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듣는 귀를 조심해
“미아, 괜찮니?”
메릴린은 권하는 차를 받지 않는 미아를 불렀다.
미아는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들고 메릴린을 보았다.
“네, 부르셨어요.”
“차는 입에 맞니?”
“네, 아주 좋아요.”
“다행이다. 여기 쇼트케이크도 먹어보렴. 네가 좋아하는 체리를 올렸어.”
메릴린이 활짝 웃었다.
경직된 자세의 미아를 보니, 미아가 처음 궁에 들어오던 날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는 메릴린의 마음에 차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거기 있는 어떤 여자보다도 더 황태자비의 자리에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벌써, 그렇게 미아는 자랐다.
“저, 황후 폐하.”
“응, 말하렴.”
“저를 위해 이렇게 성대한 만찬을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아는 진심이라는 듯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어 보였다.
메릴린은 으쓱거리는 어깨를 숨기지 않고는 손을 내저었다.
“얘, 이것 가지고 만찬이라니. 아직 시작도 안 했단다.”
“그렇지만, 황후 폐하.”
“응?”
“……저는 기쁜 마음으로 이 자리를 함께할 수 없습니다.”
“…….”
미아가 굳게 다짐한 것처럼 입을 열어 한 말에, 침묵이 흘렀다.
거짓으로 기쁨을 과장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황후와 황제에게 받은 은혜가 크더라도, 그들을 평소에 사랑하고 아끼더라도 달라질 수는 없었다.
미아는 이곳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이안이 있는 아이가를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카일렌은 아이가를 침략했고, 그 덕에 사람들이 다쳤다.
그들이 자신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하면 미아는 마음 한구석이 어쩔 도리 없이 아팠다.
“당연히 그렇겠지. 카일렌이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
메릴린은 매서운 눈길로 카일렌을 바라보았다.
전이라면 그 눈빛을 피했을 카일렌이, 어쩐지 이번엔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것이 카일렌의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피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어떻게 되찾은 미아인데, 미아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제 죄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미아의 마음을 감히 어떻게 안다고 말하느냔 말이야!”
메릴린은 호통을 쳤다.
옆에 앉은 노아는 그런 메릴린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 손을 뻗어 진정시켰으나, 메릴린의 태도는 강경했다.
“미아에게 제대로 사과는 했니? 아니, 그 계집. 올리비아인지, 뭔지 하는 계집은 당장 보내 버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너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무르게 하겠다.”
“예?”
이번에 말을 이어받은 것은 황제였다.
노아의 말에 당황한 것은 카일렌 뿐만은 아니었다.
황태자의 자리에서 무르게 하겠다니.
그건 미아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폐하, 그건.”
“어디서 근본도 없는 애를 데려다가!”
메릴린은 그런 노아의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둘은 이미 사전에 그런 얘기를 나눴던 것처럼 강경하고 흔들림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당황한 것은 미아였다.
“미아,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자리는 보존될 테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카일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아가 몸을 일으켜 메릴린에게 손을 뻗었다.
메릴린이 노아의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가뿐히 일어났다.
그리고 미아에게 다가가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뽑아 건넸다.
“이, 이건…….”
“설마 다른 형제가 황태자가 되더라도, 너의 자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물었습니다.”
카일렌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정말 무엇인지 궁금해 묻는 것이 아니었다.
미아는 할 말을 잃었다.
황제와 황후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한 탓이었다.
“네 형제와 결혼시키겠다는 뜻이다.”
“어머니!”
“미아라고 못하겠니? 너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을 못 하겠냐는 말이야. 오히려 지금 미아가 너를 용인하고 받아주는 것이 더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
메릴린은 도리를 아는 여자였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지만, 이미 미아 역시 메릴린의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 죄를 통감했다.
“미아는 제 아내입니다!”
“그렇다면 올리비아를 내치는 것 역시 네가 할 도리임을 알겠구나.”
“…….”
카일렌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이 말을 듣기 위해 메릴린과 노아는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아이가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더는 카일렌을 사랑하지 않고, 카일렌의 곁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은 미아의 마음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미아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다, 마치 그녀가 다른 마음을 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듯.
그 사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누군가의 표정은 구겨졌다.
하얗게 질린 손끝 사이로 볼품없이 구겨져 버린 드레스 자락처럼.
“여, 여기서 뭐 하세요?”
올리비아는 자신에게 묻는 시중을 노려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자신도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었다.
❀ ❀ ❀
“오, 올리비아 님.”
“너도 나를 우습게 보는 거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너만은, 너만은 나를 따라야지. 내가 네게 준 온갖 값비싸고 귀한 것을 잊었어? 네 동생의 목숨을 누가 구했는지 잊은 거야?”
“아닙니다! 올리비아 님. 우선 진정하시고…….”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화병이 깨졌다.
