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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아이를 줘 (55/95)

55화. 아이를 줘



 

“너답지 않게 동요하고 있구나.”

베아트리체가 이안을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이안은 눈만 들어 베아트리체를 노려보았다.

들켰다는 느낌은 그 스스로를 약하게 느끼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곧 약해짐을 의미하다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베아트리체는 간신히 웃음을 억눌렀다.

지금 그의 마음에서 치고 있을 마음의 폭풍이, 이별의 고통이 분명히 그를 전보다 강하게 만들어줄 터였다.

그건 그녀의 계획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병력을 동원하자.”

베아트리체는 윌리엄을 향해 말했다.

윌리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기껏해야 혼자 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날 줄 알았던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여자 하나를 구하는데 나라의 병력을 동원한다?

그것도 적국의 황태자비를 다시 데려오는데에?

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황당한 얘기인가.

“전쟁이 끝난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병력을 동원하자뇨.”

“싸움을 일으키자는 게 아니다. 맨몸으로 보낼 수 없으니, 같이 보내자는 것이야.”

“같이 보내서 무얼 하게요? 거기서 형의 말을 들어줄까요? 형과 카일렌 황태자의 악연이 있는데?”

“카일렌이 살아 돌아왔으니, 그쪽에서도 우리를 책망하지는 못할 거야.”

“그 악연을 누가 만들었는데요, 어머니시잖아요.”

이안은 이제 윌리엄을 바라보고 있었다.

윌리엄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베아트리체의 태도가 갑작스레 돌변한 것이 미심쩍었으나, 그것을 신경쓸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사랑 앞에서 그는 약자였다.

미아를 되찾고 나서 생각하자, 나머지 것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는 다짐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런데 왜 일을 복잡하게…….”

“지금이라도 난 내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거야.”

베아트리체는 단호했다.

윌리엄의 눈빛이 흔들렸다.

진심으로 병력을 동원하라는 건가.

그렇게 보냈다가 이안이 무슨 마음을 품을 줄 알고?

이안이 그 병력을 가지고 떠났다가, 그 병력과 함께 강해져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달브 황국과 손을 잡고 그를 치러 온다면?

상상과 의심의 가지가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이안은 윌리엄의 결론을 재촉하듯 이제는 식어 미지근해진 차를 한입에 들이켰다.

“……저는.”

윌리엄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둘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그의 뜻을 관철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묘수가 떠올랐다.

황제가 아닌 이안은 할 수 없는 방법, 황제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

“제가 가겠습니다, 형과.”

“뭐?”

“물론 호위병들을 동원할 것이지만, 그 이상의 병력은 필요치 않을 겁니다. 전쟁을 바라지 않는 이상, 저들도 감히 황제를 공격할 수는 없겠지요. 아이가에 침입해 황제의 형을 습격한 것을 추궁하고, 미아 양을 돌려줄 것을 간청하겠습니다.”

이안은 윌리엄의 수를 읽었다.

이안의 일에 저 정도로 나서줄 리가 절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나서준다는 건, 대가로 다른 것을 얻어내겠다는 거였다.

베아트리체 역시 윌리엄의 생각을 읽은 듯 말이 없었다.

“대신, 우리가 미아 양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다면 형은 미아 양과 함께 달브를 떠나.”

“…….”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지금도 달브 황국의 끄트머리인 아이가에 지내고 있으니…….

“아이는 나에게 주고.”

그러나, 이어한 말은 이안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무엇을 그에게 주라고?

이안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

“알아. 아이를 주라고 했어.”

미친 거지.

이안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 겨우 삼켰다.

뻔뻔스럽게 말을 잇는 저 얼굴을 뭉개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 아이는 내 아이다.”

“형의 아이니 달라는 거야. 아니, 형의 아이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윌리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마치 대단치 않은 말을 한 것처럼.

이안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차고 있던 검을 빼 들고 윌리엄의 목을 겨눴다.

“어차피 여자만 있으면 되잖아? 형이 언제부터 아이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윌리엄, 입 다물어! 이안, 너도 검을 치워라.”

베아트리체가 외쳤다.

검을 빼 든 이안의 주위로 호위 기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이안과 윌리엄을 에워쌌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 나는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어려운 요구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뭘 어쩔 셈이냐.”

“걱정하지 마. 잘 키울 거야. 어떤 귀족의 아이로 자랄 거고, 모자람 없이 자랄 수 있도록 내가 평생 후원하겠다는 걸 장담하지. 누가 아버지인지도 모르고 자랄 것은 똑같은데 누구에게서 자라든 뭐가 중요해? 우리를 봐.”

“윌리엄!”

베아트리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윌리엄의 뺨을 내리쳤다.

윌리엄의 고개가 돌아가고, 곁을 에워싼 호위 기사들이 낮은 탄성을 내었다.

한 번도 베아트리체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머니! 지금, 대체 무슨 짓을…….”

“너야말로,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여!”

“그렇다고 황제의 뺨을……!”

윌리엄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윌리엄의 눈빛에 원망과 분노, 서글픔과 열등감이 복잡하게 섞여 넘실거렸다.

