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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그 남자의 후회 (57/95)

57화. 그 남자의 후회



 

둘 다였다.

처음엔 그가 자신을 버려서 원망스러웠고, 나중엔 뒤늦게라도 되찾아가던 행복을 앗아가 원망스러웠다.

아마 이 모든 것이 황제와 황후의 뜻이라면, 식사를 치우고 나서도 두 사람은 이 방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황궁의 모두가 알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아직 견고하고 앞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공표.

그러니 시중들이 그들의 합방을 반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두려워요.”

“무엇이 말입니까.”

“저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미아는 제 앞에 놓인 물잔을 들었다.

투명하게 일렁이는 물그림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설마 또 아이가에 가겠다는 소리를 하려는 거라면…….”

미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단순히 아이가에 보내 달라 무작정 조르고자 입을 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일렌 전하는 아시나요?”

“뭐?”

“카일렌 전하가 원하시는 삶이 어디 있는지 아시냐는 말이에요.”

“내가 원하는 삶은 미아, 당신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카일렌은 항변하듯 말했다.

물론 그의 말에는 신빙성이 없었다.

미아가 그를 믿지 않을 것임을 그도 알았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는 그녀에게 증명해 나가고 싶었다.

“저와 함께 하는 삶은 이제 없어요.”

“미아,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의 아이도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카일렌은 그 스스로, 그의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미아는 그가 자신이 이안과 쉽게 그리고 이르게 몸을 섞었을 거라 굳건히 믿는 상황이 우습고 믿기지 않았다.

누구나 그처럼 가볍게 변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이 아이가 대체 누구 아이인지 제대로 생각이나 해보았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겨우 짓눌렀다.

이런 식으로 아이의 아버지를 밝힐 수는 없었다.

미아는 카일렌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쯤 이안은 무얼 하고 있을까.’

한편, 그녀의 집중을 자꾸 무너뜨리는 것은 이안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곧장 쫓아오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하며 기대했던 미아로서는, 그에게서 아무런 기별이 오고 있지 않은 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불안했다.

그 편지를 보았을까.

편지를 보고 정말 자신이 떠났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이안에게 미아는 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아는 이안이 자신을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이기적인 마음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저는 카일렌 전하께 그런 부탁을 드리지 않을 거예요.”

“모두 나의 아이라 믿을 겁니다. 그 아이는 아무런 부족함 없이 커서 장차 황녀가 될 것입니다.”

‘황녀? 아들이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건가.’

오히려 아들이면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지.

미아는 저를 보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카일렌을 가만히 응시했다.

“물론, 아들이라면 황태자가 될 수도 있겠지요.”

카일렌은 뒤늦게 자신의 말의 무게를 깨닫고 정정했다.

하지만 미아는 카일렌의 그런 행동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이미 그와 그녀 사이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아이가 딸이길 바라는 것도.

그녀에게 다른 남자의 아이가 자랄 것이라 생각하고, 벌써 선을 긋는 것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전하, 제가 돌아온 것은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음식을 들어보세요.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전하, 저는 이미 이곳을 등졌습니다. 한 번 등진 곳에 다시 오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한지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전하는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전하도 달브를 한 차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니까요.”

미아는 카일렌을 설득하기 위해 목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카일렌은 미아의 눈을 피했다.

“포도주는 아무래도 아이에게 해롭겠죠? 전에 보니 육류에 소홀해졌던데 다른 음식이라도 들이라 이를까요?”

“제가 아이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저를 놓아주시겠습니까?”

미아는 굳은 목소리와 다짐으로 말했다.

카일렌은 그제야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식기류가 부딪히며 작은 마찰음이 났다.

“그럼 어디로 갈 작정입니까? 이안 경과 사랑의 도피라도 할 생각입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카일렌은 당장이라도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미아에게는 자신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아는 카일렌의 편을 들었다.

그 환대와 자애, 포용과 따스함은 전부 어디 가버렸단 말인가?

카일렌은 제 손으로 제가 그 모든 것을 버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황태자의 자리가 무겁다고 생각했어도, 주변의 멸시를 받는 것이 지겨웠어도.

참고 견디면 적어도 그의 것이었던, 단 하나 확실한 그의 소유였던 미아만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스스로 망쳤다고 생각하면, 그는 견딜 수 없이 슬퍼졌다.

“그럼 무엇입니까.”

“혼자 살겠습니다.”

“혼자서요?”

“네. 달브도, 바트르도 아닌 곳을 찾아서 혼자 조용히 살겠습니다.”

“아이를 혼자 키우겠단 말입니까?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

“아아, 미아…….”

카일렌은 낮게 신음했다.

미아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했어,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어. 죽어도 상관없다고, 다 잃어도 상관없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어.’

눈을 감으면 그날 설원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 매서운 바람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던 이안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안은 손을 뻗어 미아의 뺨을 감싸쥔다.