깨진 화병의 파편이 튀며 제인의 뺨에 생채기가 생겼다.
제인은 제 얼굴을 감싸 쥐며 몸을 떨었다.
올리비아는 그러고도 화가 사라지지 않는 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대체 그 여자가 뭐라고. 그놈의 미아, 미아, 미아!”
“…….”
제인은 올리비아가 오고 나서 카일렌이 올리비아에게 붙여준 시종이었다.
웃으며 해사하게 제인에게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을 제인은 경계했다.
제인이라고 미아가 그립지 않았을까.
마음만 같아서는 실수인 척 카일렌의 옷에 차라도 엎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제가 실수로 떨어뜨린 설탕을 주워주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제인은 올리비아에게 끌렸다.
‘괜찮니? 긴장을 한 모양이구나. 이건 말에게 줄까?’
올리비아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제인은 이때껏 본 적 없었다.
새가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도 그녀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난 이곳에 온전한 혼자야. 아무도 내 편은 없어. 네가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니? 너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줄게.’
어느날 올리비아는 눈물을 떨구며 제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바트르 황국에서 가져온 값비싼 보석을 제인에게 건네주었다.
동생의 약값이 필요했던 제인에게 그것은 아주 유용하고도 귀중한 선물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올리비아가 미아에 관해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은 것은.
나이가 어려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제인은 미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굳이 물어서라도 알아 오라고 할 때 정신 차려야 했을까?
처음으로 올리비아 앞에서 미아를 변호했을 때, 그녀가 자신의 뺨을 내리치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건 두려움에 가까웠다.
“올리비아 님,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아 님의 약점을 알아 올게요.”
하지만, 제인은 올리비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불안하고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올리비아를 거절하는 것은 아무리 같은 여자인 제인이라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동생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이, 이곳에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제인을 무겁게 짓눌렀다.
“약점? 겨우 그런 것 가지고 될 것 같아? 이미 카일렌 전하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둘 사이가 틀어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야. 그런데 고작 약점 하나 잡아서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아?”
“…….”
제인은 올리비아를 돕고 싶었지만, 방법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사이,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미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그걸 그녀의 입으로 말한다면 오히려 무덤을 파는 꼴일 것이다.
지금 카일렌이 하는 꼴을 보면 분명, 그의 아이라고 우길 테니까.
자연스럽게 미아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들키는 모양새가 좋았다.
“제인.”
“네?”
“혹시 황달이꽃을 구할 수 있어?”
“황달이꽃이요? 구할 수 있겠지만, 어디에 쓰시려고.”
“…….”
제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미아가 임신을?
황달이꽃은 고운 살결을 만들어주어 여자들이 자주 차로 달이거나 생화 그대로 먹는 귀한 꽃이었다.
반면, 임산부에게는 아이를 유산할 수 있을 만큼의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꽃이다.
갑자기 올리비아가 그 꽃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제인은 눈치가 빨랐다.
“네, 구해올게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 제인은 올리비아가 발을 다치지 않도록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모아 주운 뒤 방을 빠져나갔다.
카일렌이 없는 이 방이 얼마나 춥고 외로운지, 올리비아는 되새기고 되새겼다.
증오하는 대상을 만들고 짓뭉개는 것은 그녀의 취미이자 특기였다.
❀ ❀ ❀
“…….”
“…….”
카일렌과 미아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시중이 안내한 대로 몸을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은 두 사람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방 안엔 의자 두 개와 테이블, 그리고 호화스러운 고급 소파와 침대가 놓여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가끔 분위기를 내기 위해 쓰는 방이라는 것을 둘 다 알았다.
아름다운 꽃잎의 문양이 하나하나 새겨진 촛대 위 촛불의 불꽃이 일렁였다.
미아의 얼굴에 빛 그림자가 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식사 다 나왔습니다. 두 분만 남겨두라는 명이 있어,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종을 울려주세요.”
미아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가는 시중의 발목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하게 시중은 방을 빠져나갔고 그녀는 카일렌과 단둘이 남겨졌다.
“미아.”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일렌이었다.
미아가 고개를 들어 카일렌을 마주했다.
“내가 원망스럽습니까?”
“…….”
차마 아니라는 부정은 할 수 없었다.
답이 없는 미아를 바라보던 카일렌이 제 앞에 놓인 나이프를 쥐었다.
그리고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잘라 포크로 찍었다.
먹음직스러운 소스와 육즙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본 미아는 묘하게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안이 몇 번이나 보인 모습이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카일렌이 하니 그것이 싫어 보이기만 하고, 입덧이 올라왔다.
“어떤 게 원망스럽습니까?”
“…….”
“당신을 버린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을 데려온 것입니까.”
카일렌의 눈이 불빛 아래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