침묵이 흘렀다.

이안은 이런 순간조차 베아트리체의 행동이 미아를 되찾는 것에 방해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번 잘 생각해봐, 내 제안을.”

한참 만에 입을 연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고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덕분에 이안을 에워싼 호위 기사들은 애매한 위치가 되어버렸다.

지켜야 할 대상이 사라져 버렸으니.

“…….”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만 보는 불편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안이 검을 든 채 그들과 눈을 맞췄다.

눈을 마주친 이들은 눈을 내리깔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

“물러라.”

베아트리체가 마지못해 얘기를 꺼내자 그제야 기사들은 자리를 옮겨 물렀다.

이안은 검을 거뒀다.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들어 이안을 보았다.

“어떻게 할 셈이니?”

“터무니없는 제안을 따를 리 없다는 걸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은 아닐 테지요.”

“네가 잃었던 자리를 되찾는다면, 미아 양을 되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다.”

이안은 베아트리체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에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 ❀ ❀

미아는 긴장된 표정을 한 채 안으로 들어섰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황궁에 들었으니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슨 낯으로 인사를 한단 말인가.

“미아!”

달브 황국의 황후이자, 카일렌의 어머니인 메릴린이 미아에게 달려왔다.

미아의 걱정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메릴린은 미아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순간 뭉클한 감정이 미아의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가 싶더니,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감히 예상하지 못한 울음이었다.

그녀를 응접실로 데리고 온 카일렌은 섧게 울음을 터뜨린 미아를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낯선 땅, 아이가에서 얼마나 달브 황국을 그리워했을지.

그녀를 버리고 간 그를 얼마나 원망했을지.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 울어. 마음껏 울어.”

메릴린은 미아의 등을 토닥였다.

눈물이 없기로 유명한 메릴린도 울컥한 듯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처음엔 아들이 죽었다고 하여,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더니.

아들이 살아 돌아오자, 가장 아끼는 며느리였던 미아가 사라졌다.

그녀 역시 충분히 벅차는 재회였다.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어, 모두 내 탓이다. 미아.”

“아니에, 흐읍, 요. 아니에요, 폐하.”

미아는 울음을 그치려고 입술을 깨물었으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 노아의 표정도 차츰 굳어갔다.

노아의 매서운 눈길이 카일렌을 향했다.

카일렌은 변명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마음 한편으로 안도감이 든다면, 그가 너무 나쁜 사람인 것일까?

메릴린과 함께 있는 미아를 보자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집에 돌아온 느낌을 느꼈다.

달브로 돌아오고 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줄곧 카일렌은 이곳이 제 집이 아닌 것처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가 지은 잘못 때문에 어딜 가든 가시방석인 것도 있었지만, 항상 눈길이 닿는 곳에 있던 미아가 없는 달브는 달브가 아니었다.

“인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미아는 겨우 울음을 그쳐가며 메릴린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노아와 눈을 맞추며 치맛자락을 들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미아, 잘 왔다.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보고 싶었어요.

차마 그 말을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달브를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막상 보니까.

너무 생생히 반가워서 미아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익숙한 것들을 떠나온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미아가 목이 멘 소리를 겨우 내어 메릴린에게도 인사를 마쳤다.

메릴린은 여전히 벅찬 얼굴을 한 채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카일렌이 미아에게 다가와 테이블 앞 의자를 빼주었다.

미아는 그제야 카일렌의 존재를 의식하고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본 메릴린이 카일렌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 어머니.”

“앉아. 주접부리지 말고.”

“……네.”

메릴린은 시종을 손짓해 불렀다.

시종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사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디저트들이 테이블에 놓이기 시작했다.

“어, 어머.”

미아는 끝도 없이 음식이 담긴 그릇을 든 채 들어오는 시중을 보고 당황했다.

이 많은 걸 언제 준비한 거지?

괜히 자신 때문에 부엌에서 일하는 시중들이 고생했다고 생각하면, 미아는 미안해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시중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모두 미아를 안타깝고 반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눈빛에 담긴 마음이 너무 강해 미아는 그것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미아, 어서 들렴.”

“차도 네가 제일 좋아하는 싱그러운 베리차로 준비했단다.”

“감사드려요. 잘 마실게요.”

이런 자리에서 빼는 것도 도리는 아니었다.

미아는 찻잔에 차를 따르고 향을 잠시 음미한 뒤 한 모금 머금어 삼켰다.

은은하고 상쾌한 향이 입안에 퍼져나갔다.

‘이안은 이런 향의 차는 마실 일이 잘 없겠지?’

무심코 미아는 이안을 떠올렸다.

바트르 황궁에 살 때는 제법 자주 마셨을지 몰라도, 아이가에서는 영 구경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권해보고 싶어져서.

그녀가 뒤로 한 채 떠나온 아이가의 황량한 풍경 앞에 선, 꼭 그와 잘 어울리는 서늘한 얼굴의 이안이 눈에 아른거려서.

“미아?”

메릴린이 미아를 찾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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