를 해할 마음이라도 가진 것인가?

“미아 황태자비 전하와도 잘 지내보겠습니다. 이곳에 와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미아 님을 사랑하고 아끼는지를 알았어요. 저도 미아 님을 만나고 겪으면서 좋은 분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카일렌 전하의 마음이 미아 님을 향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요.”

생각이라도 읽고 있는 건가.

올리비아는 귀신같이 먼저 미아의 얘기를 꺼냈다.

‘그래. 이 정도 결심도 하지 않고 나를 찾아오는 건 의미가 없다 생각했겠지.’

메릴린은 어느새 올리비아에게 동요되어 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시중을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 올리비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하나만 묻겠다.”

“네, 무엇이든 물어주세요.”

“왜 이안 다르뷔를 떠났지?”

끝내 이 질문이 오고야 말았다.

카일렌이나 미아에 대한 충성심, 달브 황국에 대한 마음가짐 등을 묻는다면 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어떻게 답을 해도 덫이 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카일렌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하면 언제 다시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고 추궁할 테고.

폐위된 이안의 곁에 머물 수 없었다고 한다면 자기 안위 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여자라 손가락질할 터였다.

“그건…….”

“나는 어제 카일렌과 미아에게 나와 황제 폐하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

“미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후로 만들겠다고. 설령 카일렌이 황제가 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미 두 분은 혼인하신……!”

“알고 있구나.”

아아.

올리비아는 제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바보처럼 그녀 스스로 실토했다.

“카일렌이 이미 혼인했다는 것을, 미아라는 비(妃)가 있다는 것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 제 남편마저 버리고 이곳으로 왔으니.”

“……황후 폐하. 저는.”

“황태자는 너를 잃은 아픔 정도는 금방 잊을 것이다. 너도 알겠지. 카일렌이 미아를 되찾기 위해 한 일들을.”

“그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아니.”

“…….”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 미아를 찾도록 간청한 것은 카일렌이다. 너는 네가 카일렌의 마음을 전부 가졌다고 생각했겠지. 여행지는 아무리 바뀌어도 집은 변하지 않는 법이지.”

“…….”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메릴린을 그녀가 너무 얕봤다,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덤빈 것도 아니면서.

“미아는 집이다. 그리고 카일렌의 여행은 끝이 난 듯싶구나.”

올리비아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녀의 방패막이는 어디까지나 카일렌의 마음이었다.

그런 카일렌의 마음이 흔들렸다면, 그리고 변했다면.

올리비아는 미아를 바닥까지 끌어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뭐지? 네가 떠나겠다 약조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내 마지막 아량이다.”

“저와 미아 황태자비 전하, 그리고 황후 폐하. 이 세 사람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또, 또. 마지막까지 수작질이군.’

메릴린이 미간을 좁혔다.

“저는 여자 형제가 없이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도 느껴본 적이 없고요. 황태후 폐하셨던 베아트리체 님 역시, 저와 시간을 보내주신 적이 없습니다. 제가 갖고 싶었던 미래는 어쩌면 카일렌 전하의 미래뿐 아니라 황후 폐하와 미아 황태자비 전하와의 미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게 한 번이라도 그걸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메릴린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올리비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메릴린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힐 때 ‘쿠키는 버려’라고 가벼이 말하는 메릴린의 소리가 문밖으로 샜다.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휘어올라갔다.

❀ ❀ ❀

미아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카일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카일렌의 잠든 얼굴을 보다 지난 밤의 일을 떠올렸다.

‘당신은 내 것입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렇고, 지금도 그런 것에는 변함이 없어.’

카일렌은 그렇게 말하며 연거푸 그녀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그녀는 저항하려 고개를 틀었으나, 벗어날 수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입맞춤이었다.

몇 번이나 그가 먼저 해주기를 바랐던 바로 그, 입맞춤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와 정말로 할 수 있을 때가 되니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른척하듯 손을 들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본능처럼 더운 숨이 입술 새로 자꾸만 흘러나왔다.

미아의 떨리는 허벅지를 쥔 카일렌이 허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지고 카일렌이 미아와 이마를 맞댄 채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아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있던 무언가 소중한 것이 깨지는 느낌을 받았다.

카일렌은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거두어 주었다.

“……깨었습니까?”

살며시 눈을 뜬 카일렌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 강해질 겁니다. 더 강해져서, 아이가에 머무는 그 남자를 쓸어버리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힘을 가질 겁니다. 그러면 당신이 다시 나를 봐줄까?’

카일렌은 그렇게 물으며 그녀의 원피스 단추 두어 개를 풀었다.

가슴에 서늘한 손이 닿을 때, 미아는 카일렌의 손목을 쥐었다.

이건 아니었다.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떨구는 미아의 모습에 그제야 카일렌은 그의 잘못을 깨달은 듯 뒤로 물렀다.

