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안녕, 내 사랑
미아는 미칠 것 같다 외치는 카일렌이 낯설어 얼어붙었다.
카일렌은 그런 그녀를 끌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몸을 뒤틀던 그녀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카일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목이 아프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았다.
대신 그저 힘을 주어 그녀를 끌고 갔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
“그대가 이안 경이랑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면 돌아버릴 것 같아.”
“네?”
“그대는 정숙한 여인이잖아. 나밖에 몰랐잖아! 내 말이면 웃기지 않는 말에도 웃어주었잖아.”
“…….”
미아는 카일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이안이 괜찮은지, 멀어지는 정원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설마 카일렌이 이안과 잠자리를 가진 자신을 원망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제 마음을 내비치는 것이 카일렌을 자극하는 행동이 될까 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지만.
“그런데 어째서 그 사람 옆에서 웃는 것입니까?”
“카일렌 전하, 전하는 이런 분이 아니시잖아요.”
“바보처럼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몰랐습니다.”
“…….”
“내가 당신을 가졌다는 걸, 아주 귀한 당신을 가졌었다는 걸 잊고 있었어.”
카일렌은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미아는 카일렌을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몰라 눈을 굴렸다.
일단 공격을 접도록 설득해야 했다.
“전하.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대화로 해결하죠.”
“이안 경의 뜻은 충분히 알고 있어. 그리고 당신의 뜻도.”
“제 뜻을 아신다면 이렇게 행동하실 순 없을 거예요.”
“뭐?”
“저는 여기서 이안 경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어요. 그렇게 쭉 지내고 싶었고요. 하지만 그걸 깨트린 게 누구죠? 바로 전하잖아요!”
“미아.”
카일렌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알던 미아는 자신에게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가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못 이기는 척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미아의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도 다른 이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느낌이 들 때마다 그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무언가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 아깝고 슬픈 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첫 경험이었다.
그 경험의 상대가 미아임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럼 어쩔 수 없군.”
“네?”
카일렌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허공을 응시한 채로 입을 열었다.
“지난 며칠간 아이가에 머무르면서 지켜보았어. 아이가는 이때껏 아무도 탐을 내지 않아서인지 병력이 엉망이더군. 경호도 허술해, 뚫기가 어렵지 않았지. 제대로 된 기사가 하나 있을까 말까야. 아무리 이안 경이라도 오래 버티진 못할 테고.”
카일렌의 말에 미아의 얼굴이 갈수록 굳어졌다.
그의 의중이 파악될 때마다 점점 더 두려움이 솟구쳤다.
지금 그가 하려는 말은…….
“내가 만약 마음 먹고 아이가를 공격한다면, 아이가가 무너지는 것도 이안 경이 굴복하는 것도 순식간일 거라는 뜻이다. 지금은 그를 제압해 시간만 끌어달라고 했어. 당신 같이 마음이 여린 여자는 그런 폭군의 죽음에도 슬퍼할 테니까.”
“카일렌, 대체 당신…… 누구예요.”
미아는 냉혹한 말을 과감하게 하는 카일렌이 너무 낯설었다.
그에게 이런 면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녀의 눈에 그는 어디까지나 의무를 다하는 착한 아들이자 황태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그의 이면이 있었다.
‘너 같은 애가 황태자라는 게 우리 황국의 수치야.’
카일렌의 이런 열등감과 증오는 뿌리가 깊었다.
몸이 약해서, 몸집이 작아서 이어지던 무시는 튼튼해지고 몸이 커져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에게서 결함과 하자를 찾아냈다.
아무리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라도, 계속되는 비난 앞에서 바르게 크긴 어렵다.카일렌도 그랬다.
그래서 황태자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고 모두가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부류의 여자, 올리비아를 취했다.
그래도,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세간의 평판은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그는 이제 ‘착한, 다정한, 세심한’ 황태자도 되지 못했다.
그의 아내의 믿음을 저버린 탓이다.
단 하나를 잃었을 뿐인데 모든 것을 잃었다.
그 말인즉슨 잃은 그 하나가, 그에게는 전부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미아.”
카일렌이 미아를 불렀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쥐어 당겼다.
미아는 거부할 새도 없이 카일렌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카일렌은 주저 없이 그런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닿는 입술이 뜨거웠다.
미아의 몸이 경직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혼자 상상했던 카일렌과의 입맞춤이 이런 식으로 이뤄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의 혀가 뱀처럼 그녀를 파고들어 감쌌다.
미아는 그에게 저항하려 팔목을 움켜쥐고 몸을 뒤틀었으나, 카일렌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새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근육과 예사롭지 않은 힘이 그녀를 꽉 묶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미아는 진이 빠지도록 몸을 흔들었다.
“나를 따르면 이안 경은 살 것입니다.”
“카일렌. 이러면 안 돼요.”