그 감촉은 영원할 것만 같다.

형체가 사라져도, 그 감촉만은 영원히 남을 것만 같다.

와락.

미아는 자신을 끌어안는 손길에 눈을 떴다.

카일렌은 미아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겨 깊숙이 안았다.

놓치기 싫은 마음이 담긴 손끝이 그녀를 바싹 쥐어 당겼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전하.”

“용서해주세요, 미아. 두 번 다시 미아가 그런 생각하지 않도록, 나의 곁에서 행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혼자 떠나겠다는 말은 마세요.”

카일렌의 눈물이 미아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미아는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면 내가 당신을, 당신을…….”

속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일렌은 그 말은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보는 미아의 입술을 집어삼키듯 다급히 찾아 물었다.

❀ ❀ ❀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문을 열어주시지?

시종끼리 문을 열면서도 의혹이 담긴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올리비아는 알 수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의연하게 굴어야 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만남을 간청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던 그녀였다.

돌연 메릴린이 마음을 바꿔 먹었을 리는 없고.

마침 미아가 돌아온 시점에서 올리비아를 만나주는 것을 보니 목적이 뻔했다.

“그래. 너도 참 끈질기구나?”

“……저에게 황후 폐하를 알현할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결국 카일렌은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누구보다 올리비아가 가장 잘 알았다.

그리고 그 배후에 누구의 뜻이 있을지도.

베아트리체와 메릴린은 너무나 다른 아들을 두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같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한다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다른 이의 마음을 조금 해치더라도.

어제, 미아는 원했든 원하지 않든 카일렌과 잠자리를 가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올리비아는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어제 잠은 잘 잤니? 피곤해 보이는구나. 잠자리가 불편했니?”

진정으로 염려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올리비아는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잠자리는 좋았습니다.”

“그래?”

“다만, 어제 조금 헛헛한 마음이 들어서요.”

“나고 자란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이해한단다. 그래서…….”

“아뇨. 제가 헛헛했던 건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

메릴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올리비아가 보통의 여자가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제의 일을 대놓고 입에 올리다니.

“카일렌 전하께서 어제 바쁜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에요. 평소엔 절대 저를 혼자 두지 않으셨는데.”

“그래, 확실히 바쁘긴 바빴지. 네가 황태자의 얘기를 꺼냈으니 하는 말이다만, 시중들의 입이 아침부터 바쁘더구나. 두 사람이 머무른 방에서 야릇한 소리가 계속 새어 나왔다고.”

“그런가요?”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경직되었다.

자, 이제 무슨 얘기를 할 거니?

메릴린은 기세등등해져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흐읍……!”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반응은 메릴린이 감히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울음을 터뜨린 올리비아의 소리가 마치 신호라도 된 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엉망이 되든 말든 울고 있는 올리비아의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황후가 문을 열라 손짓하자, 시중이 문을 열었다.

제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은쟁반을 높이 치켜들고 걸어들어왔다.

“무엇이냐?”

“오, 올리비아 님께서 황후 폐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쿠키입니다.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아몬드 가루를 잔뜩 넣었습니다.”

“쿠키?”

메릴린이 목소리를 높여 묻자, 올리비아의 울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정말 서럽게 우는 올리비아를 본 제인은 고통스러운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메릴린에게 든 생각은 그 생각이 유일했다.

시중 앞에서 체통이 있어 올리비아를 더 다그치지는 못했지만, 미아를 따라잡겠답시고 쿠키를 구운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얄팍해 보이는지.

“……두고 나가라.”

메릴린은 마지못해 말했다.

제인은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온 시중에게 쿠키가 든 쟁반을 건넨 뒤 황급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메릴린은 올리비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울음이 잦아드는 것 같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끕, 흐읍, 폐하.”

“말해라.”

“제가 그렇게 미우세요?”

“내가 널 곱게 볼 이유가 하나라도 있니?”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저를 선택하신 카일렌 폐하를 믿지 못하시는 건 싫어요.”

잘도 빠져나갈 길을 찾는구나.

메릴린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올리비아를 보았다.

올리비아는 눈물이 고인 눈을 한 채로 메릴린을 마주 보았다.

눈빛만큼으로는 지지 않는 기세였다.

“내가 그렇다고 너를 믿을 것 같니?”

“저는 카일렌 폐하 곁에만 있으면 돼요.”

“웃기지 마. 네가 바라는 건 황후의 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어째서 저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

“폐위된 폭군이라도 남편이라면 남편인 것을. 따르지는 못할망정 바로 버리고 따라왔으니, 내가 너를 어떻게 믿니?”

“그럼 제가…….”

올리비아는 뺨에 어린 눈물을 양손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메릴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제가 황후의 자리를 포기한다고 약조하면 저를 믿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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