“피곤한 얼굴이네요, 미아.”

“…….”

“조금 더 잘까요?”

미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카일렌은 그런 미아를 보고 살며시 웃더니 손을 뻗어 미아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었다.

한 번도 그에게 받아본 적이 없는 손길이었다.

“오늘은 당신이 좋아하는 성안의 정원에 가, 차를 즐깁시다. 나는 오후에 정무 회의만 참석하면 되니.”

“……네.”

미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렌이 고개를 숙여 미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부터는 남편으로서 도리를 다 하겠습니다.”

아내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도리를.

❀ ❀ ❀

“이안 다르뷔!”

신시아는 바트르 황국에서 두 번째로 힘 있는 가문의 영애로, 이안이 궁 안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 비슷한 것이었다.

겨룰 사람이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시아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다.

예의범절을 잘 아는 것은 물론이고 뛰어난 검술 실력과 빠지지 않는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췄다.

심지어 사교 댄스까지 잘 추는 그녀는 단연 황국에서 제일 가는 신붓감이다.

그 신붓감은 지금까지 혼처를 모두 거절했는데 세간엔 그 이유가 바로,

“여긴 어쩐 일이지.”

이 쌀쌀맞은 비운의 폭군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신시아가 한때 이안에게 마음이 빼앗겼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쩐 일이긴요. 황궁에 왔는데 저를 보실 생각이 없으셨나요? 그게 더 서운한데요, 폐하. 아니…… 이제는 편히 이안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마음대로 해.”

“너 성격 많이 죽었다.”

신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안이 권하지도 않은 이안의 맞은편 자리의 의자를 빼어 자리에 앉았다.

이안은 마지못해 한숨을 푹 쉬고 찻잔을 신시아 앞에 내려두었다.

“용케 자리를 지켰군.”

“그러게. 너 황위에서 내려올 때 나도 같이 목 잘릴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황태후 전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더라?”

신시아에게 요직을 준 것은 이안이었다.

신시아는 바트르 황국과 인접한 나라들을 두루 살피며 철마다 잊지 않고 긴밀히 소통하는 역을 맡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해, 달브 황국가 전쟁이 난 그 해에 신시아는 크게 아팠다.

이제 와, 생각하면 누구의 탓인지가 빤했다.

“그때 일은…….”

“너 설마 사과하려는 거 아니지?”

신시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안은 덕분에 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 수 있었다.

바란다면 사과라도 해야지 별수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야?”

“뭐?”

“평소에 너라면 ‘네 목숨은 네 것이니, 누가 노리든 지키는 것은 너의 몫이다’ 라고 하고도 남았을 거 아니야. 황태후 전하가 내 목숨을 노리시든 말든.”

“안 죽었으니 됐잖아.”

“죽었으면 내 시체에 대고 인사하게?”

“…….”

피곤하다는 듯 이안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신시아는 그런 이안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얹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듯 들여다보았다.

“그만 보지.”

“진짜 누가 널 변화시키긴 했구나?”

변화?

그래.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안은 변했다.

예전에 이안이었다면 절대로 황궁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이곳을 떠났을 때의 마음을 떠올리면 죽어도.

“그렇게 원하던 자유를 손에 쥔 소감은 어땠어?”

“본론으로 들어가.”

“하여간, 재미없는 건 똑같네. 네가 없는 사이, 뜻하지 않은 마찰이 있었어. 황태후 전하께서 고르신 신붓감을 모두 윌리엄 폐하가 마다한 거야.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지. 예부터 네가 좀 삐딱한 아들이었고, 윌리엄 폐하는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잖아?”

이안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말을 어기고 싶은 적은 있었어도, 말을 어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하는 것은 귀찮았다.

내버려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대로.

“그래서 폐하에게 숨겨둔 여자라도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그 숨겨둔 여자가 누구였는 줄 알아?”

“본론.”

“레이디 데드.”

찻잔을 들던 이안의 손이 멈추었다.

신시아는 그 반응을 예상한 듯 몸을 낮추며 의자에 앉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얘기였다.

“둘이 내통한다는 걸 내가 알아냈어. 우연히 전보를 들고 나가는 아이를 보게 된 거야. 물론 캐묻진 못했지만, 아이의 전보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내기엔 충분했지. 그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든 분명 그 속엔…….”

이안과 베아트리체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레이디 데드는 선황제의 어머니로, 따지자면 이안의 할머니였다.

총기를 잃었다는 이유로 베아트리체는 선황제가 죽기도 전에 먼 곳으로 휴양을 보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을 레이디 데드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굳이 그녀와 윌리엄이 내통한다는 것은 더 놀라웠다.

둘이 나눌 얘기가 있단 말인가?

있다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튼, 그 사실을 안 황태후 전하가 무척 화가 나셨잖아. 폐하의 뺨을 한 대도 모자라서 세 대나 때리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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