“그대가 바라는 것이 이안 경의 죽음은 아니겠지? 그녀의 부모님이 애타게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도 그대를 책망할 수도 추궁할 수도 없습니다.”
카일렌은 이미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확고한 눈빛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마음이 굳었으니 그녀로선 돌릴 방도가 없었다.
그저 애원하는 수밖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이리 서글펐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저를 떠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일렌 전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그 실수를 바로 잡겠다는 겁니다. 그대만 돌아오면, 됩니다. 내게 필요한 건 미아 비잘린, 그대 하나입니다.”
미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이안은 그 많은 병력 사이에서 무사할까.
당장이라도 달려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도 같았다.
애초에 미아가 오지 않았다면, 미아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아가 순순히 카일렌을 따랐다면, 이안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이안을 떠났다면, 그에게 머무르지 않았다면.
모든 가정들이 아프게 그녀를 찔렀다.
가장 슬픈 것은 무엇도 후회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를 만나고 겪은 모든 일이, 그의 마음을 알아갔던 그 순간순간이 그녀에게는 애틋하고 소중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 때문에.
오로지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다.
그 사실을 알자 참을 수 없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하겠어, 미아.”
카일렌이 미아를 향해 물었다.
이제 미아가 답할 차례였다.
그의 잔인하고 일방적인 물음에 대해서.
❀ ❀ ❀
이안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들을 하나씩 베어나갔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공격해오면서도 급소를 노리지 않는 것이 별도로 지시받은 사항이 있는 이들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리하면 성에 시체가 널릴 터였고 미아는 그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로 미치니, 이안의 공격도 제한적이었다.
팔이나 다리 위주로 공격을 했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만 다치게 하는 것이 이안의 목표였다.
이안은 이제껏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 몸을 움직였다.
그의 목을 노리는 이는 많았고, 이안은 그들을 베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지킬 것이 생긴 지금, 그의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한 명도 이 자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지켜야 했다.
그들 중 누구도 미아에게 가지 못하도록.
“너희들을 보낸 이가 누구냐.”
목을 겨눈 채 물어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꽤 충성스러운 조직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아이가는 경호가 삼엄한 편이 아니라, 그를 암살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폭약을 터뜨려 시선을 끄는 것보다 밤에 잠입해 목을 베는 편이 나았다.
설마.
“달브 황국에서 왔느냐?”
이안의 물음에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지금 이들이 정말 노린 것은 이안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목을 노리지 않은 것이다.
정작 중요한 병력, 그들의 우두머리가 보이지 않은 것또한 설명이 됐다.
우두머리가 카일렌이라면, 지금쯤 카일렌은…….
“미아!”
이안은 자신들의 계획이 들켰음을 깨닫고 일렬로 달려드는 이들을 사정없이 베었다.
그곳이 목이든, 머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미아를 찾으러 방해하는 것이라면 뭐든 죽였다.
죽여야 했다.
그와 그녀의 사이를 벌리고 헤치는 이들이라면, 그에게서 그녀를 앗아가려는 이들이라면 죽어 마땅했다.
적들을 물리치고 성안으로 들어선 이안은 미아를 찾아 헤맸다.
그들이 머물던 침실에도, 미아가 머물던 방에도 미아는 없었다.
그의 걸음이 바삐 향했다.
꼭대기 방에 숨어있을까, 제발 그곳에라도 숨어있어라.
이안은 스스로가 그녀를 가뒀던 방으로 향해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도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온기라곤 없어 보이는 그 방에, 남은 편지지와 바닥을 구르는 펜대가 보였다.
그의 눈에 바닥에 주저앉아 편지를 쓰는 미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썼던 그녀가, 그를 구하겠다고 숲을 헤치고 들어온 그녀가.
그녀가 사라졌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그런 그의 눈에 애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애니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이안을 보고 황급히 물었다.
“이안 경을 만나러 간다고 하셨는데. 못 보셨어요?”
나를 만나려고 했다?
이안은 그제야 오는 길에 보았던 검을 떠올렸다.
조각상에서 검만 사라진 것을 보아, 그녀가 들고 간 것이 분명했다.
싸우다 환청처럼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구나.
‘정말로, 나를 불렀던 것이구나.’
그때라도 돌아보았다면 그녀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이안을 뒤덮었다.
이안은 시중에게 성 근처를 둘러보라 이르곤 곧장 나가려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 보였다.
“이건…….”
이안은 조각상 근처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들어 올렸다.
익숙한 필체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흘려 쓴듯했지만, 확실했다.
이건 미아의 글씨였다.
혹시 끌려가기 전, 그에게 무슨 힌트라도 남긴 것일까 싶은 마음에 이안은 다급히 글을 읽어내렸다.
그러나,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기대와 달랐다.
‘안녕, 내 사랑’
그것이 미아가 남긴 전부였다.
그는 그 편지를 구길 수도 없었다.
그녀가 힘주어 쓴 그 글씨가 행여라도 망가질까봐.